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한강 방어선(1)
북쪽에 쏟아지는 북한군 3사단의 포격은 한강으로 향하는 길을 반딧불처럼 밝혀줄 뿐이었다.
멀리서 군용 차량 한 대 헤드라이트에서 두 줄기의 빛을 뿜어내며 다가왔다.
“연대장님 무탈하십니까? 병력을 한강 다리에 하차시키자마자 즉시, 차를 돌려 모시러 왔습니다.”
차에서 내려 나에게 달려온 이는 출발 전 나를 태우러 오겠다던 김상옥 소령이었다.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걱정 섞인 안부를 물어왔다.
“괜찮네. 간간이 떨어지는 반딧불 구경이나 하며 걷는 게 뭐 어려웠겠나. 이동 간에 문제는 없었나?”
정말 괜찮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여름 바람과 이따금 붙어대는 모기 말고는 16연대의 앞길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동 중 두 차례 정도 소규모 교전이 있었습니다. 아군 후방으로 침투한 적 게릴라로 추정되며, 게릴라는 전원 사살. 아군 부상자 2명 외의 피해는 없었습니다. 연대장님.”
아군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은밀히 후방에 침투한 게릴라가 있었던 모양이다.
선발대가 그 게릴라들을 소탕하고 지나간 탓에, 마지막 후발대는 적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좋네. 출발하지.”
“예! 연대장님.”
김상옥 소령을 보고 있자면 뭐랄까.
군기와 각이 제대로 잡힌 군인의 표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를 상관으로서 대우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눈을 통해 전해졌다.
“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지 않습니까?”
“맞네.”
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느끼고 있었다.
늦은 시간인 탓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많은 피난민이 한강 이남으로 넘어가 대부분이 빈집이었으니까.
간혹 불이 켜진 집이 듬성듬성 보이긴 했지만, 조금의 아쉬움을 느낄 뿐 피난을 강요하거나 강제할 순 없는 노릇이다.
‘수많은 국군과 피난민이 다리를 넘지 못했었는데···’
과거 한강교 조기 폭파는 전쟁 중 최악의 오판으로 손꼽혔다.
한강 이북의 병력과 피난민이 다리를 채 건너기도 전 다리가 폭파되면서, 국군 전투부대의 절반은 와해 된 상태로 한강을 건너야 했다.
그마저도 제대로 폭파하지도 못했지만.
이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국군이 선전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개소리를 듣는 대신 소개령이 내려졌고, 예전과 달리 후퇴하지 못한 국군이나 국민이 공산 치하에서 온갖 고초와 죽임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가장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가치는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였다.
수도 서울은 빈집이다.
다만 그 수도를 빈집털이하듯 점령하고 드는 북한군의 심정은 희열과 카타르시스보단 허무함과 허탈함일 것이다.
“연대장님, 혹 질문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질문?
환영이다.
방금 한강 이북에 대한 생각 정리가 끝난 참이거든.
“물론이네. 얼마든지.”
“감사합니다. 작전 계획 중 우리 2사단과 7사단은 비교적 발달 된 도로를 통해 지금과 같은 빠른 후퇴가 가능했지 않습니까?”
이쯤 되니 감이 왔다.
궁금한 게 뭔지.
“자네가 궁금한 건 동부전선에 있는 6사단과 8사단은 지형이 험준할 터인데, 어떻게 적 추격을 물리치고 후퇴하고 있는지가 궁금한 게 맞나?”
“맞습니다만, 더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제 머릿속에 든 생각을 어찌 그리 정확하게 꿰뚫어 보신 건지···”
“동부전선에 깔린 도로 중 적이 남진해 우리에게 가장 위협이 될 도로가 어디인 줄 아는가?”
“강릉과 삼척을 잇는 7번 도로가 주 남진 도로가 될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정답.
김상옥 소령은 자신이 지휘를 맡은 부대 인근만이 아니라, 38선 이남 도로와 지리에 대한 전체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
그라면 한강 이남에서 편제되는 어떤 부대를 맡더라도 지휘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맞네. 적을 막을 방법이랄게 뭐 있겠나. 산이라도 무너트려 막아야지.”
“아···”
김상옥 소령이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산이라도 무너트린다는 말을,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뜻을 돌려 말한 것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아닌데.
“걱정을 줄이게. 큰 문제는 없을 테니.”
동부전선과 중부 전선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다를 접하느냐, 접하지 않느냐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미 극동해군 소속 순양함 츄나우호가 7번 도로와 인접한 산에 200mm 함포를 무자비하게 쏟아붓고 있겠지.
200mm 함포의 무차별 사격이면, 산사태를 만들어내 도로를 막기 충분했다.
미 극동해군이 신속하게 한반도에 전개될 수 있었던 건, 절대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니다.
맥아더가 트루먼과 미 국가안보회의에 빠르게 제출한 상황보고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
정확한 인과관계를 따지자면, 맥아더를 구슬린 사람이 누구지?
이게 요점이다.
“연대장님, 곧 한강교에 도착합니다.”
잔잔하게 흐르는 한강의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과 어우러진 참···
낭만 있는 운치였다.
***
한강.
수도 서울을 이북과 이남으로 갈라 관통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강.
좁은 곳은 700m, 넓은 곳은 1500m에 달하며 평균 수심이 3m 이상 되는 천혜의 요새가 따로 없었다.
이 천혜의 요새 남쪽에 국군의 방어선이 깔리고 있었다.
16연대가 도착한 곳은 영등포, 여의도 인근.
“오느라 고생했네. 내가 바로 시흥지구 전투 사령관일세. 우리··· 일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
이런 시답지 않은 농담을 건네며 자신을 사령관이라 말할 사람은 한 명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일본도를 손에 쥔 김석원 사령관.
총참모장이 된 김홍일 장군의 빈자리를 김석원 사령관이 대신해 메꾼 모양이었다.
“익숙한 것도 같지만 ···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과 헷갈리신 것 같습니다.”
한 번쯤 그의 농담을 받아줄 때가 된 것 같다.
초면이라는 말로 적당히 기분을 맞춰 주었다.
“오호. 이 사람 보게? 못 본새 재치가 많이 늘었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사령관님, 제가 맡아야 할 지역은 어디입니까.”
“지금 막 도착했으니 한숨 돌리지 않겠나?”
“괜찮습니다. 재편성된 부대에 가서 쉬도록 하겠습니다.”
한강 이남은 부대 재편성과 재정비에 여념이 없었다.
김홍일 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김포, 영등포, 노량진, 강남, 이천-용인을 각 지역 사령부를 세워 방어선을 구축했다.
동시에, 편제가 온전하지 못한 부대는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혼성부대를 꾸려 병력과 지휘관을 재편성하고 있었다.
나도 현재 직책은 16연대장이지만, 곧 다른 직책으로 바뀔 터.
“16연대는 재편할 필요 없네.”
“재편이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재편이 없다?
농담을 더 받아줄 시간은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지만, 이곳은 곧 적의 포탄이 빗발칠 방어선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부대 실정을 파악하기 전, 적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자네가 눈도장을 아주 제대로 찍은 모양이더군.”
한차례 부럽다는 듯한 눈초리를 날린 뒤, 말을 이어갔다.
“16연대는 참모장님의 명령에 의거, 혼성 사단에 예속되지 않는 독립적인 보병 특공 연대로 변경되었네. 물론 연대장은 이강산 중령 자네고.”
독립 특공.
남자의 가슴을 뛰게 하기 충분한 단어였다.
특공 연대, 게다가 사단 예하가 아닌 독립 연대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최고 지휘관인 것은 물론, 지휘관의 재량이 최대한으로 부여된 연대라는 뜻이다.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이제 연대원의 목숨은 순전히 지휘관인 자네에게 달린 것이나 다름없네. 자유엔 그만큼의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잊지 말게.”
지금껏 봐온 김석원 사령관의 어떤 표정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조언을 건넸다.
‘자유엔 책임이 따른다. 맞는 말이지.’
자유엔 책임이 따른다.
반대로는 책임 없는 자유는 없는 법.
자유로운 지휘 권한을 얻은 대신, 그에 걸맞을 막중한 책임도 함께 얻었다.
앞으로 내 작전 계획과 판단, 어쩌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1000명의 목숨이 오갈 것이다.
16연대의 병력은 1대대, 2대대를 합쳐 총 1000여 명.
비록 보편적인 연대 병력에 비하면 적은 수의 병력이었지만, 특공이라는 명칭 아래 다양하고 급격히 변화는 전장 환경에 대응하기엔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이곳 영등포에서 재정비와 휴식을 마친 뒤, 어느 방어선 이동할 것인지 보고하고 떠나게. 앞으로 한 시간 뒤, 한강 이남과 이북을 잇는 모든 한강교가 폭파될 테니.”
눈에 보이는 모든 병력이 각자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한강 둑에 모래주머니를 견고하게 쌓아 만들어 놓은 기관총 진지와 박격포 진지가 눈에 띄었다.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는 하나,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
제갈량도 한 수 배우겠다며 울고 갈 내 활약으로 최대한 국군의 전력을 보존하고, 적에게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여러 방면에서 압도적인 전력 차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1대대장과 2대대장을 불러오게.”
호출 명령을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1대대장 김상옥 소령과, 2대대장 문기준 소령이 내 앞에 섰다.
“지금부터 내 말 잘 듣게.”
“예!”
대대장 둘이 동시에 짧고 굵게 대답했다.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에, 마치 한 사람이 대답한 것 같았다.
“우리 연대는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되느냐, 대역 죄인이 되느냐의 길목에 섰네.”
백번 잘해왔어도, 한번 삐끗하면 죄인의 길로 틀어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현 시간부로 16연대는 보병 특공 연대로 부대를 재편하고, 연대 독립적인 작전 수행 임무를 부여받았네.”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테니까.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표정을 보니 두 대대장 어깨에 무거운 책임감이 내려앉고 있는 듯했다.
“미 지상군과 UN 연합군이 상륙할 것이라는 건 자네들도 알고 있을걸세. 국군의 1차 적 목표는 그때까지 현재 구축한 한강 방어선을 지켜내는 것. 따라서 우리 특공 연대는 적의 공세가 가장 심할 것으로 예측되는 곳으로 이동해 적을 저지하고, 괴멸시킬 것이네.”
원 역사의 한강 방어선은 6일간 지켜졌지만, 내가 있는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60일, 6년.
아니? 6천 년이 지나도 북한 빨갱이들이 한강 이남으로 내려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반드시 막아내야 하는 곳이 있다.
그곳이 나와 특공 연대의 첫 작전지가 될 것이다.
“연대장님, 우리가 방어해야 할 지역이 혹시···”
1대대장 김상옥 소령이 궁금증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2대대장 표정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우리는 말일세···”
이동할 곳을 하달하고 있을 찰나.
-쾅!
엄청난 양의 TNT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았을 땐, 한강교 중간 상판이 그대로 내려앉은 뒤였다.
김상옥과 문기준 대대장은 폭발음에 순간적으로 귀를 막았다.
“그곳으로 간다. 내 얘기··· 잘 들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