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밤 새도록.
금오리 남쪽 지점 2사단 사령부.
송우리, 축석령 방어를 위해 후방에서 출발한 2사단 병력이 금오리로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부대는 2사단 5연대 2대대, 그 뒤를 이은 1대대였다.
“5연대 2대대에 이어 1대대가 곧 금오리에 도착한다는 보고입니다.”
정보참모 빈철현 중령의 보고에도, 다른 참모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참모들이 모여 하나뿐인 작전현황판을 둘러싸고 대책을 강구 하고 있었지만, 현지실정을 정확히 몰라 군수지원 말고는 제대로 된 대책은 내놓을 수도, 내놓지도 못하고 있었다.
“1대대 역시 2대대와 마찬가지로 도착 즉시 송우리를 방어하고 있는 7사단 3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투입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네만.”
짧은 침묵 뒤에 입을 가장 먼저 연 사람은 2사단 참모장 최청언 중령이었다.
송우리에 있는 3연대를 지원하라.
진짜 맞는 소리다.
제대로 처맞는 소리.
“지금쯤이면 3연대는 송우리 방어선에서 후퇴하고 있을 것입니다. 군수 참모님. 현재 1대대, 2대대 무장상태가 어떻습니까?”
벌써 10분이 지났다.
현 상황에 10분이나 들어줬으면 2사단 참모진 최소한의 자존심은 충분히 보장해줬다.
“M1과 칼빈 그리고···”
군수참모 차광전 소령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무장상태를 몰라서가 아니다.
그게 끝이었다.
1대대와 2대대 모두 M1과 칼빈.
많아야 인당 20발이 채 안 되는 탄약.
중화기나 공용화기, 심지어는 대대를 통틀어 작전지도나 무전기도 없었다.
게다가 적정과 아군에 대한 상황파악도 되지 않으니 제대로 된 지휘가 되는 것이 이상할 판국이다.
“현 상태로 출발한 대대가 적 탱크와 마주한다면, 총 몇 발 쏴보기도 전에 대응할 지휘체계가 무너질 겁니다. 그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작전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10분간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 이들의 알량한 자존심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2사단 사령부에 도착하자마자 내 의견을 내세워 피력했다면, 계급이 깡패인 이곳에서 의미 없는 반발이나 반문이 나올 수 있으니까.
경청.
대책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최대한 그들의 말 하나하나를 경청했다.
내 말에 경청하고 있는 참모진을 보니, 생각대로 들어맞은 모양이다.
“곧 의정부역에서 출발한 군수물자가 이곳에 도착할 겁니다. 탄약 휴대량을 늘리고 대대장급 지휘관들에게 임시로 만든 작전지도라도 건네줘야 합니다. 도착하는 군수물자에 무전기가 없다면, 미리 각 대대에 연락장교를 정해 혼란을 막는 것이 우선입니다.”
충분하기 위함이 아닌 최소한의 조치였다.
총으로 탱크와 싸워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눈과 귀까지 가리고 막은 채 싸울 순 없으니까.
결연한 표정으로 경청하는 참모진을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곧 보급을 마친 뒤에 2대대는 43번 도로를 기점으로 동쪽 208고지와 백석고지 남쪽을 향해 출발, 도착하는 즉시 인근에 도로변 진지와 기관총 진지를 구축할 겁니다. 포병학교 2교도 대대가 금오리 남쪽에서 43번 도로 인근에 대한 화력지원 임무를 수행키로 했습니다.”
“208고지와 백석고지 남쪽을 2대대 병력만으로 방어할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1대대는.”
좋은 질문.
2대대만으로 열이 잔뜩 받은 북한군 3사단과 105 전차 여단의 주공을 방어하기에는 당연 역부족이다.
“최선을 다해 지연전을 펼치며 후퇴하고 있는 7사단 1연대 잔여 병력이 속속 자일동 인근에 결집 후 전력을 수습하고 있습니다. 2대대는 수습을 마친 7사단 1연대와 함께 208고지와 백석 고지를 방어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1연대는 전투와 후퇴를 반복하며 분전 중이었다.
부대 전체가 절반이 넘는 큰 손실을 당했지만, 다행히 최소한의 부대편제를 유지한 채 자일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가질 않네. 이미 전투력이 많이 소실된 1연대 병력을 곧바로 방어선에 투입하는 것보다, 2대대와 1대대를 방어선에 투입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워낙에 헛소리를 많이 들어와서일까?
나름 합리적으로 말하는 최청언 중령이 아주 현명한 지휘관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내 말이 끝나기 전까진.
“1대대는 해야 할 다른 임무가 있습니다.”
“다른 임무라니?”
한두 번 적의 공세를 막아내더라도, 결국 현재 전력으로는 오랜 시간 버텨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적의 허를 찔러야 한다.
“1대대는 축석령이 아닌 회암령으로 이동. 도착 즉시 주변 고지에 매복 진지를 구축. 방심한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즉시···”
다음 말은 굳이 안 해도 알 테지.
“모든 화력을 집중해 적을 격멸합니다.”
“회암령? 회암령은 이미 적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무슨 적이 나타날 줄 알고 회암령에 병력을 분산시킨단 말인가!”
시간이 없으니까.
시간에 쫓기는 것은 국군만이 아니었다.
‘놈들도 시간에 쫓기고 있으니까.’
북한군 입장에선, 다 큰 성인 남성이 유치원생이 길을 막아 못 지나가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북한군이 예상한 사전 남침 계획에 따르면 의정부는 하루, 서울은 짧으면 이틀에서 삼 일 안에 함락해야 한다.
계획이 지연되고 있는 마당에 북한군 3.4사단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패는 축석령을 거쳐 의정부, 서울로.
혹시라도 축석령이 여의치 않다면, 회암령-양주-직동을 통해 의정부로.
“자네 말대로라면 우리가 축석령에서 적을 저지하면, 회암령으로 우회할 것이란 말 아닌가. 만약 후퇴한 적이 송우리를 거쳐 내촌, 광릉을 통해 서울로···아.”
이래서 학습은 스스로 깨닫는 게 가장 좋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은 듯했다.
마지막 선택지를 고른다면 돌아간다.
쉽사리 선택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이 모든 것이 축석령 방어에 성공한다는 가정 아래 있었지만, 한두 차례 공세를 막아낼 자신은 충분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이 열리자 하사관 한 명이 땀에 범벅이 된 채로 들어와 군수물자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의정부역에서 출발한 군수물자가 도착했습니다.”
“알겠네. 지금부턴 조금의 시간도 낭비해선 안 됩니다.”
서둘러야 한다.
지금부턴 1분, 1초도 낭비할 여유 따윈 없다.
“아! 왔구나. 왔어”
시간 딱 맞춰 천에 곱게 싸여온 녀석을 보니 감탄사를 뱉을 시간 정도는 필요한 것 같다.
아주 크고, 우람했으니까.
***
백석고지 남쪽 도로변 진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드문드문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이 아니었다면, 고요하기 그지없었을 텐데.
언제나 그렇듯 폭풍이 몰아치기 전이 가장 고요한 법.
1대대는 이미 회암령으로 출발한 후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괜찮네.”
계급이 올라갈수록,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것을 걱정하고 말리는 사람이 늘어났다.
후방에 있는 사령부 지휘소에 가만히 앉아 작전 성공 혹은 실패를 전해 듣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 전체적인 전황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때쯤이면 모를까.
나중에 아주 높은 곳에 오르게 된다면, 장난삼아 이 한마디를 던져볼 참이다.
‘나 때는 말이야.’
물론 농담이다.
정말로.
“참모님, 정찰 분대가 복귀했습니다.”
적정을 파악하고 있는 것과 파악하지 못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 그 이상이다.
정찰 분대가 생각보다 빨리 복귀한 것으로 보아 적이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와있음이 느껴졌다.
“현재 적 위치는?”
“축석령 북쪽 5KM 인근입니다. 43번 도로를 통해 적 전차 총 8대 중 선두에 4대, 그 후미를 빨갱이 3사단 놈들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몇 번 당해서 인지, 보병 없이 전차만 앞세워 전차포를 쏴대는 멍청한 전략은 집어넣은 모양이다.
“아직 적 정찰 활동은 아직 보고 된 바 없나?”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의정부와 서울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처럼, 적에게도 중요하긴 마찬가지다.
이번 공세로 의정부를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북한군 3사단장 리영호의 미래도 바람 앞 촛불 신세다.
“2교도 대대에 포격 준비 명령을 하달하게.”
적과의 거리를 봤을 때, 진작에 쏘고도 남았어야 할 가까운 거리다.
물론 고폭탄이 충분했을 때 얘기지만.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전투에서 총알 한 발, 고폭탄 한 발이 소중했다.
-쾅!
먼저 전투의 시작을 알린 것은, T-34 전차 85mm 주포에서 시작된 포성이었다.
연이어 축석령과 43번 도로 인근에 포탄이 떨어지며 적막을 찢었다.
-쾅!
시간이 분, 초 단위로 흘러갈수록 포성이 커지고 있었다.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 모래와 먼지, 파편이 공중으로 솟구친 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첫 포탄이 떨어질 때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진지와 가까운 곳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2교도 대대에 사격명령 하달하게!”
“예.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무전병이 즉시 2교도 대대에 사격명령을 하달했다.
포탄에 이어 전차에서 기관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주 위아래로 지랄이다.
‘조금만 더.’
적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포탄과 총알을 쏟아내며 요란스럽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는 북한군과 달리,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2대대와 1연대 진지에선 조용히 내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잘 부탁한다.’
바닥에 내려놓았던 길고 우람한 쇳덩이를 양손으로 잡은 뒤, 어깨에 올렸다.
어깨에 올리자 어느 정도의 무게감이 어깨를 눌렀다.
[길이 152.4cm 구경 88.9mm(3.5인치) 무게 6.5kg]
이름도 무시무시한 M20 슈퍼바주카.
누가 보내왔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이 인정사정없이 크고 우람한 녀석을 T-34에 박아넣을 것이다.
아주 깊숙하게.
나를 포함한 4명이 진지 양쪽에서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쾅! 쾅! 쾅!
3발의 포탄이 정확하게 북한군 머리 위에 떨어졌다.
사격명령을 받은 2교도 대대가 쏜 105mm 포탄이었다.
‘아직이야?’
[현재 적과의 거리 890m, 887m, 882···]
“사격 개시!”
사격 개시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손에 쥔 방아쇠를 힘껏 눌렀다.
적당히 제어된 반동이 버틸만하게 느껴졌다.
측면이나 후면을 노릴 필요도, 궤도를 조준할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정면에.
중요한 건 그저 맞추는 것뿐이었다.
105mm 영거리 사격으로 전차 궤도를 맞춰왔던 나에겐,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명중!]
M20 슈퍼바주카에서 날아간 성형작약탄이 정확히 포탑과 몸체를 이어주는 이음새 사이에 맞았는지, T-34 포탑과 몸체를 분리하듯 토막 냈다.
다른 진지에서 쏜 철갑탄도 마찬가지였다.
“전원 사격 개시!”
이제 할 일은 분리된 포탑을 보며 경악하는 빨갱이 놈들에게 총알 세례를 퍼부어 주는 것이었다.
이 밤이 다 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