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변화(1)
축석령 고지 북한군 후방 2KM 지점.
피할 곳 없이, 우산도 없이 굵은 장대비를 만난 개미 떼는, 비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와해 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와해당한 것에 가까웠다.
“후퇴하지 말라! 이 빌어먹을 새끼들, 돌격! 당장 고지로 돌격 하라우!”
고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투를 바라보던 북한군 3사단장 리영호 소장의 목청이 터져 나갔다.
허리춤에서 소련제 모제르 권총을 뽑아, 후퇴하고 있는 인민군을 향해 발사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후퇴명령 없이 후퇴하지 말라! 다 귀가 처먹은 것이야 뭐야!”
-탕! 탕! 탕!
간신히 비를 피해 후퇴한 인민군 중 몇몇은 그가 쏜 권총에 맞고 쓰러졌다.
후퇴하는 아군까지 쏴가며 돌격을 명령했지만, 재수 없이 그가 쏜 권총을 맞은 몇몇 말고는 후퇴를 멈추지 않았다.
하늘에서 연신 떨어지는 장대비가 그의 명령을 가볍게 조롱하듯 묻어버렸으니까.
“리영호 사단장 동지, 후퇴해야 합네다. 이대로는 고지를 점령한들 인민 병사들이 남아나질 않을 것 입네다. 동지! 어서 명령해 주시라요!”
그의 권총 안에 장전되어 있던 총알이 모두 쏘여지고 나서야, 옆에서 자신을 말리는 부관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래 이 리영호 꼴이 말이 아니고만 기래. 인민군 최정예 부대 3사단이 저깟 고개 하나 넘지 못하다니···”
“동지! 이곳에 계시면 동지의 안위도 위험합네다. 날래···”
미제 무스탕 전투기가 어떻게 벌써 남조선에 도착했는지, 대체 이깟 작은 고개가 뭐라고 이틀이나 넘지 못했는지 수많은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 나갔다.
“남조선 지휘관이 누군지 알아오라. 내래 이 리영호 이름을 걸고, 반드시 잡아 사지를 도륙 내주고야 말갔서.”
“동지! 미제 전투기가 다가옵네다. 피하셔야 합네다!”
F-51 전투기가 땅이 젖지 않은 곳을 찾았다는 듯 다가오고 있었다.
“전군, 후퇴 후 집결지에 집결하라.”
마침내 리영호 사단장 입에서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집결지에 집결하라는 말과 함께.
“집결지라는 것이···”
부관이 하려던 말과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지금 말을 내뱉었다간, 머리통이 몸에 붙어있기 힘들어 보였으니까.
애초 3사단 역시 인민군 선봉 부대로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하루에 꼬박꼬박 10km씩 남진할 계획이었다.
축석령에서 후퇴했을 때 집결할 장소를 미처 정해놓지 않았다.
작전 계획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만, 축석령에서 후퇴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긴 마찬가지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진.
완벽한 3각 편제를 갖춰 남하했던 북한군 3사단 병력 중, 송우리 인근에 집결한 병력은 2개 연대에도 한참 미치질 못했다.
***
축석령 방어 고지.
“미국놈들 말이야. 하늘에서 오줌발 한번 시원하게 갈기는군. 안 그런가? 빨갱이 놈들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네.”
좀 전까지 생사의 갈림길에서 열변을 토하던 사람이 내뱉은 말치고는 뭐랄까.
이상하다?
독특하다?
무스탕 전투기가 쏜 기관총을 오줌발에 비유하는 사람을 굳이 표현하자면.
음··· 평범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항공 지원이 올 때까지 최선의 지연전을 펼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적 3사단 편제가 무너져 수습하는데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곧 다시 공격해 올 겁니다.”
“거참. 사람 딱딱하기는, 알겠네. 우선 주변이나 수습한 뒤에, 이후 작전 계획을 논의해 봄세.”
원래였다면 항공 지원을 받으려면 일주일은 더 기다려야 했다.
남침을 인지함과 동시에 미국에 전투기 원조를 요청하고, 일본에 공군 조종사를 보내 전투기를 인수한 후 다시 돌아오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오늘 거센 총알 비를 뿌려댄 F-51 편대를 조종하는 조종사들은 맥아더의 즉각 출격명령을 받은 주일미군 조종사들이었다.
“차후 항공 지원을 받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 전까지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전황부터 파악하겠습니다.”
지금의 항공 지원은 에너지를 모은 뒤 쓸 수 있는 필살기에 가까웠다.
전투기를 연이어 출격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숙련된 정비사와 기술자들이 필요했다.
물론, 현재 국군에 그런 정비 기술을 가진 정비사는 없었다.
“어서 가보게. 나는 이곳에서 수고했다고 이놈들 엉덩이나 토닥여 줄 테니.”
나이가 많아서일까?
단어선택 하나하나는 정상이 맞나 싶지만, 병력을 휘어잡는 데는 확실한 일가견이 있었다.
무스탕 전투기가 때맞춰 오지 못했더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김석원 사령관은 도망가는 적을 보며 추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적에게 큰 피해를 줬음에도 여전히 병력과 화력의 열세는 여전했고, 모든 병력이 고지 방어를 위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상태.
부대 상황을 파악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으나 제대로 된 추격은 불가능함을 인지한 것이다.
‘괴짜 같은 면이 있지만, 훌륭했어.’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령부 지휘부로 돌아가며 계속 생각했다.
다른 전선에서도 지휘관들이 훌륭하게 버티고 있기를.
***
의정부 지구 전투 사령부 지휘소.
“현재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상황은?”
“예. 참모님.”
몸에 주렁주렁 찬 장구류를 벗기도 전에 전황을 묻자,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작전 장교가 망설임 없이 곧바로 지도를 펼쳤다.
“현재 서부전선 아군 1사단이 임진강 이남으로 후퇴해 문산-봉일천-서울 축선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좋다고는 할 수 없으나, 김홍일 참모장님의 지시로 후방 사단 병력을 한강 방어선으로 집중, 임진강과 한강 일대 사령부를 설치해 강을 낀 채 적을 방어해내고 있습니다.”
서부전선은 일찌감치 임진강 이남으로 철수해 방어선을 축소 시켜 가진 병력으로 최대한 효율적인 방어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다.
군단급 대규모 병력 지휘경험과 부대 편제의 일가견이 있는 김홍일 참모장 역시 본인이 해야 할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나갔다.
“계속하게.”
“동부전선은 춘천 일대 방어선에서 적과 대치, 비교적 동부전선, 중서부 전선보다는 나은 상황이라 판단됩니다. 동부전선을 담당하는 북한군 고위 지휘관이 교체되고 있다는 첩보도 들어와 있습니다.”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국군 6사단은 동부전선에서 적을 비교적 가장 수월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물론 축석령을 나 혼자 지켜낸 것이 아니듯, 6사단 역시 인력 부족을 공장 여직공들과 학생,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총력전을 펼친 결과였다.
“완벽하진 않지만, 일시적인 고착 방어선 구축엔 성공했군.”
1사단, 6사단 역시 발군이었지만, 가장 막기 어려우면서도 적의 주공이 집중된 중서부 전선에서의 승전보가 일시적이나마 적을 고착시키는데 가장 주요했다.
다만, 후속적인 지원이 제때 도착하지 못한다면 어느 한 곳이 무너지는 순간 전 방어선이 바다에 쌓은 모래성 꼴이 되는 것 또한 시간문제였다.
“자네가 무사한 걸 보니, 다행히도 우리 미 공군이 너무 늦진 않았나 보군.”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쯤 되면 한국에 와 전선시찰을 핑계로 나를 시찰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사령관님 덕분에 전투가 아니라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았습니다. 해가 떠오르며 무스탕 전투기가 나타날 땐 마치··· 하늘에서 은총이 내려오는 것으로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모든 전선에서 한국군이 잘 싸워주고 있더군. 여러 전쟁을 겪었지만, 이런 저력이 있는 나라는 없었네. 다만···”
오. 제발.
그런 표정은 짓지 않았으면 좋겠어.
맥아더의 크고 푸른 눈동자가 침울함에 잠식되고 있었다.
뭔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게 됐다는 표정.
당연, 그리 보고 싶은 표정은 아니었다.
“워싱턴과 국무부에서 지상군 파병 규모를 늘려야 한다는 내 제안을 거절했네. 딱 잘라 거절한 건 아니지만, 한국군만으로도 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마당에 사단이나 군단급 투입은 과하다는 의견이겠지.”
“아···”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며 우월감에 젖어있는 미군 수뇌부와, 확산을 바라지 않는 트루먼 행정부의 합작품일 터.
본래 외교라는 것이 각 나라의 이해관계가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 꼬인 실타래라지만 내 입장에선 엿 같은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이 키워드를 꺼낼 때가 왔군.’
내가 굳이 요청하기 전에도 맥아더 가슴속엔 북진과 확전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본성을 슬금슬금 자극해 적절한 정도로 끌어내는 동시에 폭주하는 일은 막아야 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난이도로 따지자면 사자나 호랑이를 애완용으로 기르는 정도랄까?
어렵다고 해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금 이 나라에 피바다가 흐르며 분단되는 고통을 겪을 꼴은 볼 수 없었으니까.
“사령관님. 사실 한국군이 전선을 유지하는 건 기적에 가깝습니다. 그 누구보다 사령관님께서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알고 있네. 나 역시 단번에 군단급 지상군을 상륙시켜 이 나라를···”
쉿.
착하지?
시기적절하게 그의 말을 끊어냈다.
내가 하는 말로 인해 그 스스로가 발작 버튼을 눌러선 안 되니까.
고작 소령이 미군 사령관의 말을 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맥아더는 나를 일개 소령으로 보고 있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는 3일 내내 전투와 지휘를 반복하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오늘도 삶을 주심에 감사하며, 왜 기적 같은 삶을 주셨을까. 혹시···”
가장 중요한 말을 하기 전, 맥아더의 표정부터 살폈다.
충분히 내가 하는 말에 몰입하고 있는가.
그 말을 듣고 맥아더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할 준비가 되었는가.
“혹시?”
됐다.
이 정도면.
“이 나라가 악랄하고 이기적인 공산주의자들로 인한 시련에서 벗어나 작게는 한반도, 크게는 세계의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라는 임무를 주셨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나도 이 나라 땅을 밟는 순간, 아니 자네를 보고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지. 이번에도 필시 나를 운명의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이번에도 역시 맥아더를 구슬리는 것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남은 문제는 어떻게 트루먼과 미 국무부의 생각을 바꾸는 것인가였다.
“물론입니다. 사령관님.”
“그리고 곧 훈장 수여식이 있을 것이네. 물론 그 안엔 자네도 포함되어 있고. 이제 소령이라고 부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군.”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그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연기가 섞인 감사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였다.
진급. 특진.
물론 좋다.
그보다 더 좋은 건.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 생각이네.’
트루먼과 애치슨의 생각을 바꿔줄 아주 기막힌 계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사람이 한 명 필요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