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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31화 (31/149)

31화. 귀한 선물

“아니 각하, 그게 대체 무슨···”

이승만 대통령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은 채병덕 참모장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탁자에 주먹을 힘껏 내리쳤다.

-나도 당황스럽네만··· 어쩌겠나. 자네가 이해하게. 갈만한 적당한 자리는 알아 봐놓겠네.

“총참모장에서 내려오라니요. 각하, 이건 분명 음해가 분명합니다. 이 중요한 판국에 대체 누가 그따위 망발을 하고 다닌단 말씀입니까!”

총참모장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전화.

명색이 총참모장인데, 직접 대면도 아닌 전화로 받는 해임 통보가 절대 달갑게 들릴 리 없었다.

-이보게 자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어찌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미군 측에서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을 어쩌겠나. 그러게 맥아더 사령관을 만나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맥아더···저를 해임 시키라는 놈이 그 양놈입니까? 각하, 저는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기습을 당해 정비할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미국 놈들의 전투기와 탱크 지원 없이도 빨갱이 새끼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채병덕의 머릿속이 온통 화로 가득 찼다.

주먹을 있는 힘껏 꽉 쥐었다.

힘을 너무 꽉 준 탓에, 손톱이 손바닥 안쪽을 파고들며 피가 비쳤다.

“각하! 정말 제 충성심과 최선을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거구의 몸을 이끌고 얼마나 힘겹게 최선을 다했던가.

북한군 포격 탓에 전방과의 통신이 시원찮아 7사단 사령부에 무려 다섯 번은 넘게 열심히 들락거렸다.

그게 총참모장이 마땅히 해야 할 최선인지는 모르겠지만.

-후··· 이 사람. 그런 줄 알게. 끊겠네.

이승만 대통령의 깊은 한숨이 수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더는 듣고 있을 가치가 없다는 듯,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으··· 으악! 이 개새끼들! 감히. 나를 해임 시켜? 이 채병덕이를?”

자신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승만 대통령이 끊은 전화기를 보고 있자니, 화가 더욱더 치밀어 올랐다.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전화기를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렸다.

소리를 지르고, 알고 있는 온갖 욕이란 욕은 다 해봤다.

주먹으로 탁자를 부술 듯이 내리치고, 부서져 버린 전화기를 봐도 깊숙한 분노는 도무지 해소되지 않았다.

“후···”

채병덕 참모장이 드디어 지쳤는지 고개를 돌려 엉망이 된 참모장실, 자신의 주먹을 확인했다.

양 주먹이 모두 벌겋다 못해 퉁퉁 부풀어 올라 있었다.

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도 않았지만, 통증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해임을 당했다는 분노.

억울한 분노에 후속하는 수치, 굴욕.

수많은 감정이 머리를 스쳤다.

“후···”

분노가 잦아들어 호흡이 돌아왔을 때쯤, 마지막으로 고개를 드는 감정은 일말의 죄책감이었다.

“도무지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군.”

적당한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는 말 따윈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필요도 없다.

살다 보면 분노, 수치, 굴욕은 언제였냐는 듯 잊고 살지도 모른다.

스르륵.

채병덕 참모장이 탁자 바로 아래 서랍을 열어 권총 한 자루를 꺼냈다.

이 쇠붙이에서 쏘아지는 작은 탄두 하나, 이것 하나면 지금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 참, 날씨도 날 반기지 않는구만 기래.”

채병덕 참모장이 탁자에서 꺼낸 권총을 손에 쥔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

편지 한 통과 그리 길지 않은 독대가 가져온 바람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7사단장 유재흥을 의정부지구 전투 사령관에 임명한다. 작전 장교 이강산 대위를 소령으로 1계급 특진하여 작전 참모 임무를 수행토록 하라.]

맥아더에게 건넨 편지에 적힌 내용은 크게 나누자면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눈으로 전황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

국군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의 실태와 턱없이 부족한 탄약, 식량, 공용화기.

탱크와 전투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것들과 함께 맥아더에게 전하고 싶었던 건 소련, 중국과 함께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한 북한군은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맥아더가 흑화하는 일은 일어나선 안 된단 말이지.’

언제고 맥아더가 브레이크를 뗀 채 급발진할 가능성을 잊어선 안 되니까.

두 번째는 아주 간단했다.

내 자랑.

너무 티가 나지 않을 선에서 맥아더가 좋아할 만한 문장, 단어 하나하나를 나노봇과 머리를 맞대 교묘히 섞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대충 썼다가는 나에 대한 인식이 지휘부의 무능만을 폭로하고 자만심에 가득 찬 한국 장교 나부랭이로 보일지 모르는 일이니까.

육군본부에서 내려온 전문을 보니, 편지가 썩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끊어진 통신망을 재구축하여 의정부 방어에 가용 가능한 부대의 소재와 편제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책임자는 연락 장교단장이 가장 적합할 것입니다.”

기분 탓일까?

작전 장교에서 참모로 직책이 바뀌어서인지, 목소리에 좀 더 힘이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알겠네. 1사단과 6사단, 8사단과의 교신은 잘 이루어지고 있나?”

“양호합니다. 1사단은 임진강에 방어선을 치고 적을 막아내고 있으며, 6사단과 8사단은 현재 가평군 일대에서 적을 막아내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의정부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각 사단은 모두 측면이 노출되어 후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좌우 1사단과 6사단은 각각 임진강과 강원도 비탈길을 활용해 적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4개의 사단이 서로 등을 겨눈 채, 등을 맞댄 아군을 믿고 적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한 곳에라도 구멍이 뚫리면, 구멍 난 풍선에 바람 빠지듯 적이 물밀 듯 들어올 테니까.

“알겠네. 계속 수고해주게.”

계속 수고해달라는 말이 사단장의 임무라면, 지나가는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지나가던 어린아이보다는 내가 훨씬 더 잘 할 수 있고.

생각 같아선 야전 전투 경험이 없는 무능한 장성급 지휘관들을 모조리 갈아내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생각하고 싶진 않은데···’

지금 상황에선 근거 없는 똥배짱으로 닥치고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정도만 아니라면, 비교적 유능한 축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속 편했다.

유재흥 사단장이 아직 7사단 건재를 유지해 의정부 지구 전투 사령관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내 말을 무시하지 않고 잘 들었기 때문이니까.

“아, 그리고 말일세. 육사 생도를 투입하라는 명령은 취소됐네. 수도경비사령부 3연대와 증원부대로 어떻게든 막으라는 명령이야.”

“알겠습니다.”

채병덕 참모장, 아. 이젠 참모장이 아니지.

그는 이젠 참모장이 아니었다.

어디로 좌천됐는지는 나중에야 알겠지만, 잘해야 할 텐데.

채병덕이 해임됨과 동시에 그가 내놓았던 기가 막힌 작전들도 모두 휴짓조각이 되어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안 그래도 소규모 부대를 지휘할 초임장교들이 전국 각지에서 북한군의 총탄에 쓰러져나가고 있는 판국에, 후방으로 보내 훈련을 빨리 마쳐도 모자랄 육사 생도대를 최전방으로 보내겠다는 작전도 폐기됐다.

육사 생도대는 지금은 교육생일지 모르지만, 길어질지 모르는 이 전쟁의 미래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2사단과 함께 동두천을 탈환하라는 말 같지도 않은 작전이 취소된 점이다.

‘축차 투입을 막아 제대로 된 병력으로 방어선을 형성한다면,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어이없는 축차 투입으로 인해 제대로 된 성과 없이 소실될 부대를 잘 갈무리해 방어선을 형성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무엇보다 의정부에 무덤을 파고 적이 무덤을 밟고 지나갈 때까지 지키란 소리가 아니다.

짧으면 국군 후방 사단이 전방으로 올라와 제대로 된 편제를 갖추고 증원될 때까지.

길면 미 육군과 UN 연합군이 대한민국 땅을 밟을 때까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해내야만 했다.

“반드시 막는다.”

풍전등화의 위기 아래에 놓인 것이나 다름없지만, 막아야 한다.

아니? 막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

의정부역.

“정말 이게 추진된 물자 전부란 말인가? 한 끼 식량도 안될 것 같은···”

군수참모 윤영모 소령이 용산에서 추진된 주먹밥과 군수물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적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작전 소요에 최우선을 두고 열차를 통제하던 중이었다.

굳이 정확히 세어보지 않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도 어렵게 겨우 구해서 추진한 것입니다. 저도 마음 같아선 뚝딱 하고 만들어 보내고 싶은 심정입니다만··· 죄송합니다.”

결사 항전하겠다는 의지도 중요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적으로 의지만으로 전투에서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어렵게 구해서 추진했다며 고개를 떨구는 김영호 중사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를 도무지 나무랄 수가 없었다.

“하. 이건 고폭탄이 아니지 않은가. 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부평 탄약 중대에서 추진된 105mm 포탄을 보고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인명 살상을 위해 제작된 고폭탄이 아닌, 백린 연막탄.

당연히 아예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전투의 큰 도움이 될 순 없는 포탄이었다.

“죄송합니다.”

“계속 뭐가 죄송하다는 건가. 자네가 무슨 죄가 있다고. 자네가 죄송할 게 아닐세. 모두가 힘을 합해 이겨나가는 수밖에. 고개 들게. 어서.”

잘못한 것이 없어도 계속 미안함이 생겨났고, 없던 원한도 한이 서린 원한이 되어 사무쳐 버렸다.

죽이지 않으면 나 자신, 또는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전쟁이란 그런 소중한 것들을 뺏고 빼앗기는 지독하고, 악독한 것이었다.

윤영모 소령이 고개 숙인 김영호 중사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보게. 저건 뭔가?”

열차 맨 안쪽.

천으로 가려놓은 상자 몇 개가 눈에 띄었다.

대충 천 쪼가리를 덮어놓은 것이 아닌 중요한 선물인 듯, 정성스레 천에 싸여 있었다.

“저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임무를 인계받았을 때부터 천에 싸여 있어 귀한 것인 줄 알고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어서 열어보게.”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에야 먹고 힘내라며 인삼이나 한약재를 곱게 싸서 추진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열차의 종착지는 의정부.

열차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의정부 전선에 투입될 물자들이다.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뭐길래···”

상자가 좀처럼 열리지 않는 듯 김영호 중사가 끙끙대며 상자와 씨름을 이어나갔다.

“열렸습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당장 사령부에 연락하게!”

인삼이나 한약재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귀한 물건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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