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의정부 방어선(2)
6월 25일.
정신을 차린 한국 정부와 이승만 대통령은 UN 한국위원회와 긴급회의를 통해 평화적 해결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북한 측에 즉시 전쟁 중지 요구, 평화회담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자고 하였으나 들어 먹힐 리 없었다.
북한은 UN 안보리 특별회의에서 요구한 한반도에서 전투 중지, 북한군의 즉시 38도선 철수 결정, 미국이 요구한 정전요구결의안을 채택한다는 것도 남 얘기하듯 들을 뿐이었다.
이에 연합군 최고 사령부(SCAP)는 한국에 무기를 긴급 공수.
트루먼 미 대통령은 38선 이남 지역에 국한해 미 해군과 공군의 작전을 승인한다.
***
주일미군 공군 소속 C-54 수송기 안.
필리핀 육군 원수 정모에 짙은 레이밴 선글라스.
다만 입에는 상징과도 같은 콘파이프 대신, 브뤼에르 나무로 만든 고급 수제 파이프가 물려있었다.
콘파이프는 레이밴 선글라스와 함께 맥아더의 아이콘이었지만, 실제로 콘파이프를 이용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저 고급 파이프를 챙기지 못했을 때 찍힌 사진이 유명해져서 일뿐.
군인이지만 이미지 관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지?”
“한 시간 안에 한국 수원 비행장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맥아더의 질문에 대답하는 펀치 소령의 얼굴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전쟁이라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알겠네.”
워싱턴과 미 국무부에서 한국의 상황을 파악하라는 전문이 도착했을 땐, 이미 수송기 안이었다.
트루먼 대통령과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트루먼이 의회 사전 승인에 붙잡혀 이도 저도 못할 인물이 아니라는 확신은 있었으니까.
아마 그라면 이렇게 말했겠지.
[내 집에 강도가 들었다면, 나는 경찰서에 가서 허락을 받지 않고도 강도를 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나는 유엔 헌장 아래 이러한 행동을 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말을 뒷받침할 칼자루는 극동 최고 책임자, 사건이 발생한 근원지와 가장 가까운 데 위치한 사령관인 자신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한국군의 상황은 어떤가?”
“마지막에 들어온 보고까지 모두 종합해 본바, 한국군 독자적으로 북한군을 막아낼 능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수도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막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맥아더가 파이프를 문 입을 오물거렸다.
그가 집중할 때 나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기습 선제공격을 당하고 시작하는 전쟁은 언제나 어려운 법이지. 우리 위대한 미국도 진주만에서 일본 놈들 기습에 한 방 먹었던 전례가 있으니. 한국군이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방어하고 있는 구역이 이곳인가? 의정부?”
맥아더가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가 지도한 곳을 향했다.
의정부.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다만, 사령관님께서 그곳에 도착하실 때까지 한국군이 버티고 있기는 힘들어 보이며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된 곳인지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펀치 소령이 걱정스레 대답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이미 예측할 수 있었으니까.
최전방 시찰.
“이봐 소령,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나. 전쟁과 안전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따라 그 어디도 위험한 법이고, 그 어디도 위험하지 않은 법이네. 다만.”
지금 이 순간 펀치 소령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자신이 사령관을 너무 잘 알아버렸다고.
행보에 이어 입에서 나올 말까지 똑같이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In war.”
전쟁에서.
“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역시.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맞췄다.
펀치 소령의 속도 모르는 채, 맥아더는 다시 파이프를 입에 물며 생각했다.
주님 뜻대로 또다시 운명의 도구가 되었다고.
자신에게 편지를 보냈던, 자신이 운명의 도구임을 알고 있는 한국군 장교가 궁금하다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딱 두 가지뿐이었다.
C-54 수송기가 점점 육지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
9연대 방어 구역. 포천 인근.
최선의 지연전을 펼치고는 있었지만, 서서히 최전방 격전지는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대대장님. 제 신호가 있기 전까지 절대 먼저 공격 명령을 내리시면 안 됩니다.”
“알겠네. 정말 이 방법으로 저 무식한 탱크를 막을 수 있겠는가?”
대답한 이는 9연대 예하 5포병 대대장 이규삼 소령이었다.
5포병대는 통신이 끊겨 늦게 후퇴하던 중 점차 꼬리가 잡히고 있었다.
“불가능하다 말씀드리면, 지금이라도 다시 물리시겠습니까?”
이규삼 소령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통신두절로 후퇴하며 105mm 야포와 부하들을 대부분 잃었다는 죄책감에 이규삼 소령이 자결하려는 것을 겨우 뜯어말렸다.
이규삼 소령을 우연히 만나 살리기는 했다만, 사단 사령부에서 포천 인근까지 온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개전 하루면 동두천, 포천을 지나 의정부를 점령할 것이라는 북한군의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1연대, 9연대, 후속한 25연대가 압도적으로 밀리는 화력 차 속에서도 생각보다 많은 적의 탱크를 격파하고 있었다.
전세를 뒤엎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탱크의 피해를 전혀 생각지 않았던 105 전차 여단이 느끼기엔 여간 짜증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대대장님.”
“알고 있네. 이미 한 번 죽은 자가 무엇이 두렵겠는가.”
대답하는 그의 얼굴엔 이미 필사의 각오가 새겨져 있었다.
전쟁터에서 기회란 절대 여러 번 와주지 않는다.
목숨이 한 개뿐이듯, 기회도 한 번뿐이라는 인식을 깊게 심어주었다.
“옵니다. 위치로!”
200m쯤 떨어진 곳에서 T-34 두 대가 사이좋게 나란히 남하하고 있었다.
해치 상단에 흰 깃발을 매단 채로.
‘개새끼들···’
전쟁에 규칙과 규율이 다 지켜질 리 만무하지만, 원래대로라면 흰 깃발은 투항을 뜻한다.
싸울 의지가 없음을 알리는 것이 저 흰 깃발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이건 투항이 아닌 기만이다.
생각지 못하게 전방에서 전차들이 주춤하자 인민군 3사단장 리영호는 새로운 전술을 지시했다.
[선두 땅크 상단에 흰 깃발을 매단 채 앞세우라. 투항 인솔을 위해 위치를 노출 시킨 멍청한 국방군을 모조리 섬멸하라.]
포격으로 인해 상위 부대와 통신이 끊긴 부대들은 오롯이 각 부대 지휘관 명령에 따라야 했다.
진지를 잘 지키고 있던 소대, 중대 규모의 부대들은 처음 겪는 적의 기만전술에 휩쓸려 쓰러지고 있었다.
“저 빨갱이 새끼들이 기만술을 편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는 건가?”
리영호 사단장 머릿속에서 나온 기만술은 엄밀히 따져보자면 엄청나게 뛰어난 계략이나 전략은 아니지만, 많은 지휘관이 기만전술에 당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통신이 끊기고,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며 전우들이 쓰러져가는 와중에 하나하나 제대로 따져볼 겨를이 없는 건 당연지사였다.
“보병들이 항복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저기 오는 탱크는 포신을 위로 향하지도, 해치를 열고 있지도 않습니다. 양손에 총과 수류탄을 쥔 채로 항복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겁니다.”
어느덧 T-34 탱크가 10m 부근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105mm 야포를 직격으로 쏴 탱크를 무력화시키는 작전은 당연,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경야포라 불린다고 해서 건빵 주머니에 건빵 넣다 빼듯 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포가 없는 포병은 보병과 다른 것이 없다.
나와 5포병 대대장을 비롯한 7명의 특공대 손에 들린 것은, 1파운드 TNT 12개를 묶어 만든 12파운드짜리 급조 다발수류탄이었다.
말이 수류탄이지, 5kg이 넘는 다발수류탄을 지근거리에 가서 던지는 건 죽음을 불사해야 할 일이었다.
후속하는 보병이라도 있다면, 던지기도 전에 온몸에 총알 문신이 새겨질 터.
다행히 북한군 보병은 기만에 성공하기 위해 시야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채 따라오고 있었다.
왼손을 특공대가 모두 볼 수 있을 만큼만 들었다.
늦거나 일찍 투척하는 사람이 없도록 손가락 다섯 개를 편 뒤, 하나하나 접기 시작했다.
5···
4···
3···
2···
1···
다섯 개의 손가락이 모두 접힘과 동시에 투척 명령이 떨어졌다.
“투척!”
투척 명령과 동시에 7명이 하나와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임시로 파놓은 진지 밖으로 몸을 내밀고 두 손을 모두 사용해 있는 힘껏 다발수류탄을 T-34를 향해 던졌다.
“엄폐해! 엄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T-34 전차포가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미 다발수류탄이 곳곳에 귀걸이, 목걸이처럼 걸린 뒤였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가까운 거리에서 투척한 만큼, 엄폐해야 할 곳도 가까운 곳이었다.
엄폐를 통해 TNT 폭발과 파편을 피한다 해도, 귀를 찢어버릴 듯 들리는 폭발음마저 막을 순 없었다.
[청력 이상 발생. 청력을 자동 조절합니다.]
폭발 후 몇 초간은 울려대는 이명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머지 특공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정신 차려! 이봐, 정신! 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진지 주변을 빠르게 돌며 어깨를 흔들거나 머리를 쳐 정신을 다잡아 줬다.
이 정도면 전쟁터의 마더 테레사 아닐까?
“사격 준비!”
아직 할 일이 남았다.
TNT는 탱크의 장갑을 뚫지 못한다.
다만 폭발할 때의 압력과 열로 내부를 곤죽으로 만들 뿐.
7명 전원의 총구가 T-34 탱크 해치를 향하고 있었다.
-끼이익.
기름칠 덜 된 철끼리 문지르는 소리가 나더니, 해치가 열렸다.
탱크 내부에 연기가 먼저 살겠다는 듯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동··· 동무들··· 항복이라요. 쏘지 마시라···”
-탕!
엄청난 열에 피부가 녹아내린 채 해치를 열고 나오는 인민군 전차병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탕!
-탕!
함께 피땀 흘리며 함께 지내던 전우를 잃은 5포병대대 특공대의 인내심은 같잖은 말을 모두 들어줄 만큼 길지 않았다.
-탕!
마지막 총성이 울렸다.
해치에서 더 나오는 인민군이 없자, 이규삼 소령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내가 왜 니들 동무야··· 이 빨갱이 개새끼들아···”
그래.
맞는 말이다.
동무끼리는 서로 총을 쏴대진 않으니까.
***
7사단 사령부.
상황을 보기 위해 TNT 그을음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사령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속해서 지연전을 펼치곤 있지만, 동두천과 포천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문제였다.
-앞으로의 작전 계획은···
아.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들어가지 말까? 라고 생각했다.
“충성!”
“작전 장교라는 놈이 자리를 비우고··· 옆에 서서 듣기나 해.”
자리를 비운 대신, 잡아낸 적 탱크가 1대, 2대도 아니고 5대다.
이래서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는 아주 어릴 적부터 가르쳐야 한다.
채병덕 총참모장이 7사단 사령부에서 참모들과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내일 새벽을 틈타 7사단, 2사단은 역습에 나선다. 후속하는 3사단, 5사단이 뒤를 맡은 것이다.”
꿀. 꿀. 꿀.
사람이 변하는 건, 개가 고양이를 낳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확실한 것 같다.
개인 탄약? 없다.
공용 화기? 없다.
대전차 무기? 있을 리가.
무전기? 그게 뭔데?
“참모장님 제가 보고 온 바로는···”
씨알도 안 먹히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
맨주먹으로 탱크와 싸울 수 있는 건 만화에서나 가능한 거고.
아니면 확 이걸 쏴버려?
실행은 힘들겠지만, 마음만큼은 그 어느 작전보다 진심이다.
“역습은 무리···”
말을 시작함과 동시에 채병덕 참모장의 지휘봉이 서서히 들리려던 찰나.
“Are you in a strategy meeting? (작전 회의 중인가?)”
영어가 들려왔다.
영어가 이렇게 달갑게 들릴 수가 있던가?
노크도, 허락도 경례도 없이 사령부 회의실에 여유로운 자태를 뽐내며 들어올 수 있는 외국인은 한 명뿐이다.
맥아더 더글라스 사령관.
한국말로는 우리 형.
“반갑소.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이요.”
채병덕 참모장이 맥아더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맥아더는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회의실을 눈으로 모두 훑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참모장, 사단장, 이하 참모들은 기암을 감추지 못했다.
“Who is Lee Kang San? Is he here? (이강산이 누구지? 여기 있나?)”
“It's me, Commander. (접니다. 사령관님)”
“Nice to meet you. (반갑네.)”
맥아더가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빨리, 그것도 최전방까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그 아무렴 어떠리.
채병덕 참모장은 헛기침이나 하며 무안한 손을 바지 옆으로 내리고 있었다.
“It's an honor. (영광입니다. 사령관님)”
맥아더가 내민 손을 재빨리 잡으며 말했다.
할 말도, 할 일도 정말 많다.
그 많은 일 중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정말 개인감정은 1도 섞여 있지 않은데···.
‘근데 가장 먼저 저 채병덕이. 쟤 좀 치워주면 안 될까 형?’
좀 나가 있어.
물론 속마음이지만.
판을 뒤집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