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비
사람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말이 조국의 운명을 뒤바꿀지 모르는 말이라면 더욱이.
전시 상황에 요충지, 최전방에 있는 장성급 지휘관을 교체하는 것은 매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일이다.
그 중요한 열쇠가 내 손에 쥐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맥아더가 지휘소를 출발한 뒤, 인사 발령이 떨어지기까지 채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네가 작전 참모인가?”
유재흥을 대신할 의정부 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추천한 인물은 김석원이었다.
카이젤 콧수염, 총이 아닌 일본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가 내게 처음으로 건넨 말은 ‘자네가 주임원사인가?’ 뺨칠 자네가 작전 참모인가? 라는 말이었다.
누가 불러줘서 이 자리에 있는진 알기나 할까?
“예. 이강산 소령입니다.”
“이곳으로 오면서 도로변 진지에 들어가 직접 싸우는 정신 나간 참모가 있다고 들었네만. 자네로군. 전투는 그렇게 해야지. 암. 잘 부탁하네. 혹시 도는 좀 휘둘러 봤는가?”
김석원이 손을 대신 도를 꺼내려는 듯 칼자루를 잡았다.
워.
다시 넣어둬.
“도는 잡아본 적이···”
“농일세.”
카이젤 콧수염과 항시 지니고 다니는 일본도가 말해주듯, 김석원의 장점은 쇼맨쉽과 적진에 돌격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카리스마였다.
지휘관으로서 무장의 덕목을 보임과 동시에 지형지물을 활용하거나 작전계획을 세심하게 짜는 지장의 덕목 또한 어느 정도 갖췄고.
단점은 생애 중 가장 큰 불명예라 반성하긴 했다만, 일본군 출신 친일파였다는 점.
나이가 많고 일본군에 있을 때의 경험 때문인지 입체적인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 부족하다고나 할까?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려드는 적을 막아야 하는 의정부 현시점에선, 최전방에서 일본도를 내빼 들고 병력의 사기를 고무시키기엔 이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가 가진 장점이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테니까.
그 독하다는 맥아더의 마음도 혀로 솜사탕 녹이듯 녹여버린 내가 가끔 삐져나오려는 저 콧수염을 잘 다듬어 줄 자신이 충분했다.
“현재 아군 방어선과 적정 동향은 어떠한가?”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대답해주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축석령-의정부 방어선 눈앞에 직면한 현 상황을 긍정적으로 말할만한 부분은 안타깝게도 딱히 없었다.
“어제 있었던 적의 공세를 막아냄과 동시에 전차가 건널 수 있는 교량과 다리를 파괴했지만, 겨우 시간을 조금 벌었을 뿐입니다. 빠르면, 오늘 저녁. 늦어도 내일 적의 총공세가 예상되는 바입니다.”
축석령은 말 그대로 오늘내일.
뚜껑이 열릴 대로 열린 적 3사단의 총공세를 막느냐, 막지 못하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전황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어제 전투로 적에게 큰 피해를 주긴 했으나, 아군 역시 만만치 않은 피해를 받았다.
가장 뼈아픈 부분은 소부대를 지휘할 소대장, 중대장급 지휘관이 꽤 많이 전사했다는 것.
부대원들의 사기를 고취하고자 최전방에서 전투를 이어나간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의 그런 솔선수범과 용맹함이 없었다면 막아내지도 못했겠지만.’
부대 편제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휘관의 공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전투 후 남아있는 병력과 부대를 통폐합하고 지휘할 장교가 없다면 하사관이, 하사관 마저 없다면 가장 선임병에게 지휘 권한을 넘겨주었다.
“오늘내일이라··· 아주, 끈적하고도 화끈한 전투가 되겠군. 내 직접 빨갱이 놈들에게 전투가 뭔지 보여주지.”
스-컹
김석원 사령관이 꺼낸 일본도가 은은한 빛을 반사했다.
그가 어디서 지휘를 하던 말릴 필요는 없다.
말려지지 않을뿐더러 어차피 고지로 달려나가 ‘나를 죽일 총탄을 적은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라는 끈적끈적한 명언이나 질러댈 테니까.
사실 보는 사람에 따라 허세로 보일지 모를, 광기 가득한 김석원 그만이 보여주는 멋과 카리스마.
분명 한 끗 차이로 생사가 갈리는 순간에 그런 모습은 빛을 발할 것이다.
아니? 반드시 발해야만 한다.
미군들이 본다면 선글라스라도 껴가며 ‘못 본 눈 삽니다’를 외쳐댈 것 같긴 하다만.
맥아더와 교회 부흥회 뺨치는 친목으로 의정부 지구 전투사령관을 바꿔놓긴 했지만, 축석령을 지켜내더라도 갈 길은 여전히 십만 리였다.
김석원 사령관이 미군과 불화를 일으키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는 어린아이 달랠 사탕을 미리 준비해서라도.
아, 맞아.
엄마의 마음으로 미리미리 달래둬야 할 사람이 더 남았다.
바뀐 지휘관은 김석원만이 아니었다.
[육군 총참모장에 김홍일을 임명한다.]
전시에 육군 총참모장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순 없는 노릇이다.
김홍일 장군.
내 치맛바람에 나라를 구한 구국 영웅이라 불린 김홍일 장군이 육군 총참모장에 임명됐다.
매우 훌륭한 군인이지만, 인간인 이상 아쉬움이 남기 마련.
김석원과 김홍일의 아쉬운 점을 내가 메꿔줄 것이다.
“사령관님, 적이 임시부교 개설을 마치고 공세를 감행할 준비를 끝냈다는 정찰 보고입니다.”
5연대 1대대장이 지휘소 막사로 들어오며 보고했다.
벌어진 틈 없이 앙다물어진 그의 입에서 결연한 의지가 흘러나왔다.
“방어선 전 병력, 전투준비 명령 하달하게.”
이제는 이판사판이다.
가스라이팅은 계획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전선으로 가야 했다.
***
28일 새벽.
김석원 사령관은 역시 예상대로 지휘소가 아닌 고지에 올라 있었다.
언제 적 포탄이 낙하할지 모름에도, 진지 밖에서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일본도를 빼 든 채로.
“모두 들어라!”
아무래도 거창하게 열변을 토해내려나 보다.
“그대들은 오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이곳에서 싸워야 한다. 후퇴하고 싶을 때면, 우리의 형제자매. 노쇠한 부모님들이 겪을 고통을 생각하고 돌아서라.”
적막과 고요가 고지를 감쌌다.
모두가 입을 꽉 다물었다.
숨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모두가 각자의 소중한 것을 떠올리고 있을 테니까.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이곳엔 충분히 깔아놓은 지뢰도, 적의 옷을 붙잡아 뜯을 충분한 철조망도 없다.”
고지 아래쪽엔 통나무, 다 쓰고 버린 기름통, 큰 바위나 상자, 심지어는 부피가 큰 쓰레기까지 장애물로 곳곳에 쌓여 있었다.
적의 공세를 조금이라도, 아주 찰나의 시선이라도 뺏을 수 있다면, 어떤 물건도 장애물로 활용하라는 내 명령에 따라서였다.
“대한의 아들들이여, 이 위기와 싸워 난국을 타개하고 북으로 가자. 내가 가장 선두에서 너희과 함께 싸울 테니.”
김석원 사령관이 도를 힘껏 들어 올리자, 고지 사방에서 만세 소리가 메아리쳤다.
-만세! 대한민국 만세!
즉흥적인 열변이었지만, 장병들의 전의를 고무시키기엔 더할 나위 없이 충분했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의정부 지구 전투사령관으로서 할 역할의 절반은 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은 아직인가?”
자세를 낮춘 뒤 다가온 정찰소대장에게 물었다.
“부표를 통해 건너온 탱크 뒤로 포 방열까지 모두 마친 상태입니다. 빨갱이 놈들이··· 마치 개미 떼 마냥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많았습니다. 참모님.”
“알겠네. 자네도 이제 진지로 들어가게.”
북한군 3사단이 임시부교를 통해 넘어와 공세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우리가 이곳을 방어해내고 싶듯, 적 역시 모든 화력과 병력을 투입해 이곳을 공격할 터.
왜인지 모를 찜찜한 느낌에 기분이 더러웠다.
“사령관님, 뭔가 이상합니다. 놈들은 이곳을 지나기 위해 많은 희생과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공격 준비를 마쳤다면, 주저 없이 공격을 감행했어야 합니다.”
왜지?
놈들이 뭔가 기다리고 있다는 찝찝한 낌새를 지울 수 없었다.
적이 포 방열을 마쳤다면, 진작에 포라도 쐈어야 한다.
고지를 평탄화시킬 듯이.
“놈들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틀려주길 바라는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없다.
지금처럼.
‘이런 제기랄.’
청력을 최대한 집중하자, 처음엔 파리 날갯짓 정도로 작고 미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작던 소리는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커져 왔다.
“모두 진지 안으로! 최대한 깊이 몸을 숨겨라!”
온 힘과 목청을 쥐어짜 소리쳤다.
육중한 몸체를 하늘에 띄우기 위해 거세게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
T-34 전차도 모자라 소련제 YAK-9 전투기까지.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염병할.
눈에 보일 정도로 두 대의 북한군 YAK-9 전투기가 가까워지자, 20mm 기관포와 12.7mm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눈을 가리고 들었다면, 비나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로 착각할 법했다.
총알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다들 숙여!”
소나기가 쏟아지는 순간에도 해가 점점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총알 비가 잠잠해지자,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북한군이 쏜 야포가 고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옥에서 비와 천둥이 내리면 이것과 비슷할까?
하늘에서 쏘아댄 기관포와 땅에서 쏜 포탄이 장애물을 비웃기라도 하듯 초토화시켰다.
개미 떼 마냥 몰려오는 적 3사단과 아군이 점령한 고지 사이에 남은 건, 아직은 차가운 새벽바람뿐이었다.
“참모님! 남은 병력이라도 살려 후퇴해야 합니다!”
근처 진지에 있던 2대대장이 직접 포탄 세례를 뚫고 달려와 말했다.
3일.
압도적 전력 차이 속에 3일을 버틴 것만으로도 이미 말도 안 되는 훌륭한 업적이었다.
T-34도 T-34지만, 현재로선 하늘에 떠 있는 YAK-9 전투기를 상대할 대안은 아무것도 없었다.
“1사단과 6사단에 당장 상황을 전파하게. 우리가 후퇴하면 그들의 측면이 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잠시 기다리게.”
“예. 알겠습니다.”
후퇴하더라도, 무작정 뒤를 돌아 뛰어가라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마지막 남은 부대가 후퇴할 때까지 우선 후퇴할 부대와 엄호해 줄 부대를 정해 편제를 유지하게 해야 더 많은 병력을 살릴 수 있으니까.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십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들며 이곳을 비추려던 건, 해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항공 지원이다! 지원이 왔다! 모두 최대한 포격에 대비하라!”
일본 이타즈케 미 공군 기지에서 출격한 F-51 머스탱 전투기.
F-51 머스탱 5기가 편대를 이뤄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금속 프로펠러가 마치 장인이 빚은 예술품으로 보였다.
“해냈다.”
F-51 머스탱과 교전한 YAK-9 전투기 2기 중 한 기는 이미 날개에서 검은 연기를 뿜으며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달아났다.
‘싹 쓸어버려.’
F-51이 하늘에서 쏟아낸 비가 개미 떼 위에 정확히 떨어졌다.
그간 묵은 체증이 싹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잠깐의 소나기를 내린 YAK-9 전투기는 달리, F-51 머스탱이 개미 떼를 향해 내리는 비는 멈출 줄 몰랐다.
한여름 장마철 내리는 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