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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49화 (49/149)

49화. 104고지

“제발 연대장님을 만나게 해 주십쇼! 연대장님! 아악!”

멀리서 애절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나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저 친구인가? 데려와.”

“연대장님. 그래도 보고체계라는 게··· 하, 저 친구가 정말”

보고체계? 물론 중요하지.

이건 만나줘야 한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다만, 안 만나줬다간 저 친구 가슴엔 천추의 한이 새겨질 테니까.

“연대장님! 제발 제 말을 한 번만 들어 주십쇼. 제발 부탁드립니다.”

일면식이 없는 처음 보는 일병이었다.

아무리 부대원에게 최대한 신경을 쓴다곤 하지만, 부대원이 수시로 충원되고, 1000명이 넘는 연대원 모두를 알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쓴 철모엔 일병 계급장이 그려져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빠르게 말하게. 다만, 다음번엔 이렇게 보고체계를 뛰어넘는 행동은 삼가도록 해.”

나를 직접 만나려는 일병을 제지했던 장교에겐 아무 잘못도 없었다.

정해진 보고체계에 따라 보고를 했을 뿐.

이런 행동을 삼가라는 말로 혹여나 무안해할지 모를 장교의 체면을 살려 주고, 일병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대장님.”

일병이 자신의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저는 종로에서 구두 닦던 이진태··· 이진태 일병이라고 합니다.”

이진태?

왜인지 모르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익숙한 이름이었다.

“제 동생이 같은 부대에 있습니다. 이놈은 몸이 안 좋아 총도 제대로 못 쏩니다. 천식에 기흉 까지··· 학교에서 공부만 했던 샌님이 저 악랄한 빨갱이 새끼들을 상대로 싸울 수나 있겠습니까? 제발··· 동생 놈을 집에 돌려보내 주십쇼. 연대장님.”

사연도 어디서 들어본 것만 같은 익숙한 사연인데?

“자네 동생 이름이 뭔가?”

“진석이, 이진석입니다. 1대대 2중대 2소대에 제 동생이 있습니다. 동생만 집에 돌려 보내주신다면, 빨갱이 탱크를 껴안고 자폭을 하라면 하고, 총알받이를 하라면 얼마든 하겠습니다. 제발···”

마치 영화에서 본듯한 이름과 사연에 익숙함이 느껴졌던 모양이다.

지금 대한민국엔, 많은 이진태와 이진석이 있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군에 있거나, 이들처럼 형제, 나이 어린 학도병들까지.

그런 아버지와 형 모두가 이진태 일병과 같은 마음일 것이다.

아들과 동생을 이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

“이진태 일병. 여기··· 이 훈장 보이나?”

군복 상의 왼쪽에 달아놓은 을지무공훈장을 가리켰다.

“그 훈장이면 진석이를 집에 보낼 수 있는 겁니까?”

“아니, 불가능하네.”

모든 이진태와 이진석이 가족이 있는 집에 돌아가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런 훈장은 그 방법이 아니었다.

혹시나 이진태 일병이 훈장이나 공적에 대한 집착을 키울까 하는 마음에 건넨 말이었다.

지금도 훌륭하겠지만, 이진태 일병이 더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도록 말을 이어나갔다.

“동생과 함께 전쟁터에 나와 있는 마음은 백번이라도 이해하네. 내가 자네 동생을 직접 만나보진 못했지만, 이렇게 훌륭한 형을 뒀으니 그 동생 또한 훌륭할 테지. 이런 생각이 드는군. 자네 동생은 결코 자네 생각만큼 약하지 않다네.”

“연대장님, 제 동생은 어릴 적부터 몸이···”

“그만.”

목소리에 힘을 주어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 동생을 소집해제 시켜주겠다는 못 지킬지 모를 약속은 연대장으로서 할 수 없네. 다만, 여기 있는 모두가 각자의 사연을 가슴에 새긴 채 하루하루 버티고 있지. 자네 동생이 집에 돌아갈 방법은, 모두가 집에 돌아가는 방법과 다르지 않네.”

전쟁터에 있는 군인이 모두 집에 돌아가는 법.

전쟁을 끝내는 방법뿐이다.

“자네에게 이 하나만은 약속하겠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한, 이 나라를 지켜내고 자네와 자네 동생뿐 아니라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네.”

진심엔 하늘도 감동하는 법이다.

하물며 내 진심은 미세한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순도 100% 진심이다.

좌절하며 고개를 떨어트린 이진태 일병에게 손을 건넸다.

“그래도 내가 못 미덥다면, 직접 동생을 지켜주게. 자넨 형이지 않은가.”

“예! 연대장님. 무례를 용서해 주십쇼.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눈물을 잔뜩 머금은 이진태 일병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무엇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건진 알 수 없다.

나라를 위해? 동생을 위해?

다 상관없다.

다짐한 이 순간부터 이진태 일병의 마음은 그 어떤 시련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너무 늦었네. 출발하지.”

뒤돌아서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번엔 구두를 꼭 완성 시켜서 장가보내라.’

내 가슴이 먹먹해 오는 건, 나노봇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

한미 연합군 전방 진지. 서울 북서쪽 외곽, 신촌.

신촌 인근에 도착할 때까지 패주하고 도망치던 북한군과의 소규모 교전이 간혹 있었을 뿐, 큰 특이사항은 없었다.

미 해병대와 특공 연대, 국군 해병대가 모두 도하에 성공하자, 새로운 임무가 하달됐다.

미 해병 1연대와 국군 해병 2대대는 시가지를 거쳐 미아리 고개로.

미 해병 7연대와 국군 해병 5대대는 북쪽 높은 고지를.

특공 연대와 미 해병 5연대는 시가지를 거쳐 중앙청을 점령하라는 명령이었다.

“작전 구역을 어떻게 나누면 좋겠소? 이강산 중령.”

미 해병 5연대장 머리 대령이 물어왔다.

도하 작전이 인상 깊었는지, 나와 국군을 대하는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미 해병 3대대가 좌전방에서 백련산 일대를, 미 해병 1대대가 우전방에서 68번 고지를. 특공 연대와 한국군 해병 1대대가 중앙에서 104고지 탈환하는 계획이 좋겠습니다.”

미군이 아닌 국군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으려면, 중앙에서 104고지를 점령해야 했다.

“좋소. 한국군이 중앙에서 작전을 전개하는데, 불만 있나?”

“없습니다.”

가장 먼저 토머스 중령이 고개를 저었다.

불만?

자네는 양심이 콩알만큼이라도 있다면, 그런 건 있으면 안 되지.

“좋네. 그럼 한국군이 중앙을 맡게. 이상! 각자 부대로 돌아가 명령 하달하도록.”

작전 구역을 정하는 회의는, 얼마 걸리지 않고 금방 끝이 났다.

사실, 양심을 떠나 중앙을 맡겠다는 말에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백련산, 68번 고지를 점령하는 것보다, 104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몇 배는 어려웠다.

104고지를 탈환하려면, 아무런 엄폐물이 없는 300M가량의 개활지를 극복해야만 하니까.

“우리 특공 연대와 해병 1대대는 작전 구역 중앙에 배치되어 104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예상되는 적 규모는 1개 보병연대, 서울 치안연대로 추측된다.”

부대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곧바로 두 번째 작전 회의가 시작됐다.

함께 작전을 수행할 1대대장과 2대대장, 해병대 1대대장 공정식 소령과 함께였다.

“연대장님, 이번엔 우리 해병대에게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단번에 고지를 점령해 보이겠습니다.”

공정식 소령이 자신 있다는 듯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작전에 가장 위험요소가 무엇인지 알고 있나?”

연합작전의 특성상, 특공 연대가 모든 작전의 중심에 설 순 없었다.

다른 부대들을 뒤로 밀어놓는다면, 내부에서 불만이 슬금슬금 자라날 테니까.

“아무래도 엄폐물이 없는 개활지가 아니겠습니까. 개활지를 최대한 빨리 극복하는 것이··· 고지탈환의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좋네. 이번 104고지 정면은 해병대 1대대가, 좌측은 특공 1대대, 우측은 특공 2대대가 맡는다.”

“감사합니다. 연대장님.”

공정식 소령에게 개활지를 극복할 방법을 알고 있냐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실 엄폐물이 없는 개활지는 전투에서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지형.

극복이 가능하다기보단, 최대한 효율적으로 돌파한다는 말이 정확하다.

이 자리에 모인 대대장 중, 그 효율적인 방법을 알고 있는 대대장은 없었다.

“해병대가 작전의 주역이 되는 건 좋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두게. 1대대장, 2대대장, 자네들도 마찬가지야.”

대대장은 몰랐지만, 연대장인 나도 모르라는 법은 없지.

현대판 야전교범에 나오는 개활지 극복법을 이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다.

“개활지에 있는 적 방어선을 효율적으로 뚫기 위해선, 부대 대형이 가장 중요하네. 가장 많이 사용하는 횡대 대형은 적보다 수적 우위에 있다면 적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지 모르나, 대대장 자네 맘처럼 통제가 쉽지 않을 것이네.”

모두가 내 입을 뚫을 듯 쳐다봤다.

그 누구도 단 한 마디라도 흘려들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각 중대를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하고, 화력을 담당할 기관총 사수들은 각 삼각형 측면에 배치하게. 사격 기회가 가장 많이 주어지는 건, 정면이 아니라 오히려 측면이니. 알겠나?”

아무런 피해 없이 개활지를 건너 고지를 탈환하겠다는 건, 지나친 욕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가 알려준 전술 대형이 날아오는 총알을 빗겨 가게 할 순 없지만, 피해를 줄이는데 분명한 도움이 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반드시 104고지를 탈환해 서울 탈환 선봉에 앞장서겠습니다.”

“작전 개시일은 내일 07시. 중대장, 소대장들이 대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하게. 이상!”

내일은 꽤 고단한 하루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 언젠 안 그랬냐 만은.’

***

오전 07시.

어김없이 뜨는 해는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계획대로 해병 1대대와 특공 연대가 104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우리 1대대와 2대대는 해병 1대대가 고지를 수월하게 탈환할 수 있도록, 측면에 배치된 적 자동 화기 진지를 제압한다. 가자!”

북가좌동과 남가좌동 일대를 약속한 대형으로 통과해나가고 있었다.

다행히 이곳을 관통하는 하천인 불광천을 지날 때까지, 북한군의 저항은 없었다.

불광천을 건너 모래내에 들어서자 전답들이 즐비하게 이어졌다.

개활지의 시작이었다.

“전원! 돌격 개시!”

돌격 명령과 함께 부대원들이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북한군 기관총 진지에서 콩 볶는 소리가 쏟아졌다.

적은 미리 구축해 놓은 엄폐물과 지형지물을 이용해 아군에게 사격을 해왔다.

“우측 토치카부터 처리해!”

예상했던 대로 가장 골치 아픈 건, 자동 화기 진지였다.

명령을 들은 소대장이 자신의 소대를 이끌고 자동 화기 진지 옆을 우회했다.

-쾅!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적 토치카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우회해 돌격한 소대가 토치카를 무력화한 모양이다.

“전원 착검!”

대검을 총구 앞에 꽂아 넣었다.

거침없는 아군의 돌격과 준비된 전술 대형에 적의 강렬했던 저항선과 자동 화기 진지들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군에겐 엄폐물이 없는 개활지 특성상 먼 거리 사격보다, 적 진지에 돌격해 적을 격멸하는 것이 나은 판단이었다.

“죽어! 다 죽으라! 이 국방군 개새끼들아!”

진지에 다다르자, 진지 안에 숨어 연신 방아쇠를 당기는 북한군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질러대는 욕이 온전히 들릴 정도였다.

-퍽!

욕을 내뱉으며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북한군의 머리를 그대로 발로 찼다.

북한군이 그대로 나동그라지며, 총을 놓쳤다.

“이··· 이런 간나 새···”

말을 끝까지 잇진 못했다.

총구 끝에 착검 된 대검을 그의 가슴에 우겨 박았다.

으드득. 으득!

칼이 뼈와 장기를 부수며 파고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온몸이 순간적으로 부르르 떨렸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주저 없이 빨갱이 가슴에 칼을 쑤셔 박아라!”

104고지 전투는 처절하고도, 처절한, 진지 내 백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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