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한강 방어선(4)
“서로 인사들 나누게. 여기는 한국군 특공연대 연대장 이강산 중령.”
“반갑습니다. 이강산입니다.”
친절하게도 맥아더 사령관이 나와 스미스 중령을 소개했다.
소개를 마친 뒤 나오는 표정은 역시나 뿌듯함이었다.
“여기는 스미스 중령.”
“반갑습니다. 찰스 브래드포드 스미스입니다. 편하게 스미스라고 하시면 됩니다.”
가볍게 손을 맞잡는 악수로 서로에 대한 인사를 마쳤다.
일본에서 출발해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쉬지 않고 전방 지휘소 연락단까지 올라온 탓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자, 그럼 앉지.”
스미스 중령은 540명의 대대원, 제52 포병대대 소속 1개 포대와 함께 수송기를 타고 한국에 발을 디뎠다.
급히 편성되느라 정식 부대 명칭조차 받지 못하고, 나중에야 스미스 특임대라고 불렸다.
원래대로라면 스미스 특임대는 오산에서 북한군 4사단에 의해 쓰디쓴 참패를 맛볼 운명이었지만, 한강 방어선이 잘 버텨주고 있는 지금은 오산에서 임무를 수행할 필요가 없었다.
“자네 두 명 모두 바쁜 사람들인 것을 잘 아네만, 이곳까지 부른 이유가 있네. 아마 자네들은 뭔지 상상도 못 했겠지만···”
아니, 알 것 같다.
아마 내가 돌봐야 할 육아 리스트가 최신화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 본대가 상륙할 때까지만이라도,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1대대와 자네가 지휘하는 특공 연대가 서로 교류해 보는 건 어떻겠나. 두 사람 모두 베테랑이니 서로 체득한 전투 교리도 나눌 수 있고, 때에 따라선 한미 합동 작전도 펼칠 수 있을 걸세.”
“사령관님 말씀이라면, 영광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답을 선수 친 건 스미스 중령이었다.
“자네는 어떤가?”
두 명의 눈초리가 내게 다가왔다.
맥아더가 하는 부탁 아닌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순 없었다.
원활한 관계 유지를 위해서 상호 간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은 최대한 들어줄 생각이니까.
“물론입니다. 사령관님. 전장에서 양국 군인이 생사를 함께 나눌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거절할 수 없다면, 일단 대답부터 해야 했다.
모든 문제가 그렇듯, 맥아더의 의도만 보자면야 아주 좋다.
스미스 중령 역시 태평양 전쟁 과날카날 전투 때부터, 일본군과 싸운 전투 경험을 가진 베테랑이었고.
진짜 문제는 스미스 중령이 데려온 대대원 거의 전원이 전투 경험이 없는 1~2년 차 신병이었다.
‘그것까지도 괜찮은데. 후.’
게다가 연이은 승전국이라는 가슴 깊은 곳에 새겨진 자부심은 북한군이 자신들을 보기만 해도 도망갈 것이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사령관님. 급한 보고사항이 들어와 있습니다.”
통신 장교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영등포 지구에서 지원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북한군의 대규모 도하가 예상됩니다.”
“공군에 연락해 폭격 지원 요청하게.”
“사령관님. 이미 요청은 해둔 상태지만 비가 워낙 거세게 와 B-29 폭격기 출격을 장담할 순 없답니다.”
밖엔 거세고 굵은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신이 도와 비가 갑자기 멈추지 않는 이상, 이 정도 비라면 전투기, 폭격기 출격은 불가능하다.
수원에서 더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출동하겠습니다.”
전쟁은 크고 작은 전투의 연속이다.
쉴 틈이 없는 건 당연지사고.
주어지는 임무의 난이도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
수원에서 스미스 대대와 영등포로 출발하기 직전, 특공 연대 1대대장 김상옥 소령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귀관은 즉시 1대대를 이끌고 영등포 방어선으로 이동할 것.]
지난번 김포 전투에서 203 기갑 연대 전차 전력과 4사단 병력이 크게 와해 되었다고는 하나, 김포반도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한 곳이 아닌 동시다발적으로 기습 공격을 감행해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김포를 방어하기 위한 예비전력으로 2대대는 그대로 김포에, 1대대는 영등포를 방어하기 위해 이동을 명했다.
“52포병 대대가 가진 대전차 무기가 얼마나 됩니까?”
“105mm 곡사포 6문, 75mm 무반동포와 2.35인치 바주카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음. 염병할.
맥아더가 보낸 3.5인치 슈퍼바주카가 있었지만, 그럼 뭐해.
탄이 없는데.
지난번 축석령 전투에서 3개의 탄을 모두 소비한 뒤였다.
3.5인치 슈퍼바주카가 전선에 부족함없이 운용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대전차 고폭탄을 최대한 챙겨오긴 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스미스 중령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주 충분하다는 듯이.
“몇 발이나 됩니까?”
그의 말대로 대전차 고폭탄이 충분하다면, 수월하진 않겠지만 전차를 막아내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전제 조건은 어디까지나 충분하다면.
“12발입니다. 기존에 보유하던 양은 6발이었습니다. 2.35인치 바주카와 75mm 무반동포의 탄은 각 수십 발로 충분하니 문제없을 겁니다.”
이걸 코를 확 부러트려?
스미스 중령의 대답을 듣자마자 유명한 명언이 하나 떠올랐다.
‘누구나 다 그럴싸한 계획은 있지. 처맞기 전까진.’
2.35인치 바주카와 무반동포로는 적 전차를 파괴할 수 없다고 입 아프게 말해댔지만, 직접 쏴보기까진 모르는 모양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대전차탄을 두 배나 챙겨왔냐며 엉덩이를 토닥여줄 순 없었다.
“영등포에 도착하자마자 포대장을 만나봐야겠습니다.”
더 할 얘기가 없었다.
얘기해 봐야 내 입만 아프지.
어쩌면 쉽지 않은 전투가 아니라, 지금까지 해왔던 전투 중 가장 어려운 전투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등포에 도착하자마자 포대장을 만났다.
여전히 어두운 하늘은 비를 거세게 떨어트리고 있었다.
영등포에 심상치 않은 전운이 맴돌았다.
“포대장 밀러 오스본 페리입니다. 연대장님 활약상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보유하고 있는 대전차 고폭탄이 12발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서로 칭찬 릴레이나 하며 보낼 시간이 없다.
포대장 페리 중령을 구슬리거나,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해 줄 시간도 마찬가지.
지금 필요한 건, 단도직입적이고 단호한 조언이었다.
“가용 가능한 105mm 곡사포의 고각을 최대한 내려 영거리 사격을 준비하세요. 적 전차의 측면과 궤도를 노려야 합니다.”
“2.35인치 바주···”
페리 중령의 말이 시작됨과 동시에 끊었다.
안 들어도 느낌 아니까.
“만약! 제 말을 듣지 않아 후회할 일이 생긴다면, 그 후회는 살아서 할 순 없을 겁니다.”
페리 중령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돌아섰다.
스미스 부대에 강제로 명령할 권한은 없으니까.
-쾅!
뒤를 돌아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축이 울렸다.
번개가 친 후 들려오는 천둥소리이길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번개는 보이지 않았다.
“적 포탄 낙하!”
영등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적 포탄이 진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적도 사람이기에 그리 멍청하지만은 않았다.
거세게 내리는 비 탓에 항공 지원이 어려운 점을 파고든 것이다.
“교량에 부교를 연결하려는 놈들부터 쏴라! 절대 탱크가 도하 하게 놔둬선 안 된다!”
어김없이 적 탱크가 나타났다.
눈에 보이는 건 8대.
탱크를 총알 방패 삼아 숨어있던 북한군 공병들이 튀어나와 교량을 연결하기 위해 붙었다.
-쾅!
52포병 대대가 쏜 105mm 곡사포가 선두 탱크 2대에 명중하며 궤도를 끊어 멈춰 세웠다.
다행히 죽어서 땅을 치고 후회하고 싶진 않은 모양이었다.
“쏴라! 교량에 집중사격해!”
선두 탱크 2대가 포탄에 맞음과 동시에 그 주변에 있던 북한군 공병들은 조각조각이 되어 산화했다.
후속하는 T-34 탱크가 멈춰선 선두 탱크 바로 뒤에 가까이 붙었다.
영거리 사격으로 피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인 듯했다.
“제기랄.”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비와, 진지에 떨어지는 적의 포격.
북한군 보병이 쏴대는 총알 때문에 진지에서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쾅!
아군의 집중적인 사격으로 교량 위에 북한군의 시체가 작은 언덕이 되어 쌓였다.
북한군은 궤도가 끊어진 T-34, 심지어는 시체로 만들어진 작은 언덕을 엄폐물로 삼아 교량 연결을 멈추지 않았다.
지독한 새끼들.
영등포를 공격하는 3, 4사단 북한군 지휘부는 수십, 수백, 수천 명이 조각나 갈려 나가더라도 교량만 연결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항상 우리 편이 되어 주길 바랐던 시간은, 이번만큼은 아군의 편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량이 연결되어가고 있었다.
작은 언덕은, 어느새 산이라고 불러도 과장이 아닐 만큼 높아졌다.
“연대장님! 곧 교량이 연결될 것 같습니다. 교량을 통해 적 탱크가 넘어오면, 방어선을 지키는 건 무립니다.”
1대대장 김상옥 소령이 오른팔을 부여잡은 채 보고했다.
부여잡은 팔 주위에 빨간 피가 잔뜩 번져 있었다.
김상옥 소령의 보고는 틀리지 않았다.
교량 연결이 완료되는 순간, 뒤에 남아있는 6대의 탱크가 엄폐물 삼던 멈춰버린 선두 탱크와 시체를 그대로 밀어버리며 방어선을 붕괴시킬 것이다.
“교량이··· 연결된 것 같습니다. 후미에 있는 탱크들이 움직입니다.”
교량에서 목숨을 담보로 작업을 하던 북한군 공병들이 일제히 뒤로 후퇴했다.
여기서 방어선이 밀리면, 지금껏 버텨왔던 시간이 허무해져 버릴지도 몰랐다.
“연대장님! 후퇴명령을 내리셔야 합니다.”
아마도, 후퇴명령을 내려야 할 것 같다.
버텨왔던 시간이 허무해져 버리더라도, 현재 가용 가능한 화력으로는 탱크를 막을 수 없었으니까.
“전 병력···”
후퇴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아군 진지에서 교량을 향해 뛰쳐나가는 소규모 병력이 보였다.
눈동자에 스미는 비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몸에 무언가를 잔뜩 두른 채였다.
-두두두두두두두
T-34 탱크가 하부에서 기관총을 난사했다.
무언가를 잔뜩 두른 병사는 탱크에 도달하기 전, 기관총에 맞고 쓰러졌다.
-쿵!
마침내 후미에 있던 탱크들이 선두 탱크를 강 밑으로 밀어버린 채 전진을 시작했다.
시신 수습은 생각도 없다는 듯, 쌓여있던 시체 산을 그대로 밟고 넘었다.
생지옥에서도 보기 싫은 풍경.
“전원! 온 힘을 다해 교량에 있는 아군을 향해 엄호사격 개시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아군의 엄호사격으로 북한군의 총격이 잠시 주춤해졌을 찰나.
교량 위를 달리던 그들이 탱크 가까이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이내 모습이 사라졌다.
그들이 향한 곳은 T-34 탱크 밑부분.
당연히 탱크는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깔아뭉갰다.
탱크 밑에 깔린 병사는 미명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즉사했을 것이다.
-쾅!
몸에 잔뜩 둘렀던 TNT와 수류탄이 터지며 또다시 북한군 탱크를 멈춰 세웠다.
-쾅! 쾅!
엄폐물로 삼았던 선두 탱크가 치워지자, 52 포병대대가 다시 대전차 고폭탄 사격을 시작했다.
명중.
“전원! 사격개시!”
당연히 교량 위를 맨몸으로 달려나가 탱크 밑으로 들어간 그들의 이름이나 계급을 알지도 못했다.
다만, 그들이 탱크 밑에 들어가기 직전 외친 외침이 나에게 빗소리를 뚫고 정확히 들렸다.
“대한민국 만세.”
이 방어선은 그들이 그렇게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