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한강 방어선(2)
“연대장님, 죄송하지만 작전지역을··· 잘 못 들었습니다?”
한강교 폭발음에 말이 묻혀 가장 중요한 작전지역이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의 첫 작전지역은 김포일세. 이번엔 잘 들었나? 서둘러 식사와 정비를 마친 뒤, 곧바로 출발하지.”
다시 말해주고 나서야 두 대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공이라는 가슴 뛰는 단어 속엔, 꽤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때로는 적의 허를 찌르는 가장 날카로운 창이 되어야 하고, 때로는 아군의 허를 찌르는 적의 공격을 막는 가장 튼튼한 방패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김포에서 적의 공격을 막는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가 될 것이다.
“자네들은 대대로 돌아가는 즉시 부대원들에게 특공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고취 시키게.”
“예! 알겠습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무언가에 희망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수시로 부대원들의 자긍심을 고취 시키고, 희망을 북돋아 주는 건 부대 전투력 상승에 굉장한 도움이 되겠지.
“서두르되 너무 재촉하진 말게. 이렇게 편하게 재정비할 수 있는 날이 또 언제 올지 모르니까.”
차가운 물에 등목이라도 하며 얼룩진 피와 땀을 씻어내고, 충분한 휴식시간을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만.
적은 기다려주는 법이 없다.
‘새끼들··· 열이 제대로 받았을 거거든.’
서둘러 김포로 떠나야 했다.
***
평양, 조선로동당 중원위원회 회의실.
한여름 회의실 안에는 냉랭한 한기가 돌았다.
한기를 뿜어내는 두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부위원장 동무. 3일이면 서울, 8월 15일 맞춰 부산까지 진격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소? 그토록 혀로 내뱉어내던 남조선에서의 20만 인민 궐기는 대체 어디 갔단 말이오?”
김일성 위원장이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있었다.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말하는 사이사이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 박헌영 부위원장이 그토록 자신에 차 있었던 남로당 총궐기.
지역 곳곳에서 산발적인 궐기가 일어나고 있으나, 전쟁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일제히 전국 곳곳에서 폭포처럼 들고 일어났어야 할 궐기는, 폭포가 아니라 아기가 싸는 오줌발에 불과해 보였다.
“면목 없습니다만, 위원장 동지. 따지고 보면 그리 달라진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애써 화를 삭이고 있는 김일성과 달리, 담담하고 뻔뻔하게 대답을 내뱉었다.
박헌영 부위원장은 계획이 틀어진 것에 대한 잘못을 비는 대신,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머리를 아무리 조아려 본들, 조아린 머리에 닿는 건 피할 수 없이 떨어지는 칼날.
상황이 틀어진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혀뿐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남진이 조금 지체되었다고는 하나, 현재 당의 군대가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했다고는 해도 그깟 오합지졸 남조선 군대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점령이라기보단, 어렵사리 산 새집에 들어가듯 조용히 입주하긴 했지만.
“미국 놈들과 UN 놈들이 전쟁에 뛰어든 건! 그것도 그리 달라진 게 없다고 지껄이겠소?”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박헌영의 혀를 뽑아 목에 감아버리고 싶었다.
분노를 꾹꾹 눌러 담고 있는 건, 아직 자신이 원하는 체제 구축이 완벽해지기까지 박헌영은 계륵과 같이 필요한 존재였다.
“위원장 동지, 대체 무슨 근심이 그리 많으신 겝니까. 우리 공화국 뒷배엔 든든한 소련이 있지 않습니까. 밟은 지렁이가 꿈틀거린다고 가던 길을 멈출 순 없는 노릇. 스탈린 동지의 의중이 어떠한지는 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지.”
박헌영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소련과 스탈린으로 대화 주제를 바꿔냈다.
스탈린의 속내 역시 김일성 위원장의 주된 고민 중 하나인 것을 교묘히 파고들었다.
“부위원장 동지, 회의실을 나가는 즉시 스탈린 동지에게 서신을 보내시오. 내 소련에 직접 가는 수고가 있더라도 결판을 지어야겠소.”
수그러든 김일성의 목소리가 박헌영의 계략이 성공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또한! 전 인민군 부대에 당장 남조선 아새끼들 군대를 모조리 몰살시키라 전하시오.”
“예! 동지.”
전쟁에 대한 의중을 알 수 없는 건 스탈린이지 김일성이 아니었다.
박헌영 부위원장이 세운 계획의 실패로 비롯된 분노가 다시 남조선에 향하고 있었다.
“흔적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다시 이갈리는 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
7월 1일 김포 새벽.
김포에 도착한 특공 연대와 나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하얗게 피어나는 물안개였다.
우중충한 날씨는 덤이었다.
‘어쩌면 특공 연대가 나타나는 지역이 계속 격전지가 될지도 모르겠군.’
아이러니 그 자체.
영화나 드라마, 만화를 보더라도 주인공 주변엔 신기할 정도로 시련과 고난이 계속 찾아온다.
비교적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특공 연대는 충분히 적을 막아낼 수 있는 곳에 나타날 확률보단, 최악의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투입될 가능성이 컸다.
“정지! 정지!”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김포 일대 방어 임무를 수행하는 김포경비사령부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1대대는 현 위치를 기준으로 좌측, 2대대는 우측으로 진지 구축 및 경계에 돌입한다!”
대대장에게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대대, 중대, 소대, 분대로 명령이 빠르게 뻗어 나갔다.
“1대대장,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물안개가 자욱하게 껴 시야가 제한된다는 것 말고는 특이점은 모르겠습니다. 날이 밝으면 물안개가 걷히지 않겠습니까?”
“흠···”
시력을 강화하고 있는 나로서도, 안개 건너편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더 잘 보이게 해줄 뿐이지, 무언가에 가려진 것을 투시해주는 능력은 아니었으니까.
“대대원들에게 진지 구축을 서두르고, 언제든 적 공격에 대응할 대비태세를 갖추라 전하게.”
“예! 연대장님.”
계속 지워지지 않는 찝찝함은 기분 탓일까?
북한군이 국군이 비워둔 서울에서 잠이나 퍼질러자며 여유롭지 않았다면, 충분히 한강 이북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너무 조용했다.
조용해서 싫다는 것이 아니라, 국군 방어선 진지에 산발적인 포격이 떨어지는 것이 더 어울린달까?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전쟁터에서 총소리, 포 소리가 들릴 때가 좋은 거라고, 그게 아니면 머리에 총을 맞은 것일 테니까.
‘안개가 걷히고 나면 알게 되겠지.’
이전과 달리 모든 한강교가 완벽히 끊긴 상태였다.
T-34 전차에 오리발을 달아 강을 도하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연대장님.”
연대 통신 장교였다.
김포에 도착하자마자 지시한 교신이 있었다.
답이 온 모양이다.
“현재 영등포 방어선, 노량진 방어선에도 적 포격은 아직 관측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 전방지휘소(ADCOM)에는 연대장님이 지시하셨던 내용 그대로 전달을 마쳤습니다.”
“수고했네. 다른 방어선에서 상황보고가 들어오면, 즉시 보고하게.”
여전히 물안개에 가려진 강 건너가 보이진 않았지만, 점점 물안개가 옅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30분쯤 지났을까?
찝찝함에 대한 이유를 눈으로 보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기랄. 전원 진지 안으로! 적 포탄 낙하에 대비하라!”
명령보다 욕이 먼저 튀어나왔다.
아직 물안개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건 얼핏 봐도 엄청난 숫자의 나룻배, 한강 둑 부근에 일렬로 길게 늘여놓은 T-34 전차였다.
-쾅!
명령을 내림과 거의 동시에 진지에 적의 맹렬한 포격이 시작됐다.
포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나룻배들이 일제히 노를 저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쏴라! 적이 땅에 발을 들이게 해선 안 된다!”
희끗희끗 보이는 적을 향해 아군 진지에서도 총알과 박격포를 퍼부었다.
강에 총알과 포탄이 떨어지며 물이 사방에서 솟구쳤다.
제기랄.
적은 전차를 도하시킬 방법을 생각해내기보다, 휴대성 좋은 야포로 생각을 전환해 둑에 올려 화력지원만을 위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을 건너기만 하면 머릿수로 밀어붙이겠다는 단순하면서도, 야만적인 작전이었다.
“조준 사격, 조준 사격을 해라! 당장 고개를 들고 조준 사격을 명령하게. 적은 흔들리는 배 위에 있네.”
물론,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진지 밖으로 눈을 내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만.
시야가 제한된 건, 적도 마찬가지였다.
물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진지에서 날아오는 총알에 더해 흔들리는 배 위에서 제대로 된 사격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설사 적이 상륙에 성공한다 해도, 적이 발을 내려놓는 곳은 아무런 엄폐물이 없는 허허벌판이다.
숨을 곳이 없는 평지에서 이미 구축된 진지를 향해 돌격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쾅!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때려 부수고 싶은 저 염병할 쇳덩이였다.
진지 곳곳에 흠을 내며 연대가 구축해놓은 방어선에 구멍을 내고 있었다.
“가까이 온 적부터 쏴라! 30분만 버텨라! 30분만 버티면 방어선을 지킬 수 있다.”
30분.
정확히는 해가 뜰 때까지만.
암울한 상황 속에서 기약 없는 전투는 사람으로 하여 절망을 느끼게 한다.
명확한 시간을 말해 작은 버팀목을 개개인에게 심어주었다.
-쾅!
근처에 포탄이 떨어짐과 동시에 작은 돌 부스러기가 잔뜩 튀어 올라 얼굴을 쓸어내렸다.
먼지가 잔뜩 들어찬 눈을 비빌 시간도 없이 가늠쇠에 눈을 갖다 댔다.
그 시간에 한 발이라도 더 쏘고, 더 죽여야 했다.
-끄아아악!
아군 진지에서도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점차 늘어났다.
다친 병력을 돌보거나, 쉴 시간은 방어선을 지키는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잠시 눈을 돌리는 찰나의 순간에도 적은 진지에 가까워질 테니까.
“좌측! 좌측에 집중사격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가며 병력을 지휘하는 건, 연대장인 나만이 아니었다.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할 것 없이 목이 터지게 지휘를 이어나갔다.
“연대장님,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강 건너에 있는 적 탱크에 의한 피해가 막심합니다.”
좌측을 맡았던 1대대장 김상옥 소령이었다.
먼발치 강 건너에서 그간 당했던 것을 복수라도 하듯, 포신이 녹아내릴 기세로 포를 쏴대고 있었다.
“30분이 지났군.”
전투가 시작된 지 30분이 넘어가면서, 한강은 이미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30분이면 연대는 전멸입니다! 전멸!”
“아닐세. 보게. 하늘 문이 열렸네.”
김상옥 소령이 답답한 듯 배에서 내리는 적을 향해 총알을 퍼부었다.
하늘 문이 열렸다.
실성해 던지는 농담이 아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우중충한 구름이 걷히고 그 사이로 해가 얼굴을 보였다.
해가 얼굴을 내밀자 물안개도 갈 곳을 잃은 듯 사라졌다.
“연대장님! 지금 미 전투기가 적 보병을 잠시나마 막는다고 해도···”
무스탕 전투기?
맞는 말이다.
전투기 편대가 모든 전장의 전세를 뒤집을 순 없는 노릇이다.
‘왔구나.’
하늘 문 사이로 보이는 건, 해만이 아니었다.
찬란한 은색 빛깔.
들어는 봤나?
B-29 폭격기라고.
버텨낸 아군에게 남은 일은, 무스탕 편대와 함께 날아온 B-29 폭격기가 이 지긋지긋한 빨간 저글링과 시저 탱크 위에 퍼붓는 폭격을 지켜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