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39화 (39/149)

39화. 쾌도난마(2)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입니다.]

내가 공들여 직접 작성한 담화문이 낭독되는 순간, 큰바람이 불어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담화문을 듣고 있는 건, 나만이 아닐 테니까.

국군과 정부 관료는 물론이거니와, 목에 낡은 라디오를 메고 어린 손자의 손을 잡고 피난 행렬에 나선 노인.

총공세를 감행하려 준비 중인 빨갱이들과 중공, 나아가 소련까지.

모두 듣고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대통령이라는 고성능 확성기를 통해 국민에게 전하는 기분이란.

짜릿 그 자체다.

[우리 대한민국은 현재 대한민국을 와해하려는 공산 세력으로부터의 침략을 겪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현 상황을 알려드리기에 앞서 근거 없는 희망만을 전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의 올바른 도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이 담화문을 낭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공산 세력이 들이미는 총과 칼로만 이루어진 위기는 아닙니다.

우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신분제를 폐지했음에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인간의 존엄을 여전히 양반과 그 아래로 나누어 차별하고 있습니다.

총알과 포탄은 양반이라 하여 피해 가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닥친 이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해나가기 위해 서로를 존중하고 평등하게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출생을 따지지 맙시다!

곳곳에 숨어있는 공산 세력은, 이러한 국민의 어둡고 습한 작은 틈에 달라붙어 기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강 이북에 계신 국민여러분께서는 안전을 위해 잠시만 터전을 떠나 전쟁의 화마가 닿지 않을 한강 이남으로 대피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탱크를 앞세워 나라를 침략하려는 적의 계획은, 우리 대한의 아들인 국군,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전 세계 연합군 아래 무참히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인무도한 행위입니다.

반드시! 다시는 이 땅 위에 이와 같은 슬픔과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할 것을 약속드리며 이만 말을 마칩니다.]

담화문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내용은 단순히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고 피난을 독려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물에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뿌리를 뽑아내는 것.

또 이 변화가 반드시 많은 사람의 피를 필수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

‘충분히 전달 됐으려나?’

담화문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겉으론 알 수 없다.

지휘소에 있던 그 누구도 먼저 말을 내뱉지 않았다.

고요하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마음을 다잡고 있으리라 예상하는 것뿐.

“어이.”

김석원 사령관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흡. 예?”

무방비상태로 찔린 옆구리 탓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표정을 보니 담화문이 그리 감명 깊었나? 이 방송은 우리만 듣고 있는 게 아닐세. 한강 이남으로 피난하라는 내용을 필시 적도 들었을 테지.”

물론 깊이 감명받고 있었다.

저 담화문을 써낸 내 글솜씨에.

“물론입니다. 사령관님.”

“서둘러야겠네. 각하께서 저런 담화문을 발표하시다니··· 적에게 우리 작전을 다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선발대는 출발준비를 마쳤을 겁니다. 한강 이남에서 뵙겠습니다. 사령관님.”

“그래. 나 먼저 감세.”

선발대로 출발할 김석원 사령관이 말 끝나기 무섭게 뒤돌아 지휘소를 나갔다.

‘대통령이 내부 결속이나 다지기 위해 괜한 짓거리를 했다고 생각하려나?’

담화문 발표로 잡을 수 있는 토끼는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내부 결속이라는 한 마리는 이미 철창 구석에 몰려 잡히기 직전이다.

또 다른 한 마리는? 제 발로 걸어들어와 잡힐 것이다.

제 꾀에 빠져서.

***

북한군 3사단 지휘소. 송우리 인근.

“시간이 없다! 날래 공격 준비하라! 뒤꽁무니에 내래 직접 총알을 때려 박아 주갔서.”

담화문이 끝나기도 전, 리영호 사단장은 피난 내용을 듣자마자 공격 준비 명령을 내렸다.

모든 전선에 하달될 2차 총공세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공격 준비를 명령한 것은 비단 3사단뿐만이 아니었다.

적이 현재 방어선을 버리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라면, 피난민과 함께 후퇴하느라 느려질 적의 꽁무니를 잡아 괴멸시키는 건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다.

“멍청한 남조선 아새끼들 감성팔이를 위해 자멸하는 자충수를 뒀구만 기래.”

“전 부대! 티끌만치의 흠도 없는 만반의 공격 태세 준비를 마쳤습네다. 동지.”

“전군, 출발 하라우.”

리영호 사단장의 명령과 동시에 일제히 걸린 T-34 전차 시동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그간 전투에서 맛본 굴욕을 죽음으로 갚아줄 차례였다.

“공격 개시하라!”

공격 개시 명령이 떨어지고, T-34 전차의 궤도가 전진을 위해 부르르 떨리려는 찰나.

“멈추라우! 당장 멈추라!”

지휘부 막사 안에서 누군가 나와 전차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북한군 3사단 소속 정치장교 김광선이었다.

“당장 멈추라! 리영호 사단장 동지. 즉각 공격 명령을 취소하라는 당의 명령이오.”

“뭐요? 취소라니.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란 말이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던 전차, 그 뒤를 따르는 새까맣게 많은 병력이 한순간에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이 보오. 동무, 지금 같잖은 소리라 했소? 당의 명령을 무시하겠다는 게요?”

“적이 방어선을 버리고 도망치겠다고 저리 방송까지 해가며 알려대는 통에, 공격을 중지하라? 내래 동무의 사상이 의심스럽고만 기래.”

리영호 사단장이 권총이 있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쏠 수 있으면 쏴 보라! 동무가 당의 명령을 전하는 나를 쏘고도, 머리가 목 위에 붙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장에라도 서로의 허리춤에 있는 권총을 꺼내 겨눌 것 같은 분위기.

다행이라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권총을 꺼내 겨누는 상황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당에서 공격을 취소하라는 이유가 대체 뭐요.”

리영호의 격앙된 목소리가 대화를 위해 한풀 꺾였다.

공산주의 국가의 군대는 국가의 군대가 아닌 당의 군대.

당이 군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대마다 공산당 당원을 보내 군 지휘관들을 감시하게 했다.

특별히 사관학교를 졸업했거나 군사적 지식이 있는 진짜 군 장교는 아니긴 했지만.

“당에서는 이번 라디오 방송이 적의 속임수 전략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소. 내래 지켜보는 그간 동무들이 한 것이라고는 뭐가 있소. 이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저 작은 고개 하나 못 넘지 않았소?”

“···”

리영호 사단장이 자꾸 허리춤으로 향하려는 손을 연신 참아내고 있었다.

무시.

당의 명령이라는 짧은 단어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자신과 3사단을 향한 무시와 모욕이었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이번 남조선에서 들려온 방송을 세세히 해석하고, 남조선 놈들이 진짜 후퇴한 사실을 눈으로 보기까지는 3사단은 잠자코 송우리에 있으라는 명령이오.”

잠자코?

저 입을 당장 찢어버리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저 간나새끼···’

당이 이러한 판단을 내린 건, 당이 멍청해서는 아니었다.

예상을 뛰어넘은 적의 방어에 3일 안에 서울을 점령하겠다는 계획이 물거품 된 것은 둘째로 하더라도 상당한 땅크와 병력 손실, 지난번 전투에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나타난 미제 전투기.

무엇보다도 들어달라는 듯 아무런 보안도 거치지 않은 방어선의 후퇴를 알리는 대통령의 담화문이 속임수라는 생각을 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전군, 현 위치에 대기 하라!”

리영호 사단장이 대기 명령을 내리자, 김광선 정치장교가 얄밉게 고개를 끄덕여댔다.

“김광선 동무.”

리영호 사단장의 목소리가 어두컴컴하고 깊게 가라앉았다.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는 심해처럼.

“동무는 사람을 몇이나 죽여봤소?”

“뭘··· 그런 걸 물으시오. 동무.”

“내래 지금까지 이 손에 묻힌 피가 몇 명의 것인지 셀 수조차 없소. 이번까지는 참고 넘어가네만, 반드시 기억하시오.”

그 심해 같은 목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 오싹한 공포였다.

“이 리영호가 전쟁터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동무 뒤통수에 총알을 쑤셔 박는 건, 모기 새끼 잡기보다 쉬운 일이라는 걸.”

리영호 사단장 입에서 나온 말은 허세나 격 떨어지는 협박 따위가 아니었다.

“아··· 알겠소. 미안하게 됐소. 동무.”

“축하하오. 동무. 방금 그 말로 목숨 하나를 더 얻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 그대로.

부탁이 아닌, 한 마디라도 나불댔다간 당을 찾기도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는 통보였다.

***

6월 30일 오후 5시.

김석원 사령관이 이끄는 7사단, 2사단 선발대가 한강 이남을 향해 출발한 지 어느덧 8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피난민을 도우며 남하하더라도, 선발대 선봉이 서울에 도착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었다.

“연대장님. 지금은 대낮입니다. 정말 이것만으로 적을 기만할 수 있겠습니까?”

16연대 1대대장 김상옥 소령이 물어왔다.

“충분하네. 적이 낌새를 최대한 늦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다들 각자 맡은 구역의 위장상태를 철저히 점검하게.”

이젠 마지막 후발대로 16연대가 출발할 시간.

마지막 점검을 지시한 뒤,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은 김상옥 소령을 다독였다.

‘제대로 먹혀들었어.’

아직 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건, 내 계획대로 완벽히 속았음을 뜻했다.

나무와 돌로 잘 위장된 도로변 진지와 고지 진지 위로 고개 내민 철모가 보였다.

철모를 쓴 사람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쉽지 않았다.

“연대장님. 멀리 떨어진 곳에서 관측하더라도, 소총 사거리 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쉽사리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직접 관측까지 마친 김상옥 소령이 훌륭하다는 듯 자랑스레 보고했다.

대낮이었음에도, 위장에 신경을 쓴 덕에 나뭇가지에 걸린 철모인 것이 티가 나질 않았다.

적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추격에서 멀리 벗어난 뒤가 될 것이다.

“그럼 우리도 서둘러 출발하지. 발에 물집이 잡혀 걸음에 지장이 있거나 체력이 부족한 병력을 교대로 차량에 태워 속도를 높인다. 출발!”

“연대장님 차량은 이쪽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됐네. 나는 마지막 병력을 태울 차량이 왔을 때, 그곳에 타겠네. 설득할 생각 말고 어서 가게.”

모두가 차에 올라타 신속히 한강 이남 방어선에 도착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병력과 탄약도 모자란 판국에 병력을 실어나를 차량이 넉넉할 리 없었다.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제가 직접 금방 모시러 오겠습니다.”

김상옥 소령이 각진 경례를 해왔다.

‘먼저 가라.’

그 대신 빨리 오라고.

훌륭한 지휘관이 되려면, 현명한 판단력과 순간적인 대처 능력을 지녀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번지르르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지휘관으로서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나처럼.

“계획대로만 흘러간다면···”

계획대로만 흘러간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도려내지 못했던 상처를 도려낸 대한민국이 될 수 있다.

몸은 남쪽으로 내려가지만, 계획엔 한걸음 가까워지고 있었다.

번쩍.

뒤통수에서 느껴진 번쩍거림에 뒤를 돌았다.

축석령에 떨어지는 적 포격인 듯했다.

소리는 한참 뒤에, 그것도 귀마개라도 한 듯 아주 작은 소리로 들려왔다.

“멍청한 새끼들, 이제야 알아차린 거야?”

밤하늘이 이미 어둡게 물든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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