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반격의 서막(2)
조금은 착잡하면서도,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내뱉듯 단호해 보이기도 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우리 미합중국과 시민 여러분께선.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관심이 뜨겁습니다. 북한이 대한민국에 행한 이러한 공격은, 공산주의 국가가 독립된 국가를 정복하기 위해 체제전복이라는 소극적 수단을 넘어, 무장침략과 전쟁이라는 수단을 거리낌 없이 사용할 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숙한 가운데, 사람이 내는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쉴새 없이 찰칵대는 카메라 셔터음이 섞여 들릴 뿐이었다.
“저 트루먼은, 이 전쟁의 심각성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침공과 도전에 강경한 모습으로 대응하고 차단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 서방을 얕잡아 보고 무시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과 연합군은 UN의 헌장 아래 지원군을 대한민국에 파병하였습니다.”
아직까진, 기자들을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기자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끌어내기엔 더없이 충분했다.
고작 재방송이나 하기 위해 자신들을 이 자리에 불러 모으진 않았을 테니까.
트루먼은 지금까진 단상에 놓인 연설문을 보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연설을 이어왔다.
이젠 연설문을 볼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똑바로 들어 보였다.
“얼마 전, 우리 군은 전쟁의 양상이 바뀔만한 새로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군 작전과 기밀상, 지금 당장 정확한 정보를 시민 여러분께 공개할 순 없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말씀드릴 것입니다.”
곳곳에서 작은 옹알이가 시작됐다.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작은 옹알이는,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웅성거림으로 번지고 있었다.
“미합중국은 공산주의가 우리들의 소중한 안방까지 밀고 들어 올 때까지, 절대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야욕을 한반도에서 막아낼 것입니다.”
트루먼이 연설이 끝났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자, 참아왔던 기자들의 목청이 터져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장내에 쏟아졌다.
-그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이 대체 누굽니까! 북한을 제외한 다른 침략 세력이 있다는 겁니까? 소련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 연설문이 자칫 세계 3차대전의 선전포고처럼 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언제 언론에 제공될 예정인가요!
수도 없는 질문이 쏟아졌지만, 말투와 억양이 조금씩 다를 뿐 큰 맥락은 비슷비슷했다.
“아! 하나 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뒤돌았던 트루먼이 다시 단상에 돌아와 마이크를 잡았다.
“미국은 계속해서 법치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이 나라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 순간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미친 듯이 카메라 셔터음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
대한민국 육군 본부.
트루먼 대통령의 미군 추가 파병을 암시한 연설문은, 이내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나를 소환했다.
“반갑네. 자네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네.”
단정하게 뒤로 빗어넘긴 머리에 짙은 눈썹과 또렷한 눈.
강단 있어 보이는 외모를 가진 남자가 손을 건넸다.
김홍일 총참모장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앉지.”
지금 나를 육본에 불러 앉힌 이유는 알고 있다.
앞으로의 국군 작전 계획을 논하고 싶었다면, 내가 아니라 1군단장, 2군단장이 여기 앉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미군과의 협력, 지휘체계와 같은 문제들의 물꼬를 어떻게 틀 것인가에 대한 고민.
그 고민에 대한 조언을 얻고 싶어 부른 것일 확률이 높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맥아더 사령관과 가장 친한 한국인을 꼽으라면 나일 테니까.
여기가 학교였다면 원활한 교우관계를 위한 청탁을 받는 자리 정도?
딱 그쯤이다.
“자네도 이미 들었을진 모르겠지만, 미 8 야전군 사령부와 1군단 예하 부대들이 우선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올 걸세.”
이 정도 규모의 미군이 한 번에 한국에 전개되는 건, 한강 방어선도 뚫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북한군에겐 그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아주 좋은 소식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내가 이야기를 주도하는 것보다, 김홍일 총참모장이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내 계획을 상황에 맞춰 잘 융화시킬 테니까.
“개전 전부터 지금까지. 소대장으로 시작해 지금 자리에 올라와 있다고 들었네. 아무리 전시임을 고려하더라도 대단한 일이지. 자네는 앞으로 이 전쟁을 어떻게 보는가?”
내 예상이 틀린 걸까?
미군과 원활한 교우관계를 위한 매개체가 필요해 불렀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과거 김홍일 장군이 1군단장에서 육군 종합 학교장으로 전보된 이유도 미군과의 의사소통 문제였으니까.
‘좋은 기회다.’
총참모장이 이 전쟁의 끝을 어디로 보고 있는지 슬쩍 떠볼 기회가 온 것이나 다름없다.
“조금 더 전열을 가다듬는다면, 서울을 수복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무슨 도박이나 놀이를 해도, 한 번에 자기 패를 다 까는 멍청이는 없다.
하나, 하나.
차근차근 패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밤낮을 모르고 끝없이 쏟아부을 것만 같던 포격이 조금씩 잠잠해 지고 있다고 들었네. 미 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북한군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증거지.”
김홍일 총참모장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 패를 천천히 내보이고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쉬운 상대일 리 없다.
자, 그럼 이건?
“제 생각엔, 미국이 약속한 지원에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면, 큰 피해 없이 38선 이남 실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다른 외부 개입이 없다는 전제하에 말입니다.”
정말 딱 38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국군과 연합군이 전쟁 전 그어놓았던 선까지만 북진한다면, 중공군과 소련이 전면적으로 참전할 그 어떤 개입 명분도 주지 않는다.
진짜 패를 서로 보이는 순간은, 지금부터다.
“사람 애달프게 말하는 재주까지 있는 줄은 몰랐군. 좋아. 내가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 국군이 어디까지 북진해야 할 것인가. 그게 앞으로 수립할 거의 모든 작전의 뼈대가 될 걸세. 자네 말대로 실지를 회복하는 건, 당연한 일에 불과하네.”
김홍일 총참모장이 결정이 쉽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결정이 쉽지 않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
이 결정을 하기 위해선, 수많은 나라가 엮인 외교와 이해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기본.
변하는 상황에 흘러가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올바른 대응을 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38선을 넘길 원하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소련과 중국, 미국도 전쟁의 확산을 원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네 말은, 실지를 회복하는 데서 그치자는 말인가?”
항상 한국말은 끝까지.
입을 꽉 다문 채, 고개를 저었다.
“이미 거하게 한 대 얻어맞은 판에, 옆에 있는 친구가 말린다고 차오른 화가 쉽게 내려갈 리가 있겠습니까. 다시는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밟아 놔야 직성이 풀리겠죠.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선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총참모장이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만 싸운다면 모르겠지만, 주변에 친구들이 달라붙어 패싸움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애석하게도, 이 싸움은 이미 패싸움이 되어 버렸습니다. 참모장님.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미리 중공군 참전에 대비하는 것입니다.”
북한 수뇌부가 5세 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면, 미국이 추가 지원을 선포한 지금 소련, 중국을 향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을 것이다.
제발 살려달라고.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지원요청을 모르쇠로 일관하면 아주 좋겠지만, 지리적 특성상 소련은 몰라도 중국은 절대 거절할 수가 없다.
원수와 살을 맞대는 것은, 그 누구도 싫어할 테니까.
“중공군이라··· 만만치 않은 놈들이지.”
중공군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김홍일 총참모장.
국공내전 당시 장개석의 군대를 직접 지휘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미국과 연합국이 우리 뒤를 봐준다고 해도, 소련과 중국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건, 총참모장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한민국이 강대국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자네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고민이 더 많아지는군.”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계속하게. 고민과 고통 없이는 성장할 수 없는 법이지. 사람이든, 나라든.”
그럼 그렇지.
세계정세를 이렇게 잘 꿰뚫고 있는 부하의 말을 끊는 것도, 미덕은 아니지.
“세계 3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전쟁이 최악으로 치닫는다면,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손을 놓아버릴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성립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기도 힘든 마당에, 영원한 우방이 있을까?
영원한 우방이 존재한다면, 우리도 그 우방에 꼭 필요한 존재여야만 한다.
“가타부타할 것 없이 모두 옳은 소리일세. 자네 말을 듣고 나니 조금씩 가닥이 잡히는 것 같군.”
김홍일 총참모장이 어떤 가닥을 잡았는지 직접 적으로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질문이 있다.
“겨울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겨울.
아직 한여름에 월동준비가 무슨 말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의 계획을 확인할 수 있다.
국군이 38선까지만 북진을 계획하고 준비한다면, 월동준비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겨울이 오기 전, 전쟁은 끝날 테니까.
38선을 넘을 계획을 하고 있다면?
승리를 위해선, 지금부터 미리 월동준비를 해둬야 한다.
“추위를 견디며 싸우는 것만큼 서글픈 일도 없지. 월동 물자와 계획은 내 직접 차근차근 준비하도록 하겠네.”
김홍일 총참모장의 계획을 확인한 순간, 그 말이 마치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태산보다 높게 쌓여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참모장님.”
“자네 말이야.”
긴 시간 서로 대화를 나눴음에도, 아직 할 말이 남은 모양이다.
“미군을 구슬려 친하게 지낸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탐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네. 오늘 자네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알겠군. 왜 그들이 자네와 친하게 어울리고 자네 말에 귀담는지.”
음.
팬클럽 운영진 자리는 이미 꽉 차 있지만, 총참모장 정도라면 한 자리 늘리는 건 일도 아니지.
웰컴.
“좋게 봐주셔서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훌륭한 부하를 둬 기쁘군. 자네 그릇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말인데··· 곧 있을 서울 탈환 작전에 자네와 특공 연대가 선봉에 서면 어떻겠나. 의미 있는 일이 될걸세.”
그런 부탁이라면 환영이다.
서울뿐만 아니라, 평양, 압록강.
혹은 그 너머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