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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44화 (44/149)

44화. 흔적

조용했다.

천둥 치듯 사방에서 터져대던 적의 포성도, 바람 찢는 소리를 내며 날아다니던 총성도 들리지 않았다.

유일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진지를 보수하며 야전 삽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 시신을 수습하려 분주히 움직이는 아군의 군화 소리였다.

“연대장님. 참으로 처절한 전투였습니다. 한국군의 숭고한 희생과 훌륭한 지휘가 없었다면, 우리 미군의 피해도 막심했을 겁니다.”

전투가 끝난 후 스미스 중령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덕분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훌륭한 지휘는 없었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 이 방어선을 지켜 준 훌륭한 용사들만 있었을 뿐입니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급조한 폭발물을 몸에 주렁주렁 매단 채 탱크 밑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주저 없이 탱크 밑으로 몸을 내던지는 것은, 어떤 용기와 마음가짐이었는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후···”

무언가라도 수습할 것이 있을까? 라는 생각에 고철로 변해버린 T-34 탱크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남긴 흔적이라고는, 이들의 용맹 무쌍함을 기억하는 남은 자들의 마음뿐이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희생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이번 전투를 통해 느꼈겠지만, 미군이 현재 보유한 대전차 화기로는 적 탱크를 막아낼 수 없습니다. 추가적인 무기지원과, 병력에 대한 지원이 절실합니다.”

“안 그래도 지금 즉시 상급 부대에 추가 지원을 요청할 계획입니다. 사실 조금은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님은 깨달았습니다.”

가장 복잡하게 꼬여있던 문제의 실마리가 점점 풀릴 기미를 보였다.

과거 미국이 파격적인 규모의 추가 병력을 대한민국에 파병한 것은, 스미스 부대의 처참한 패배와 딘 소장이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힌 사건이 발단이었다.

지금 방어선에 전선이 고착되고,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는 미군이 연일 승전보를 전한다면, 미국이 추가 지원에 인색하게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미군이 전투에 패배하길 바라거나, 딘 소장을 포로로 바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지금까지만 보자면, 가장 이상적인 상황과 근접했다.

전투에 승리해 방어선을 지켜내면서도, 미군 스스로가 안일함을 자각하고 추가 지원을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것.

“슬슬 날이 개는군.”

거뭇한 먹구름이 점점 옅어 지면서 비도 그칠 기미를 보였다.

비가 멈추고 시야가 확보되면, 다시 공중 지원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방어선은 더 견고해지고 있었다.

***

미국 워싱턴.

트루먼 대통령이 양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두통을 가시게 하기 위해 관자놀이를 꽉 누르고있음에도, 머리가 여전히 지끈거렸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꼴인지···주일 미군의 지상 병력과 해군, 공군 전력이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죄송합니다. 맥아더 사령관과 미 24사단이 해온 보고에 따르면, 적의 장비나 훈련 상태가   우리 미군보다 나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파병 계획을 조금 수정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최선의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질문에 답을 하는 사람은 미 국무 장관 애치슨이었다.

애치슨이 죄송스럽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고개 들고 말하게.”

“한국 전쟁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너무 뜨겁습니다. 일부 언론은 미국을 대신해 소련과 싸우는 민주주의 투사들의 나라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습니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작지만 단단한 나라 한국]

[파견된 미 24사단 소속 부대가 전해온 한국전쟁 이야기-탱크와 함께 산화한 한국 군인들]

언론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연일 한국전쟁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그 선두에는 UP 통신이 자리했다.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한국에서 일어난 전투의 경과를 몇 시간만 지나면 신문지에 인쇄해 뿌려댔다.

“국회에서는 공화당 매카시 의원이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한국에 대규모 파병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조지프 매카시.

한때는 위스콘신 주를 대표하는 햇병아리 초선 상원의원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정치적 거물이 될 방법으로 극렬한 반공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맞붙은 격의 한국전쟁은 그런 그에게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여론과 국민의 반응은 어떤가?”

“그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번 한국전쟁이 발발함으로서 속 안에 내재되어있던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공포심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 같습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을 건국한 것에 이어, 소련의 원자폭탄 실험까지.

그로 인해 현재 미국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이 만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매카시 의원은 이런 시국을 아주 잘 이용해 먹을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아주 골치 아픈 문제가 되겠어. 파병 규모 논의는 그를 만난 뒤 하도록 하지.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지?”

가볍게 넘어갈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대통령 역시 정치인, 여론과 민심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정치인은 없다.

‘그’를 만난 뒤, 애치슨 국무 장관과 파병에 대한 논의를 마저 하기로 했다.

“두시간 내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군 내부에 최대한 입 단속을 하라고 지시 했습니다만, 그리 오래가진 못할겁니다. 이 일까지 언론에 알려진다면,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난처해 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에서 돌아온 미 공군 화물기에, 선적 목록에 없는 살아있는 화물이 들어있었다.

한국 정부와 맥아더 사령관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 요청을 수차례 보냈지만,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단 말이야. 어찌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군용 화물에 섞여 미국에 들어올 생각을 했는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한국 대통령을 발견한 즉시 이곳으로 데려오고 있다는 겁니다. 만약 그가 매카시 의원이나, 다른 공화당 의원들을 만나 언론에 바로 노출되기라도 했다면···”

애치슨 국무 장관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해탈한듯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우리끼리 이런 걱정을 한들, 뭐하겠는가. 자네는 내가 대통령을 만나는 동안, 한국 상황을  더 냉정하고 냉철하게 파악해 보고를 올리게. 소련이나 중공 그 놈들이 참전할 가능성까지 생각해서 말일세.”

“알겠습니다. 서둘러 준비하겠습니다.”

애치슨이 대답을 마치자마자 급히 문을 열고 나갔다.

소련이나 중국이 한반도에 참전한다면, 한국전쟁은 더 이상 남한과 북한의 싸움이 아니라 공산 진영과 그에 맞서는 국가들의 싸움으로 번져 제 3차 세계대전으로 커져도 전혀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3차 세계대전 가능성의 싹이 보인다면, 싹이 틔워지기 전에 깔끔히 잘라내는 것이 가장 정답에 가까울 터.

트루먼이 전화기를 들었다.

“조금 쉬고 있을 테니 그가 도착하면 깨우게.”

전쟁이 발발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편히 잔 적이 없었다.

“이 능구렁이 같은···”

굳이 대통령이 목숨걸고 화물칸에 몰래 타, 미국까지 온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정확히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찌들지 않은 맑은 정신은 필수였다.

조용히 눈을 붙이기로 마음 먹었다.

세계 최강의 국력을 보유한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절대 편하거나, 쉬운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

한강 이남 영등포 방어선.

“어디 깨지거나 파손된 곳 없이 배송이 잘 갔으려나.”

이쯤 되면 나와 맥아더가 보낸 깜짝 선물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언제 비가 쏟아졌냐는 듯,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융단 폭격의 매서운 맛을 본 북한군은, 날씨가 맑을 땐 공격을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스미스 대대에 이어 미 24사단 전투 연대 병력들이 부산에 도착하는 즉시, 한강 방어선으로 보내져 방어 전력을 강화했다.

그 결과, 방어선 어디 하나 약점이 되는 곳 없이 고른 전력을 지닐 수 있었다.

‘한숨 돌릴 수 있겠군. 얼마 못가겠지만.’

지극히 방어적 관점에서 한강 방어선을 지켜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원래의 국토 실지를 회복한 것도 아니었다.

“연대장님, 혹 무슨 다른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전투가 끝난 뒤로도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김상옥 소령이었다.

아무래도, 내 팬클럽이 한 명 더 늘어버린 모양이다.

“별 일 아니네.”

근심?

지금 잠깐이야 조용하다 해도, 앞으로 해야할 근심이야 차고 넘친다.

이 몸의 어깨를 짓누르는 온갖 근심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 누가 알까.

“제가 연대장님을 모시게 된 이후로, 편히 쉬시는 걸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막사에서 조금 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연대장님 없는 특공 연대는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괜한 오지랖이었다면 죄송합니다.”

뭐, 오지랖이라고 할 것 까지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걱정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쉬지 못한 건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잘 챙길 테니, 걱정말게.”

전투가 끝난 뒤, 비교적 편히 쉴 시간이 없진 않았다.

다만, 지금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진, 편히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현재 북한군의 상황은 매우 좋지 못했다.

이전에 수립해 놓은 작전 계획은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할 종이 쪼가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까.

소련 그리고 중공군.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은 북한 김일성이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바짓가랑이는 소련과 중국뿐이다.

소련은 아직은 직접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미 북한의 군사 고문, 만주에 있는 북한 비행 학교에서 조종사 양성에 기여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내가 짜 준 계획대로 잘 움직이기만 한다면, 미국의 추가 파병과 지원은 그리 걱정할 거리가 아니었다.

‘이 새끼들이 참전하면 언제, 어떻게 할 건 지가 관건인데···’

정확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반드시 예상, 예측하고 있어야 할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지금처럼 국내, 해외의 지지를 받는다면 성공적인 북진은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그 방법 뿐인가?”

과거에 소련군과 중공군이 북한군으로 위장해 전쟁에 투입된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특히 작전에 투입된 소련군 조종사들 통신을 감청해 소련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전쟁의 확산을 우려한 미국과 UN군이 애써 못 본 척, 못 들은 척 했을 뿐이지.

‘이거면 적당히 충분하겠어.’

세상만사 모든 일에 ‘적당히’ 가 가장 어려운 법.

내 머릿속엔 적당하면서도 충분한 방법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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