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한강 방어선(3)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직접 보면서도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
1대대장 김상옥 소령은 이미 다 쏴버린 M1 소총 클립을 재장전하는 것도 잊은 모양이다.
“정신 차리게!”
[전장:30.17M 전폭:43.05M 전고:8.46M 엔진:라이트 듀플렉스 사이클론 복열 16기통 공랭식 4기]
B-29 폭격기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요새로 착각할 만큼 거대했다.
웅장하고 거대한 은빛 기체가 반사하는 햇빛은, 북한군에겐 인간 내면에 있는 극도의 공포감을.
국군에겐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어둠을 뚫고 하늘에서 내려온 한줄기 은총이었다.
적의 소련제 MIG-15기가 전장에 투입되기 전인 지금, B-29는 신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파괴의 신.
“쏴라! 가진 탄약을 전부 퍼부어도 좋다!”
미 공군 수송기가 일본에서 쉬지 않고 실어나른 군수물자 덕에, 소총과 같은 소화기의 탄약 보유량은 크게 모자람이 없었다.
-쾅! 쾅! 쾅! 쾅! 쾅!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B-29 폭격기 탄약창이 열리고, 9톤에 달하는 폭탄이 한강 이북 둑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운 비단이 수놓아지는 것만 같은 융단폭격이었다.
함께 온 머스탱 전투기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간신히 살아남아 강을 건넌 북한군과 공포에 질린 채 몸을 떨고 있는 적이 탄 배를 향해 기관포를 난사했다.
혼비백산.
서울에서 잠깐의 휴식도 없이, 물안개가 낀 틈을 타 나룻배를 모아 한강을 도하 하겠다는 북한군의 계획은, 아군 방어선이 순식간에 위태로워질 만한 큰 위협이었다.
내가 없었다면.
“때를 맞춰 공중 지원이 올 줄 알고 계셨던 겁니까?”
잠시 넋이 나갔던 김상옥 소령이 물어왔다.
탄창 클립을 능숙하게 꼽으며 적을 향해 사격하는 것을 보니,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사담은 전투가 끝난 후에 하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지상 병력만 가득 꾸려놓은 상황에, 예상치 못한 적 공중 병력이 나타났을 때 입에서 튀어나오는 무의식적인 말을.
아 씨발.
좆 됐네.
그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선택지는 몇 없다.
“살··· 살려 주시라요.”
그나마 상황판단이 빠른 북한군은, 사방에서 무기를 땅에 버린 채 두 손을 들어 투항 의사를 나타냈다.
“투항하는 자는 살려줘라!”
무기와 두 손을 들어 비무장 상태임을 명확하게 알린 북한군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전투의 전세가 이미 심하게 기울었음에도, 당연히 모든 적이 투항을 해오는 것은 아니었다.
“나머지는 모조리 죽여라.”
총성이 점차 잦아들었다.
강 건너에서 위협적으로 포를 쏴댔던 전차도, 어느새 검은 연기에 둘러싸여 잘 구워진 쇳덩이로 변해 있었다.
“연대장님, 대승입니다. 대승!”
강을 기습적으로 도하하려던 북한군 6사단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도주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무엇보다 적 203 기갑 연대의 전차 전력을 크게 붕괴시킨 점은, 앞으로의 방어선 전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포로들을 이송시키고, 주변을 수습한다!”
여기저기서 서로를 부둥켜 끌어안으며 전투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나 좋아하라며 나무랄 순 없었다.
‘지옥이 따로 없군.’
다만, 참혹한 주변을 보니 그들과 같이 환호를 지르며 웃을 순 없었다.
한강엔 강을 건너기도 전에 죽은 북한군 시체가 강을 뒤덮었다.
시체로부터 새어 나온 피와 분비물은, 단순한 피비린내 그 이상의 지독한 냄새를 풍겼다.
공포에 잠긴 채 바닥에 엎드려 손과 발이 묶인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포로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축이 분명하다.
포로가 됐건, 뭐가 됐건 살았으니까.
진지에 있던 병력 모두가 진지 밖으로 나와 포로를 이송시키고, 전후 수습을 시작했다.
“고생 많았네. 편히 가시게.”
진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아군 전사자의 명복을 비는 것과 동시에, 아직 채 감지 못한 눈을 조심스레 쓸어내려 감겨주었다.
***
미군 전방 지휘 연락단(ADCOM) 수원.
몸이 두 개, 아니 세 개로 쪼개 움직여도 모자랄 나를 누군가 수원으로 급히 불렀다.
이쯤 되면 동네 아저씨보다 자주 보는 것 같은데.
한국인지 미국인지 헷갈릴 정도로 미군이 가득한 이곳에 나를 부른 건 맥아더였다.
“바쁠 텐데 오느라 수고 많았네. 김포에서의 승전보는 보고 받았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령관님.”
맥아더가 나를 굳이 수원까지 부른 이유도 있겠지만, 나 역시 수원까지 행차한 이유가 있다.
이유를 서로 말하기에 앞서, 항상 그래왔듯 맥아더를 부드럽고 촉촉하게 만들어 주무를 생각이다.
“공군에게 보고받기로는 기상이 좋지 않아 정밀한 폭격이 어렵다고 판단하던 중 기상이 급격히 좋아졌다던데, 사실인가?”
애초에 B-29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는 방식이 정밀하고 정교하다기보단, 해당 지역을 쑥대밭으로 갈아 엎어버리는 방식에 가까웠지만, 기상의 영향을 받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습니다. 부대가 와해 될 순간에 놓였을 때 마치 하늘 문이 열린 것 같았습니다. 구름을 뚫고 보이는 머스탱 전투기와 B-29 폭격기가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맥아더를 구슬리기 위함도 있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 순간엔 그만한 천사도 없으니까.
‘반응이 슬슬 오는군.’
맥아더 사령관의 눈을 보니 슬슬 반응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네를 볼 때마다 정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군. 어찌 항상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 큰 전공을 올린단 말인가. 그분이 도와주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밖에.”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해야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들 때 포기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 나라를 지키려는 모든 군인의 마음이 저와 같지 않겠습니까.”
운?
절대 단순히 운이라는 짧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적의 기습을 예상하고 미군 전방 지휘 연락단에 공중 지원을 요청한 것도, 특공 연대를 김포에 주둔시킨 것도.
운이 아니다.
편하게 잠들거나 쉬지 못하고, 배불리 먹지 못 하는 건 물론 모두가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을 감내해 가며 빨갱이들과 공산세력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고 있다.
남아있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사령관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맥아더가 적당히 촉촉, 말랑해졌을 때 선수를 쳤다.
어차피 맥아더가 나를 부른 이유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말해보게. 자네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못 들어 줄 리가.”
“문득 이 전쟁의 끝이 어딘지,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을 38선 이북으로 쫓아낸들, 언제고 틈을 노려 이 땅을 집어삼키려 할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래서 여기선 우리 둘만 아는 특급 기밀 작전을 실행하고 있지 않은가.”
맥아더가 한쪽 눈썹과 눈을 찡긋 감았다.
으.
남자에게 받는 윙크는 정중히 사양이 아니라 그냥 사양이다.
“지금부터 한국에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세우면 어떨까 합니다.”
지금까지 맥아더에게 해왔던 부탁과는 괘를 조금 달리하는 부탁이었다.
미국이 현재 전쟁에 빨리 참전하고, 신속히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라는 교두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만든 군수물자가 배를 타고 오려면 적어도 한 달.
일본을 제외하면 그나마 가까운 교두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는 괌이나 필리핀?
멀어도 너무 멀다.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온 판국이었다면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수 있겠지만, 지금의 방어선을 지켜낸다는 전제가 있다면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제안이다.
“자네 말은 우리 미국이 한국에 군수품을 생산할 공장을 지어달라는 것인가?”
“공장을 지을 능력은 한국에도 있습니다. 제 말의 요지는 군수물자를 생산할 수 있는 전문 생산 인력이 한국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도 양심은 있다.
공장이나 지어달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미국이 선물해준 팻맨과 리틀보이, 두 방의 핵 맛을 본 일본은 간신히 숨만 헐떡이는 빈사 상태였다.
때마침 6.25 전쟁이 터져 일본이 병참기지 역할을 했고, 그로 인해 일본 경제는 쾌재와 환호성을 질러댔다.
우리가 전쟁할 동안, 꿀통에든 꿀을 모조리 빨아 먹은 형국.
한 번에 꿀통을 빼앗아 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야금야금 천천히 준비할 것이다.
꿀 빨아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꿀통을 만들 때까지.
“역시 자네라도 모든 방면에 뛰어난 것은 아닌가 보군. 우리 미국은 거의 모든 것에 자유롭지만, 외국에 군사 정보와 기술을 유출 시키는 것에 대해선 굉장히 보수적이라네. 내 맘대로 해도 된다면야 왜 못 들어 주겠냐 만, 국회에 말을 꺼내는 즉시 내 군복부터 벗기려 들것이야.”
당연한 소리다.
미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다.
“사령관님께 도움을 요청하려는 건, 미국이 아닙니다.”
뭔가 착각하는 게 있는 모양인데.
미국은 생각도 안 했다.
맥아더의 능력으로도 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미국이 아니면, 어디란 말인가?”
“일본입니다. 사령관님.”
물론 어디까지나 나 혼자지만, 내가 생각하는 맥아더의 국적은 3개다.
당연히 그가 태어난 미국.
그가 지키고 싶어하는 대한민국.
마지막으로 그가 쇼군으로 군림하는 일본.
일본이 병참기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지나며 양성된 전문 인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 상황에서 한국에 군수 공장을 세우기 위해 전문 인력을 파견해 달라는 공식적인 요청은 엿이나 바꿔먹으라며 비웃음거리가 될 테지만, 어디 세상의 모든 일이 공식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이던가?
공식적인 방법이 있으면, 비공식적인 방법도 있는 법이다.
암.
그렇고말고.
“그건 나라도 당장 답을 해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걸 자네도 알고 있을 것이네. 차차 생각해보지.”
맥아더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해줬더니 기어올라? 이런 느낌의 난처함이 아닌, 부탁을 들어주지 못함에서 나오는 미안한 표정에 가까웠다.
“물론입니다. 사령관님. 혹시 무례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장 확답을 받아내야 할 만큼 급한 일은 아니었다.
확답을 받았다 해도, 공장을 짓고 그 공장에서 작은 쇳덩이 하나가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무례는 무슨. 자네와 나 사이에.”
봐봐.
말하는 것 보면 한국인 다됐다니까?
-사령관님. 스미스 중령이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이런, 자네 말을 듣다 보니 자네를 부른 이유를 잊을 뻔했군. 들어오라고 전해주게.”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주일 미 육군 제24사단 예하 21연대 제1대대.
한국전쟁에 가장 빨리 상륙한 미 육군 부대.
스미스 부대 역시 전보다 빠르게 한국 땅을 밟았다.
‘하이 스미스. 반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