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변화(2)
6월 29일 오전 서울.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는 치욕을 맛봐야 했던 과거와는 달리, 6월 29일 서울은 비교적 평온 했다.
“상상만 했던 편지의 주인공을 드디어 뵙는군요. 영광입니다. UP 통신 잭 제임스 기자입니다.”
“이강산 입니다.”
가장 먼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난 사람은 일전에 편지를 건네줬던 잭 제임스 기자였다.
인사를 주고받기가 무섭게 그는 궁금한 게 아주 많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겨주신 편지 덕에 AP 통신보다 훨씬 빠르게 전쟁 소식을 전 세계에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인터뷰를 위해 한번 꼭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볼 수 있을 줄은 몰랐군요. ”
그냥 빠른 정도가 아니었다.
UP 통신의 한국전쟁 보도는 경쟁사 AP 통신보다 최소 3시간은 빨랐고, 심지어는 이승만 대통령과 미 국무부, 백악관이 보고받은 시간보다도 빨랐으니까.
“궁금한 게 많으시겠지만, 시간관계상 많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는 점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핑계가 아니었다.
그를 만나자고 자리를 비워둔 채 서울에 올 순 없었으니까.
잭 제임스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중요한 약속 전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별말씀을. 최전방에서 열세의 한국군이 기적과도 같은 저력으로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막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쩐 일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미국 내 확성기가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많은 종군기자가 속속 대한민국에 발을 들이고 있었지만, 이만한 확성기는 글쎄?
이만한 확성기가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잭 제임스 기자와 UP 통신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한국전쟁 보도를 냈다.
그 빠른 속도와 정확함은 전 세계 사람들 무의식 속에 신뢰의 씨앗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고, 그 씨앗을 싹틔우려는 것뿐이다.
“딱히 일이 있다기보단, 기자님께서 신속, 정확한 보도를 내주신 덕에 대한민국을 향한 전 세계의 발 빠른 대응이 이어지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소련과 중국, 북한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야욕을 막아내고 있는 이 나라 전체를 대신해서요.”
아무도 잭 제임스 기자에게 감사를 전해 달라 부탁한 사람은 없었다.
난 그저 확성기의 사상검증을 위해 미끼를 던졌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영어를 참 유창하게 구사하시네요. 역시. 그보다 이 작은 나라에서 북한뿐 아니라 공산주의 국가들의 야욕을 막아내고 있다는 표현··· 참 멋지면서도 마음에 전율이 이네요. 나라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라··· 여기, 소름 돋은 것 좀 보세요.”
잭 제임스 기자가 자신의 팔을 들어 반쯤 서 있는 솜털을 쓰다듬었다.
작은 나라라는 표현이 조금 거슬리긴 했다만, 이 정도면 사상검증 완료.
미끼를 문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쪼록 지금처럼 객관적이고 신속, 정확한 기사를 많이 보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 아쉬울 따름이네요. 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전장에서 살아있다면.”
“가는 곳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마친 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돌아섰다.
정말 시간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미 잡은 물고기에게 밥을 더 줄 필요는 없으니까.
잭 제임스 기자 머릿속엔 투사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
축석령에서 적의 주공을 막아낸 공적으로 받은 을지무공훈장과 수여증서가 손에 들려있었다.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 다음가는 훈장으로, 전시에 세운 공적이 크지 않다면 받을 수 없는 훈장.
“축하하네. 나라를 위해 힘써줘서 고맙네.”
“중령 이강산.”
훈장이 수여됨과 동시에 중령으로 1계급 특진은 덤이었다.
거창한 수여식은 생략됐다.
1사단장 백선엽 대령과 6사단장 김종오를 비롯한 소수의 수훈 대상자들은 상황상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나 역시 직접 수훈을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서울에 온 것이 아니었다.
특진, 훈장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자네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참으로 기구한 인연 아니겠나?”
자리에 있는 인원은 나를 포함한 3명.
훈장 수여라기보다 굳이 따지자면 은밀한 회동에 가까웠다.
이승만 대통령이 기구한 인연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현시점 서울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쟁에 변곡점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에서 각하를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어디까지나 서울을 강조한 데 악의는 없다.
대전이 아니라 반가울 뿐이지.
“축하하네. 이강산 중령.”
다른 한 명은 영어를 쓰는 외국인.
나를 보며 흐뭇해하게 짓는 미소를 보니 내 팬클럽 회장 직책을 줘도 충분할 것 같았다.
전시 상황에 수훈을 핑계로 주변을 물린 채 대통령을 만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방귀깨나 뀌는 회장님 덕에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 자네가 나와 맥아더 사령관과 긴히 할 말이 있다고? 아마 지금부터 주어지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걸세. 다른 이들은 맥아더 사령관과 독대 중으로 알고 있으니.”
어떻게 운을 띄울까 고민하던 중, 다행히 이승만 대통령이 먼저 운을 띄웠다.
“각하, 미 지상군의 규모와 군수물자를 늘려달라는 요청을 미 국무부에서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빠른 기승전결을 통해 그를 설득해야 했다.
“그렇네. 내 전쟁이 나기 전부터 그리 말을 했건만··· 흠. 그 문제라면 내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세.”
말을 천천히, 조심히 하는 것이 옆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 앞에서 미국 이야기를 하는 것에 눈치를 보는 듯했다.
“편히 말씀하셔도 됩니다. 결국, 이 상황이 된 것엔 저와 미 국무부의 안일함이 모종의 원인이라도 제공한 것은 사실이니까.”
사실 이쯤 되면 사람들이 맥아더가 그간 해온 말과 행동 때문에 짙은 색안경을 끼고 벗지 않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착각이지만, 한국에 와 나를 만난 뒤엔 그저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막아내고 있는 방어선 중 한 곳이라도 뚫린다면, 서울은 물론이거니와 어디까지 밀릴지 가늠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또 이승만 대통령은 남쪽을 향해 힘겨운 달리기를 해나가야 할 것이다.
“여기 있는 맥아더 사령관, 김홍일 총참모장을 비롯해 몇몇 야전 지휘관들도 보고하던 내용이네만, 서면이나 전화상으로 트루먼과 미 국무부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네. 나로선 방법이 없는 게지.”
“방법이 없진 않습니다. 각하.”
방법이 없진 않다는 말에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일시 정지된 시간을 재생시킨 건, 맥아더였다.
“그 미적지근한 인간들을 설득시킬 방법이 정말 있다는 말인가?”
“예. 각하께서 말씀하셨듯 의자에 앉아 서면이나 전화로 그들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다만, 각하께서 미국에 직접 가신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겁니다.”
“이보게 이 사람. 전시 상황에 대통령이 나라를 비우고 미국에 간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도대체가···”
어쭈?
미국이 말이 안 되면, 당신이 전에 대전으로 도망간 건 말이 되고?
“대통령님. 이어지는 말을 더 들어볼 가치가 충분한 것 같습니다.”
“알겠네. 사령관. 우선 계속 말해 보게.”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의 여론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 또다시 전쟁을 원하는 국민은 없을 겁니다. 각하께서 이런 여론의 인식부터 바꿔주셔야 합니다.”
현재로선 트루먼 대통령과 미 국무부를 설득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뿐이다.
반드시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한 뒤, 미국에 보내 그가 트루먼과 애치슨이 내린 결정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
지금 설득시키지 못해 방어선이 밀린다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일이 생길 테니까.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남편과 자식을 보내야 하는 전쟁이 아닌,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함이며, 나아가 움츠린 채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공산 소련과 보이지 않는 싸움이라는 인식 말입니다.”
이승만과 맥아더 두 사람 모두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트루먼과 애치슨 설득이 우선이 아닌, 여론과 국회를 움직여야만 가능성이 있다.
“이 모든 일은 미국에 충분한 연고가 있는 각하께서만이 해내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이승만은 미국에 가기만 한다면 말을 전달하기엔 충분한 조건과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 이승만 대통령이 쉽사리 결정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결정에 1분 1초가 늦어질수록 그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건 애꿎은 군인들과 국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갈팡질팡,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을 것이다.
“각하.”
마지막 카드.
북진(北進)
이 카드가 그의 머릿속을 헤집는 잡념을 지워주길 바라며 말했다.
“국군이 편제를 유지하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면 북진은 먼 미래, 아니 먼 미래에서도 불가한 일이 될 것입니다.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이 죽어 나가면서도 그 무엇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국민은 언제 침략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을 가진 채 살아갈 것입니다.”
과거에도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통일을 염원하며 나아가긴 했지만, 미국의 만류에도 결국 이승만의 묵인과 맥아더의 욕심.
국군 지휘관들의 분노와 복수심이 지배한 북진이었을 뿐이다.
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다.
“맥아더 사령관···”
“말씀하십쇼. 대통령님.”
“지금 이 자리에서 들은 말을 모두 못 들은 것으로 한 채, 미국으로 갈 방법을 마련해 줄 수 있겠소? 부탁하네.”
이승만의 결심이 선 모양이다.
흔들리던 눈동자는 제자리를 찾은 듯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전시 상황에 대통령님만을 위해 미 공군 군용기를 띄우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모른 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군수물자를 내려놓은 뒤 돌아가는 군용기 화물칸에 탑승하시는 겁니다. 물론, 저는 몰랐던 사실이 되어야 할 테고.”
12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화물칸에서 보내는 건 둘째 치더라도, 최악의 경우엔 적에게 노출되어 격추당할 위험도 있는 위험도 존재했다.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소. 다시 한번 부탁하오. 사령관.”
끈적한 애국심,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전우애 같은 감정과 기운이 모두의 눈에서 느껴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무사히 미국에 도착해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해 낸다면, 더없이 좋은 변곡점이 될 것 분명했다.
물론 다 차려준 밥상에 밥을 먹냐 안 먹냐의 갈림길이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알린 채 화물칸에 몸을 실은 대통령.
연출 될 그림 또한 그럴싸했다.
“각하. 가히 훌륭한 결정이십니다. 다만 가시기 전에 반드시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결정은 결정.
갈 땐 가더라도, 싸놓은 똥은 좀 치우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