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축석령 전투
T-34 4대의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며 시작된 전투는 어느덧 자정을 넘어 27일 새벽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투는 말 그대로 밤새도록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시작은 있었지만, 끝은 영원히 없다는 듯이.
치열하다? 고군분투?
무슨 말을 떠올려도 지금 상황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다.
양쪽에서 쏘아대는 총알과 포탄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휭.
‘제기랄.’
총알과 포탄 파편들이 공기를 찢으며 내는 바람 소리는 그야말로 소름 그 자체였다.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비명, 고통을 참기 위해 몸부림치는 신음으로 주변이 온통 가득 찼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정신을 제대로 유지하기조차 쉽지 않았지만, 인간이란 참 신비로운 존재다.
계속되는 전투에 비명과 공포, 그마저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계속 쏴라! 2시 방향에 적 기관총! 내가 맡는다.”
적을 조준할 수 있을 정도로만 살짝 눈을 내밀고 있었던 도로변 진지에서 수류탄 안전장치를 모두 제거한 뒤 몸을 일으켰다.
미친 듯이 불을 뿜어대는 적 기관총과의 거리는 대략 100M 정도.
가깝고도 먼 거리였다.
아니, 사실 수류탄을 던지기엔 지나치게 먼 거리가 맞았다.
프로야구 선수가 아닌 이상, 성인 남성이 정확한 자세를 잡고 온 힘을 다해 투척해도 가까이 던지기 어려운 먼 거리.
게다가 사정없이 날아다니는 총알은, 나라고 봐주지 않는다.
인정사정을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법이 없었다.
총알과 포탄이 사정없이 스쳐 지나가는 상황에서는 머리를 드는 것조차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상반신을 진지 밖으로 내밀자 총알이 스치는 소리가 몇 배로 들려왔다.
‘제기랄. 아주 엄청나게 퍼부어 대는군.’
-흡.
허리, 어깨, 팔꿈치, 손목을 거쳐 자연스레 힘을 모아 수류탄을 던졌다.
아마 나노봇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절반은커녕 얼마 가지 못한 채 떨어졌을 것이다.
5.4.3.2.1
-펑!
수류탄을 던지고 5초 정도가 지났을까?
2시 방향에 있던 기관총에선 더는 불꽃이 뿜어지지 않았다.
전차포와 곡사포, 박격포가 터지며 내는 소리에 비하면 수류탄 터지는 소리는 자장가에 가까웠다.
“쏴라! 물러설 곳은 없다.”
목이 쉬는지도 모를 정도로 병력을 지휘하며, 적을 향해 닥치는 대로 쏘고 또 쐈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이곳 축석령을 방어해내기 위해서.
“쏴!”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바랄 수 있는 건, 웃긴 소리지만 우리가 쏴대는 총알과 포탄이 적에게 자비가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전투가 시작하기 전엔, 어떤 거창한 작전이나 전략이 중요했을지 몰라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금은 서로에게 총알 한 방을 더 쏘는 게 중요했다.
“참모님! 탄약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상자가 많아 곧 있으면 208고지가 적에게 넘어갈 겁니다. 지금이라도 후퇴명령을···”
“숙여!”
-쾅!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포탄이 떨어졌다.
축석령에서 방어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버텨내고 있었지만, 점차 아군 피해가 늘어나는 것까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물론 도로와 고지 아래엔 국군의 몇 배나 되는 북한군 시체가 담을 쌓기 위해 있는 듯 쌓여 나갔지만, 워낙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는 시체로 만들어진 담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16연대는 아직인가?”
분명 올 때가 됐는데.
조금은 늦더라도, 너무 늦으면 안 된다.
고지를 탈환 당한 상태에서 16연대가 도착한다면, 오히려 16연대는 각개 격파를 당하러 들어온 꼴이 될 테니까.
“현재 16연대는 흡···.”
몇 초전까지 내 옆에서 16연대의 위치를 말하려던 무전병 철모에 총알이 박히며 목이 힘없이 꺾였다.
목이 꺾인 무전병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말 한마디를 내뱉는 그 짧은 시간에 삶이 죽음으로 바뀐 것이다.
-16연대다! 16연대! 드디어 지원이 왔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함성이 전장에 퍼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충북에서 올라온 16연대 1대대, 2대대가 보였다.
아군을 돕기 위해 전력을 다해 고지로 향해오고 있었다.
이 새끼들.
기다렸잖아.
-쾅! 쾅! 쾅!
포탄이 다 떨어져 잠잠했던 아군의 포격이 다시금 북한군 머리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겨우 2개 대대 정도의 병력과 화력으로 적 3사단과 전차 여단을 막아내고 있었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기적에 적은 2개 대대가 목숨 바쳐 방어하는 축석령을 쉽사리 뚫어내진 못하고 있던 찰나.
거기에 방금 막 나온 음식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16연대 1대대, 2대대의 지원은 그런 적의 전의를 꺾어버리기 충분했다.
“동무들 퇴각 하라우! 날래 퇴각하라!”
208고지와 백석 고지에 있는 병력이 본대라고 생각한 북한군 입장에서는, 증원된 연대 규모의 국군을 보자 전의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 하라우!”
북한군 3사단에 퇴각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전투의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고 있었다.
다시금 왔던 길로 방향을 돌리는 T-34 전차.
북한군 보병이 뒷걸음질 치며 간간이 쏴대는 총알이 듬성듬성 날아들 뿐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조금 더 지체됐었다간 큰일 날 뻔했어.”
물러나는 북한군을 보며 16연대 1대대장 유의준 중령이 건넨 인사말이었다.
“아닙니다. 중요한 순간에 와주신 덕에 적의 공세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어디서 지체되었는진 모르겠지만 16연대가 내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건 사실이었다.
역시 군에선 계급이 깡패긴 깡패인 걸까?
내뱉고 싶은 말 대신 ‘와주신 덕’이라는 맘에 없던 말이 튀어나오는 걸 보니, 이것 또한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인 모양이다.
‘싸던 똥도 끊고 달려왔어야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내 옆에 있던 무전병이, 고지에 있던 국군의 숨이 하나라도 더 붙어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에 드는 생각이었다.
중과부적인 적과 싸워 이겼다는 환희보다 앞서는 건, 내 옆에서 스러져간 전우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우리 16연대가 인근 잔당을 소탕하겠네. 자네는 기존 병력과 이곳 수습에 힘 써주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죽은 자들을 대신해 산 자들이 해야 할 몫이 남았다.
어차피 송우리에서 작당 모의를 마친 쥐새끼들은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게 되어 있으니까.
***
승리.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하고도 압도적인 승리였다.
압도적인 힘으로 누른 승리가 아닌, 마치 성경 속 다윗과 골리앗이 싸워 다윗이 이긴 것 같은.
승리였음에도 환호성을 내지르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승리를 만끽할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군번표나 계급장을 수습한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어 수습이 불가한 경우, 아군이었길 바라며 진지에 묻는다. 서두르도록!”
죽은 자들을 수습하는 것은 산 사람들의 몫이었다.
언제 적의 반격이 이어질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 탓에, 애석하지만 제대로 된 무덤을 만들어 묻어줄 여유는 없었다.
머리에 총을 맞고 그대로 목이 꺾인 채 죽은 무전병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전후 처리를 지켜보다 보니, 몸과 머리가 붙어 신원이 확인될 수 있는 건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에 맞아 온몸이 조각 조각난 시신에 비하면.
조각난 시신이 말해주는 건, 얼마 전까진 살아 숨 쉬던 사람이었다는 것.
전쟁이 이토록 잔인하고 무자비하다는 것뿐이었다.
‘후···’
“작전 참모님. 송우리 방향으로 후퇴한 적이 회암령으로 우회해 아군 측면을 돌파하려 했지만, 매복해있던 1대대에 큰 피해를 보고 후퇴했다고 합니다. 대승입니다! 대승!”
대승이라며 들뜬 마음으로 보고하는 하사관을 나무랄 수도.
작전이 성공했음에 기뻐하기에도 묘하고도 기이한 상황에 직면했다.
“수고했네.”
중과부적인 적과 축석령 방어 전투에 승리를 쟁취한 지금.
축석령 전투를 보고받고 다윗과 골리앗을 떠올리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
맥아더가 다른 지휘관과 가장 다른 점을 굳이 꼽으라면, 최전방에 나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축석령 전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참모진을 대동한 채 2사단 금오리 지휘소를 찾았다.
“다친 곳은 없는가?”
나를 찾은 맥아더가 내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자네 편지를 보고, 선물을 잊지 않고 챙겨오길 천만다행일세.”
“오늘의 승리는 하늘의 뜻이기 전에, 운명의 열쇠이신 사령관님께 축복이 내렸기 때문에 가능한 승리였습니다.”
맥아더는 전쟁터에서도 한 번도 성경을 읽지 않고는 잠을 잔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를 구워삶기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 승리의 전공을 하늘 높은 곳에.
그곳에 보내는 것이었다.
어딘진 모르겠지만.
“사령관님께서 제 편지를 무시하셨다면, M20 바주카를 보내주시지 않으셨다면, 이미 의정부, 그리고 서울은 함락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 덕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을 살렸을지··· 차마 가늠할 길이 없습니다.”
맥아더 사령관의 표정이 내 말 한마디, 단어 하나하나에 변하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한 가지 확실한 건, 맥아더가 여자였다면 이미 나에게 반했을 것이다.
어쩌면 만나달라며 졸졸 따라다녔을지도?
“이 좁은 땅에 자네같이 훌륭한 군인이 있을진 몰랐네. 이강산 대위. 아, 이젠 소령인가?”
“과찬이십니다. 모든 것은 하늘이 점지한 대로 이루어짐 아니겠습니까.”
한국산 잔다르크.
물론 중간중간 생길 마녀사냥은 조심해야겠다만, 신앙심이 뛰어난 맥아더 사령관에게 딱 어필하기 좋은 모델이었다.
맥아더의 신임을 얻는다면, 이 전쟁을 훨씬 수월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
“오. 자네가 신앙심이 이리도 뛰어난지 몰랐네만.”
맥아더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타지에서 운명을 함께할 동반자를 만났다는 저 표정은, 직접 보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할 정도였다.
“사령관님. 축석령에서의 승리는 어쩌면 이번 전쟁에서 필연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한 치의 어긋남 없이 필요한 모든 것들이 제때 맞아 떨어졌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그저··· 자네의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네. 소령.”
맞는 말이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내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내 편지를 받은 맥아더가, M20 슈퍼바주카가 축석령에 있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지금, 작은 전투에 승리한 기쁨을 얼마나 더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입니다. 사령관님.”
대화의 주도권이 온전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대화를 이끄는 건, 맥아더가 아닌 나였다.
“말해보게.”
형. 내 말 잘 들어봐.
인천상륙작전 같은 거 할 필요 없다니까?
쉽게 가면 서로 좋잖아?
“제 생각엔 말입니다···”
대화의 주도권은 계속, 말할수록 점점 나에게 기울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