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쾌도난마(1)
곧 미국으로 떠날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하고, 국군 총지휘에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칠 수 있는 사람을 세 명 꼽으라면.
육군 총참모장 김홍일 장군.
미 극동 사령관 맥아더 더글라스.
마지막으로 이승만이 말을 할 때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탄복했다는 국방부 낙루장관(落淚長官) 신성모.
셋 중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 국군 지휘부에서 반드시 치워져야 할 사람은 당연, 국방부 장관 신성모였다.
‘똥은 비료로라도 쓴다지만···’
똥은 없어선 안 될 존재지만.
그는 있어선 안 될 존재였다.
내 의견이 받아들여져 채병덕을 해임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군용기 화물칸에 몸을 싣고 미국으로 향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순간, 가장 큰 걸림돌을 치우는 것에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각하, 국방부 장관에게 전황에 대한 보고는 듣고 계십니까?”
“물론일세. 적의 기습 침략에 국군이 38선 이남으로 조금 밀려나긴 했지만, 단시일 내에 실지를 회복하고 북진하겠다고 하더군.”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행을 결정하게 만든 키워드는 북진.
지금 그의 머릿속엔 미국과 연합국의 든든한 원조를 등에 지고 압록강으로 북진할 생각이 가득할 것이다.
국군 1사단, 6사단, 7사단 군인들의 목숨으로 간신히 고착해내고 있는 임진강, 의정부, 춘천 방어선이 최종 방어선이라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현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국군은 근시일 내로 최종 방어선을 한강 이남으로 후퇴시킬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하게 미군과 연합군이 상륙할 때까지 자력으로 버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자네 말대로라면, 신성모 장관이 내게 거짓 보고를 했단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이미 김홍일 총참모장의 지휘 아래 김포 지구 전투 사령부, 시흥 지구 전투 사령부를 꾸려 한강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끝없이 내려오는 피난민 행렬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병력 편제와 보급로가 완성되고 피난민 대피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적의 총공세가 몰아닥치기 전, 전방 부대들은 후방 부대들의 엄호 아래 한강 방어선으로 후퇴해 내려와 합류할 계획이었다.
“내가 아는 신성모 장관은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인데··· 어찌···”
“각하, 이것 좀 보시겠습니까?”
잭 제임스 기자에게 받은 사진 몇 장을 안 주머니에서 꺼내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넸다.
실환가? 싶지만.
때로는 현실이 더 소설보다 소설 같을 때도 있는 법.
현실적이면서도 상당히 꼴사나운 사진이었다.
함께 사진을 본 맥아더도 짙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뭐란 말인가. 대체.”
뭐긴, 현실이지.
아주 지독한.
“그 사진이 신성모 장관의 실체입니다. 각하.”
신성모 장관이 군용 지프에 두어 명의 여성들과 함께 올라타 있는 사진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조국을 걱정하며 눈물 흘리던 그의 모습과는 달리, 사진 속 신성모 장관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듯.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진을 받아내고, 간신히 보도하겠다는 것을 말렸습니다. 이 사진이 해외에 보도되었다면, 나라 망신은 물론이거니와···”
개전 당시 일요일엔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그의 근무 태도를 말할 것도 없다.
눈앞에 있는 증거들만으로도 그가 자격이 없음은 충분히 밝혀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잠깐.”
짙은 인상을 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맥아더가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 이 나라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이곳에 온 군인으로서, 이곳에 오게 될 미군을 지휘해나가야 할 사령관으로서 요청하는 바입니다. 당장 국방부 장관 신성모를 체포하여, 이 나라 수뇌부가 올바른 심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맥아더가 뱉은 말은 아주 단단하고도 단호했다.
그 단단함에 틈을 찾으려 해도, 바늘조차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타국의 국방부 장관을 체포하라는 말까지 운운한 이유는 능력 없는 자가 요직에 앉아 있어서라기보다, 한국을 지키는데 큰 방해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흠··· 이강산 중령. 자네 생각도 맥아더 사령관과 같은가?”
“그렇습니다. 백 번, 천 번을 다시 생각해도 같은 결론을 내릴 것입니다. 각하.”
그 누가 나에게 몇 번을 되묻는다 해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독립운동가를 존경하고, 같은 민족의 피와 눈물을 빨아 잘 먹고 잘사는 친일파를 척결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나라가 또다시 위기에 빠진 지금.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이 없는 자를 요직에 앉히거나, 잘못을 봐주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닐 것이다.
“나 대통령일세.”
고심을 마친 이승만 대통령이 곧바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곧 그가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헌병대를 보내 국방부 장관 신성모를 체포하게.”
-예? 국방부 장관을 체포하라니···
“자네랑 긴말할 시간 없네. 당장 체포해! 명령일세.”
명령이라는 말에, 관장약이라도 넣은 듯 뱃속을 막고 있던 이무기가 단번에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 시원하다.
***
의정부 지구 전투 사령부 지휘소.
삼자대면을 마치자마자 지휘소에 복귀했다.
아마 이 시간쯤이면 신성모는 손에 포승줄을 묶은 채 체포되었을 것이다.
“피난민들 대피는 얼마나 진행됐지?”
“현재 아군 방어선을 기준으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 대피는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신속한 거동이 힘든 노인과 아이, 부녀자 이동을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도우며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피난민의 대피는 신속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채병덕이 해임되기 전 내린 명령으로 인해 전방지역에 올라와 있던 건장한 사관생도들이 피난민을 돕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겠네.”
정보 장교에게 상황을 전달받은 뒤, 곧바로 김석원 사령관을 찾아갔다.
“그래, 마침 기다리고 있었네. 진급을 축하하네. 이강산 중령.”
김석원 사령관은 언제나 그랬듯 일본도를 탁자에 걸쳐놓고 있었다.
저 정도 애정이라면, 화장실 갈 때도 밑을 닦을 것보다 일본도를 먼저 챙길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감사합니다. 현재 피난민 문제는 원활하게 해결되고 있습니다. 남은 건, 현 방어선에 남은 아군이 무사히 한강 방어선까지 후퇴하는 것뿐입니다.”
“서울을 비워둔 채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꾸리는 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김홍일··· 김홍일 참모장이 세운 계획이라면 정답에 가깝겠지. 그래서 생각해 놓은 선발대와 후발대는 정해졌는가?”
각 사단 지휘부에는 육군본부에서 하달된 명령이 도착해있었다.
[30일 새벽. 각 부대는 통신과 편제를 유지한 채, 한강 이남 지역으로 후퇴하라.]
무작정 남쪽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닌 각 사단, 각 부대의 통신을 유지한 채 유기적으로 전선을 맞춰 후퇴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쉬운 점은, 가용 병력을 이용해 상황을 전파하고 피난을 독려했지만, 모든 사람을 피난시킬 수는 없었다.
전쟁의 포화를 피해 진작 짐을 싸 남쪽으로 내려오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집과 터전을 버리고는 그 어디도 가지 않겠다는 사람도 존재했다.
피난을 가는 사람과 피난을 가지 않는 사람.
둘 중 틀린 사람은 없다.
자신이 가진 가치관 내에서 스스로 판단했을 뿐.
“상대적으로 2사단 병력보다 7사단 병력의 피로도가 심할 것으로 예측되는바, 7사단 1연대와 9연대를 선발대로, 2사단 5연대와 16연대 중 후발대를 선정하는 것이 수월할 겁니다.”
쉴 새 없이 계속됐던 전투 탓에 피로도가 쌓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다만, 선발대와 후발대를 정해야 하는 지금 상황엔 38선 인근부터 전투를 이어온 7사단보다, 비교적 늦게 전선에 도착한 2사단이 후발대를 맡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좋네.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그런데 말일세. 16연대가 가장 늦게 투입되었네만, 연대장이 지난 전투에 전사해 연대장 자리가 아직 채워지지 않았네. 이번 후퇴 작전은 부대의 꼬리가 가장 중요한 법 아니겠나? 누굴 임명하면 좋을지 생각해보게.”
피로도가 가장 덜한 16연대 연대장은 애석하게도 지난 전투에서 눈먼 총알에 맞아 전사했다.
적이 방어선 후퇴를 알아차릴 경우, 가장 늦게 후퇴하는 부대는 적과의 교전이 불가피하다.
가장 늦게 투입되었지만, 이번엔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아야 하는 운명.
지휘관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맞습니다. 16연대의 경우 먼저 출발한 선발대에 비해 적과 교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썩 괜찮은 적임자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위험한 16연대를 이끌어야 할 지휘관.
뇌리를 스치는 적임자는 한 명뿐이었다.
“오, 그런가? 말해 보게.”
“접니다. 사령관님.”
나.
때마침 중령으로 진급한 지금, 16연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나였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역시, 사내답군. 자네가 꼬리를 맡아준다면 안심하고 한강 이남까지 내려갈 수 있겠네. 지금 당장 자네를 16연대장으로 임명하도록 하지.”
허.
정말이지 독특한 인간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했다만, 보통 이럴 땐 ‘자네를 어찌 그 위험한 자리에 임명할 수 있겠는가.’ 라던가, 그에 비슷한 말이 나와야 정상 아닌가?
그런 말을 들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테지만.
“예.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각 부대 지휘관들에게 상황을 전파하고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연대장에 임명해 잘하길 바라는 근거 없는 도박보다, 내가 꼬리를 맡는 것이 속 편했다.
지금까지는 고정된 방어선을 지키며 적을 지연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엔 움직이는 방어선에서 적을 지연하고 막아야 한다.
방어선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는, 고정되어 있을 때보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올 가능성이 크다.
‘해낼 수 있다.’
지금까지 잘 해왔듯, 앞으로도 잘 해낼 것이다.
김석원 사령관을 향해 경례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라디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아,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입니다. 국민 여러분들께서 이 방송을···]
이승만 대통령의 녹음된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왔다.
맥아더 사령관이 최대한 빠른 군용기를 알아봐 준다고는 했지만, 벌써 미국으로 향하는 화물칸에 탑승을 마친 모양이다.
“잘 썼네. 잘 썼어.”
그의 입에서 대체 어떤 훌륭한 이가 썼는지 모를 심금 울리는 가슴 찡한 담화문이 낭독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