27화. 폭풍(2)
육군본부 정보과.
당직을 맡은 정보과장 김종필 중위는 새벽 댓바람부터 계속되는 전화에 정신이 없었다.
“뭐? 7사단뿐 아니라 6사단, 8사단, 1사단? 그럼 38선 전역에 포탄이 쏟아지고 있다는 말 아니야?”
각 사단 당직 장교들의 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려왔다.
새벽 3시경 8사단 지역에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게릴라가 침투했다는 보고엔 그리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으레 있는, 빠지면 심심할 악명 높은 행사랄까?
그로부터 1시간 뒤, 38선에 인접한 전방 사단으로부터 모두 같은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적 공격! 적 포탄이 미친 듯이 낙하하고 있다. 지원 바람.]
“비상연락망으로 정보국 장교들 전부 호출해! 나는 작전국에 직접 보고하러 갈 테니.”
“예. 알겠습니다.”
김종필 중위가 상황병에게 명령한 뒤, 곧바로 당직실을 뛰쳐 나섰다.
상황병도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경례도 하지 않은 채 수화기를 붙잡았다.
두 발이 땅에 붙기 무섭게 떼기를 반복하며 달렸다.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골라가며 뛸 시간이 없었다.
평소엔 가깝게만 느껴졌던 작전국이 멀게만 느껴졌다.
“후··· 후··· 당장 전군에 비상을 걸어야 합니다. 당장!”
“무슨 일이십니까? 숨 좀 돌리고 천천히 말씀하십쇼. 그리고···”
작전국 당직 장교의 느긋한 말투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들숨과 날숨이 오고 가는 이 짧은 시간에도, 전방에선 많은 병력이 죽어 나갈 것이 눈에 선했다.
“당장 비상 걸라니까! 북한군이 쳐들어오고 있다고.”
“왜 이러십니까. 저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국장님께 전화··· 아, 국장님이 이사 가신지 얼마 안 되셔서 집에 전화가 없습니다.”
염병할.
전화가 없어?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발끝부터 차오르는 화를 애써 참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당장 헌병대라도 보내서 상황 전파하고 모셔 오십쇼.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군대의 보고체계가 허망하게 느껴졌다.
적이 전쟁을 일으켰다는데.
결국, 작전 국장이 작전국에 자리한다 해도, 권한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있었다.
그 참모장은 또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상의를 통해 비상 명령을 발동할 것이다.
빌어먹을.
어디서 물 떠 올지 고민하다 집을 다 태워 먹을 판이었다.
***
채병덕 총참모장 공관 저택.
“여보··· 여보! 일어나 보셔요. 본부에서 장교 한 명이 직접 찾아왔어요.”
채병덕 참모장의 아내가 잠꼬대하며 몸을 뒤척이는 채병덕을 흔들어 깨웠다.
“아이참. 이 사람이 진짜. 내가 말하지 않았소. 어차피 38선에서 노상 있는 분쟁일 거라니까. 목마르니 물이나 좀 가져오시오.”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침이 나오지 않아 입이 바짝 말라왔다.
전날 육군 장교 클럽 오픈을 기념하기 위해 미 군사고문단과의 술자리에서 과음한 탓.
“여기 물, 그래도 사람이 직접 왔으니 얼른 나가 보셔요.”
“알겠소.”
아내의 성화에 못이긴 채병덕 참모장이 겉옷을 대충 입고는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자 육군본부에서 나온 장교가 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일요일에 대체 무슨 호들갑이야?”
“참모장님. 큰일입니다. 북한군이 전면 남침에 돌입한 것 같습니다. 38선 전역에 적 포탄이 떨어지고 있으며, 이미 1사단, 6사단, 7사단 일부 지역은 적과 조우, 전투 중이라는 보고입니다. 거의 모든 부대가 적 전차에 대응할 방법이 없어 고전 중입니다.”
“미군이 주고 간 대전차 무기들은 장식이야?”
“보고에 따르면 57mm 대전차 포와 M9 바주카포가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일하게 7사단에서 3대의 전차를 잡았다는 보고가 들어와 있습니다.”
궤도만 끊어 시간을 버는 수준이 아닌, 완파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곳은 7사단이 유일했다.
다른 부대들은 수류탄이나 화염병을 들고 직접 뛰어들어 전차와 육탄전을 벌이고 있었다.
맨주먹으로.
“지원병력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막으라고 해! 무기가 없으면 몸으로라도 막으라 해. 알겠나? 그리고 당장 전군, 비상하라.”
채병덕 참모장이 아내가 챙겨주는 군복을 허겁지겁 입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잠결에 생각했던 노상 있던 분쟁 수준이 아닌 전면전.
곧바로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이, 신동우 자넨가? 나 참모장 채병덕이야. 장관님 어디 계신가?”
“예. 충성.”
급히 건 전화에 대꾸하는 목소리는 비서실장 신동우 중령이었다.
격앙된 채병덕 참모장 목소리와는 다르게 여유가 넘치게 들렸다.
“당장 장관님 바꾸게. 전군에 비상 명령을 내려야 하네. 어서!”
닦달하는 채병덕 참모장과는 달리 신동우 중령의 대답은 여전히 느긋했다.
“장관님은 자택에 계실 겁니다. 한데, 오늘은 일요일이지 않습니까. 장관님께서는 오랫동안 영국에서 생활해 오셨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아무도 만나시지도 않고, 전화기도 선을 뽑아 놓으십니다.”
영국?
일요일?
신동우 중령의 상식 밖 대답에 채병덕 참모장이 참아왔던 화를 주체하지 못한 채 쏟아냈다.
“신동우 너 이 개새끼야. 영국이고 미국이고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당장 장관님께 모시러 간다고 전해. 내가 갔을 때까지 준비 안 되어있으면 너 이 새끼 머리에 바람구멍 날 줄 알아. 알겠어?”
채병덕 참모장이 쿵쾅대며 달려와 군용 지프에 올라탔다.
이미 북한군이 본격 남침을 개시한 지 7시간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
7사단 지휘부.
사단 참모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봐 자네,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나타난 건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이나 알아? 무사하니 다행이긴 하네만···”
유재흥 사단장이 꾸지람을 주려다 이내 태도를 바꿨다.
얼굴과 몸에 검게 묻은 화약, 자잘하게 긁힌 자국이 어디서 뭘 했는지 대답을 대신했다.
“죄송합니다. 훈련 시찰을 갔다가 적의 기습을 받는 바람에··· 상황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만세교에서 T-34 탱크를 3대 박살 내고 온 사람이 받는 대우치고는 섭섭하다만, 나중 문제였다.
“그래. 다그쳐서 미안하네만, 상황이 너무 급해서. 자네가 있던 곳 상황은 어떤가.”
“43번 국도로 향하는 관문인 만세교에서 3대의 T-34 탱크를 완파했습니다. 다만, 길을 개척하거나 우회해 돌아야 할 시간을 벌었을 뿐입니다.”
“수고했네. 전군 비상 명령은 아직인가?”
“아직입니다.”
“제기랄. 대체 수뇌부란 놈들이 이 상황에 뭘 하길래···”
상황을 파악한 각부대장들이 빠르게 휴가 복귀 명령, 인민군을 막기 위한 병력을 내보내고 있었지만, 시간을 벌 뿐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감당하기란 어려웠다.
‘이 모지리 삼 형제···’
술 처먹고 마취상태로 잠들어 있는 코끼리, 영국물 좀 먹었다고 유세 떠는 한국인, 이른 새벽부터 아침잠 없이 낚시터에 간 낚시꾼이 제정신을 빨리 차려야 한다.
“우리 사단도 자네가 미리 전면 남침 가능성에 대비한 덕에 겨우겨우 방어선에서 적을 막아내고 있다만,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일세.”
1사단과 6사단은 힘겹긴 하지만 비교적 공세를 잘 버텨내고 있었다.
반면 7사단은 주요 도로에서 적 전차의 발을 묶어 최선의 지연전을 펼치고 있음에도, 벼랑 끝에 뒤꿈치만 붙인 채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7사단이 가장 위험에 놓인 것은 훈련이 부족하거나 방심해서가 아니다.
동두천-포천이 적의 주공로인 것은 둘째치고, 47km가 넘는 길고 넓은 방어 지역.
1사단은 강, 6사단은 산, 자연이 만든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있어 유리했지만, 7사단에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다.
“제1 방어선은 이미 무너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주 저항선에서 최대한 적을 지연시킨 뒤, 축석령에 최후 방어선을 치고 미군이 들어올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미군? 얼마 전에 짐 싸서 떠난 미군이 그렇게 쉽게 곧바로 참전하겠나? 이대로라면 3일. 아니 하루 이틀이면 우리 사단은 전멸하고 말 것이네.”
3일?
하루나 이틀도 매우 훌륭한 지연이다.
대비전 7사단이 몇 시간 만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며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후퇴하더라도 1사단, 6사단과 계속 현 상황을 주고받아 서로의 측면이 노출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미군은 반드시 참전할 것입니다. 생각보다 빨리.”
지금쯤 벌써 저 멀리 바다 건너 일본에 있는 쇼군에게 연락이 닿았을 것이다.
어쩌면 모지리 삼 형제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알겠네.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1사단, 6사단과 인접한 부대는 지휘관 상호 간 공조를 확실히 하라고들 전하게.”
고작 38선 인근에서 탱크 몇 대를 막는다고 전쟁의 전체적인 판도는 바꿀 수 없다.
애초에 남침 징후를 파악하고 나라 차원에서, 군 차원의 대비를 하지 않을까? 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채병덕이 아닌 내가 참모장 정도 됐다면 모를까.
소귀에 불경이던, 성경이던 그 어떤 경전을 들이밀어도 소용없는 법.
‘조금만 버티면 된다.’
기존에도 미국과 UN이 발 빠른 대처를 보여줬다지만, 더 빨라야 한다.
더. 더. 더 빠르게.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전사 기록에 따르면 공식적으로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가 미 국무부에 전문을 보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7시간 26분.
물리적인 거리로만 따진다면 매우 훌륭한 보고체계였으나, 휴일은 한국인, 미국인 가릴 것 없이 쉬고 싶은 날인 법.
핵심 지휘라인이 죄다 부재중인 건, 미국이나 대한민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애치슨 국무장관도 아마 지금쯤 메릴랜드의 개인농장에서 비료나 뿌리고 있을 것이고, 트루먼 미 대통령도 미주리주에 있는 개인 저택에서 광합성이나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쯤 기사가 났으려나?’
맥팔랜드 대위에게 편지를 부탁했을 때, 부탁한 편지는 한 장이 아닌 두 장이었다.
한 장은 일본에 있는 외국인 쇼군.
그리고 다른 한 장은 UP통신소속 서울주재특파원 잭 제임스 기자.
잭 제임스 기자에게는 직접 전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음. 뭐랄까.
처음 보는 외국 장교가 편지를 건네는 것보다, 미 군사고문단 소속 장교가 직접 건네주는 편지가 훨씬 믿음직스럽게 느껴질 테니까.
[At 4 a.m. on June 25, a big scoop will occur in Korea. If you want a scoop, don't sleep and wait! (6월 25일 새벽 4시, 세계가 놀랄만한 대형 특종이 한국에 발생할 겁니다. 특종을 원한다면 잠도 자지 말고 기다리세요!)]
편지 내용은 언제나 그렇듯 간단했다.
기자에게 특종은 잠보다 더 중요한 법.
잭 제임스 기자 손에서 미친 듯 빠르게 쓰인 기사는 일본과 미국 신문사에서 이미 똑같이 쓰여 인쇄되고 있었다.
[the outbreak of war in Korea. Is it the trigger of World War III? (한국에서 전쟁 발발. 혹시 세계 3차대전의 도화선?)]
한국보다 빠르게.
누구나 솔깃 할만할 자극적인 제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