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28화 (28/149)

28화. 의정부 방어선(1)

미국 동부 메릴랜드.

한적한 개인 농장.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늦은 시간까지 농장 소일거리를 마친 뒤, 자택에서 한가롭게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여유인지 모르겠군.”

지독히도 바쁘고 어지러운 업무 속, 주말농장에서 농작물을 가꾸는 것이 그의 몇 없는 소소한 낙 중 하나였다.

“제기랄. 역시 여유라는 말은 입에 올려선 안 됐어.”

음식점에서 오늘은 손님이 없겠지?

회사에서 오늘은 바쁜 일이 없겠지?

꼭 이런 말을 내뱉은 뒤엔, 기가 막히게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

여유라는 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맛 좋은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던 치킨을 바라봤다.

“제길. 이제 다 익었는데.”

애치슨 국무장관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차 한 대가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곳은 왕복 도로가 아닌 편도, 차가 라이트를 비추며 달려오는 길 끝엔 애치슨 국무장관의 농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차가 아니라 골칫덩어리가 굴러오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장관님. 평화로운 토요일에 죄송합니다. 급한 상황이라··· 한국에서 뭔가 일이 터진 것 같습니다.”

메릴랜드와 한국의 시차는 14시간.

한국은 25일 오전 10시였지만, 메릴랜드는 24일 저녁 8시였다.

애치슨 장관을 찾아온 남자가 곧장 서류가방에서 신문을 꺼내 건넸다.

[the outbreak of war in Korea. Is it the trigger of World War III? (한국에서 전쟁 발발. 혹시 세계 3차대전의 도화선?)]

“대체 이 망할 것은 뭔가? 사실 확인은? 이런 중요한 일이 어떻게 내가 알기 전에 일간지에 실릴 수 있지?”

당연, 종이에 대문짝만하게 써진 글씨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미 국무장관인 자신도 모르고 있던 사실을 어찌 언론이 먼저 터트릴 수 있는가.

사실이어도, 사실이 아니어도.

단순히 생각해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골치 아픈 일이 터진 것임은 분명했다.

“정확한 상황은 파악 중입니다만, 신뢰할만한 정보인 것 같습니다.”

“상황은 파악 중인데, 신뢰할만하다? 자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그게···”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UP 통신이 촌 동네 코믹 연극단도 아니고, 당장 문 닫고 싶어 미치지 않고서야 아무런 근거 없이 가짜 뉴스를 신문까지 찍어냈을 리 없다.

게다가 국무장관인 자신에게 보고가 오기까지 벌써 꽤 많은 사람을 거쳤을 것이다.

한국이라면 국무부 극동과 공보관 브래들리 커너스에게 먼저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고, 오늘 당직은 최고 책임자가 러스크 차관보였나?

“말해보게. 어서. 사실이라면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네.”

“정보를 종합해보면 사실인 것으로 판단되는데, 한국 정부 측에선 아직 공식적인 어떤 요청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공식적 요청이 없었다는 말에 점차 상황이 맞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단 워싱턴으로 가지. 대통령님께 직접 보고해야겠네.”

애치슨 국무장관이 입은 옷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일 분 일 초가 급한 상황에 대비해 집무실에 예비 옷 몇 벌을 준비해 뒀기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꼴이 말이야. 아무리 정신이 없다 한들, 한국에서 공식 입장을 보내오기 전에 UP 통신이 어떻게 먼저 알 수 있었지?”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점.

미국 또한 북한의 남침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염두 했다면, 핵심 지휘라인이 농장에서 비료나 뿌려대는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안 그래도 그 점이 수상해 알아봤습니다만, 한국에 나가 있는 UP 통신 특파원에게 한국 시각으로 25일 새벽에 뭔가 일이 터진다는 편지가 왔었다고 합니다. 편지를 전해온 자는 미 군사고문단에 소속된 맥팔랜드 대위고, 편지를 쓴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그게 누군가?”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쟁이 터진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한국 전방 7사단에 있는 이강산이라는 장교였답니다. 음··· 어디 보자···”

서류 몇 장을 뒤로 넘겨 이강산에 대한 정보가 적힌 서류를 찾아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건넸다.

“북한 원산항을 날려버린 한국군 특수부대를 이끈 자란 말이지? 중위를 단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써 대위로 승진했고. 승진속도로 보면 뛰는 것도 아니고 날고 있군.”

“예. 처음에는 저도 혹시 공산당 측에서 심어 놓은 스파이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딱히 의심할 만한 행적은 없었습니다.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간 현 상황을 미리 예견하듯 작성된 비슷한 보고서들은 국무부에 꽤 많이 쌓여 있습니다.”

애치슨 국무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의심이 아닌 사실에만 입각해 판단한다면 원산항이 수많은 군수물자와 함께 폭파된 건 사실이다.

고작 스파이 몇 명 심자고 가짜 신뢰를 쌓기 위해 원산항을 폭파한다?

말 그대로 벼룩 잡자고 집을 폭격해 날려버리는 것과 다를 것 없다.

아주 정확한 촉과 남다른 시야를 가진 장교라고 보는 것이 훨씬 그럴싸했다.

“전역하면 점이나 보러 가고 싶을 정도군. 덕분에 보다 빨리 대응할 수 있게 됐어. 상황파악은 됐으니 당장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를 소집하게. 내 오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어. 서두르게.”

북한이 한국을 침공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오판.

애치슨 라인을 선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어진 이 사태를 어서 수습해야만 했다.

국무부에 도착한 애치슨은 그 즉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를 올렸다.

“대통령님. 중대한 소식입니다.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였습니다. 맥아더 장군을 지금 즉시 한국에 파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맥아더의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롭던 일본 생활이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

-쾅! 쾅! 쾅!

7사단 지휘부.

번쩍이는 섬광이 먼저 보이고, 몇 초 지나지 않아 포성이 귀를 때려댔다.

포탄이 떨어지는 곳이 그리 멀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현 상황은 어떤가! 조금 더 버틸 수 있겠는가?”

“1연대, 9연대 모두 필사의 각오로 적을 저지하곤 있지만, 곧 한계에 다다를 겁니다.”

유재흥 사단장이 희망이 있냐는 표정으로 물어왔지만,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순 없었다.

“2사단이 대전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해가 질 때까지만 버티라고 해!”

조금씩 남쪽으로 밀려나고 있었지만, 전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마법에 가까운 일이었다.

7사단을 기준으로 좌측 국군 1사단은 봉일천으로 후퇴해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고, 김종오 사단장이 지휘하는 6사단은 파도처럼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 2군단의 공세를 비교적 수월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9연대는 후퇴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지금껏 버틴 것도 기적에 가깝습니다. 의정부로 향하는 길목을 지켜내려면, 2사단 병력이 도착하는 그 즉시 축석고개를 점령하고 방어 진지를 구축해야 합니다.”

1연대는 그 자리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인민군 4사단을 막아내고 있었다.

9연대는 만세교에서 시간을 벌긴 했지만, 적의 주력 전차 여단이 집중된 탓에 빈사 상태에 가까웠다.

“2사단장은 후방 3개 사단을 한강 방어선에 모아 집중한다고 하네. 대대 단위 병력이 우리를 돕기 위해 금오동에 방어선을 구축한다고 알려왔네만.”

제발.

다시는 해서는 안 될 오판이다.

의정부방어에 가장 최적화된 축석고개를 버린다?

염병할 우스갯소리지만, 사단장과 계급장 떼고 맞짱 뜨더라도 막아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사단장님. 축석고개를 버리는 건 의정부를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형근이 2사단장에 임명된 건 불과 2주 전이다.

아직 작전을 제대로 숙지하기에도 모자랄 시간.

의정부방어를 위해 후방 사단까지 동원해 틀어막으려는 근본적인 이유는 간단했다.

의정부가 뚫리는 건, 곧 서울이 뚫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의정부-송추-연신내.

의정부-창동-미아리.

의정부-퇴계원-태릉.

3개의 길목이 적에게 있어 공격 루트의 선택폭을 아주 든든하게 늘려 줄 테니까.

막아야 한다.

망할 금오동이 아닌 축석고개에서.

“우리 사단이 아닌 이상에야 내가 당장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사단장님!”

사단장님, 말 끊어서 미안한데.

절대 안 돼.

절대 지지 않겠다는 단호한 말투로 설득을 시작했다.

“여기 지도를 보시겠습니까? 철원-포천-의정부 축선을 가볍게만 훑어봐도 의정부를 사수하기 위해 아군이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할 병목이 어디로 보이십니까.”

지도까지 펴 이곳저곳 일일이 설명해줘도 못 알아먹는다면, 사단장 자격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렇게 무능하지 않길 바라고.

“축석고개일세.”

유재흥 사단장이 드디어 알았다는 듯, 지휘봉으로 축석고개를 찍으며 말했다.

그렇지. 잘했어.

그렇다니까?

사실 그렇게 생각이 필요할 만큼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숟가락에 밥을 얹고, 그 위에 반찬까지 얹어서 입에 넣어주는데.

입에 달린 저작근을 움직여 씹어 삼키는 것까지 도와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맞습니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축석고개를 쥐고 있으면, 적 3사단과 105 전차 여단을 한동안 의정부에 묶어둘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사안입니다만···”

“말해보게.”

“7사단 방어선이 존망 위기에 놓여있으니, 다른 생각 말고 도착한 즉시 지원할 것을 요구해 주십쇼.”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처리했다면, 이 꼴이 나진 않았겠지.

아, 물론 커피라도 드시고 싶으셨는지 대전에서 힘겹게 올라와 난데없이 육군본부로 향했던 2사단장을 저격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전쟁 중에 카페인이 부족했을 수도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사단장님. 훌륭한 지휘관을 만나는 것도 하늘이 내리는 선물이라던데,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큰 울림을 느꼈습니다.”

“허허··· 본디 부하의 말을 경청하고, 합당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지휘관이 가져야 할 덕목 아니겠나. 자네 같은 부하가 있기에 훌륭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게지.”

본인 입으로 훌륭하다는 말을 내뱉는 것 보니 당근이 제대로 먹혀든 모양이다.

정신없는 와중에 당근을 줘가며 토닥이는 일까지.

정말 눈, 코 뜰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 수가 없을 것이다.

‘어쨌건 군대는 계급이 깡패인 곳이니···.’

훌륭한 작전, 발언이 힘을 얻는데 계급은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출세하기 위해서가 아닌 살기 위해서.

나아가 더 많은 사람을 살리고, 안타까운 과거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 나의 진급은 미래를 위한 좋은 과정이 될 것이다.

“지금쯤 바다 위에 떠 있으려나?”

멀리서 그 좋은 과정에 힘을 실어줄 사람이 포화가 쏟아지는 대한민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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