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연희고지
북한군이 고지를 버리고 후퇴했을 땐, 이미 고지에 올라있는 모두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시간을 보니, 4시간이 넘는 혈투를 벌인 모양이다.
“괜찮은가?”
옆에 누가 있는지, 누가 있었는지 제대로 기억하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아군과 적군이 정신없이 뒤엉킨 가운데, 구별할 방법이라고는 군복이 전부였다.
이젠 시체가 되어버린 북한군의 가슴팍에서 대검을 뽑는 병사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어디 몸에 구멍 난 곳도 없는 것 같고, 숨도 멀쩡하게 쉬어지는 것으로 봐선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설마 이 난리 속에 연대장님이 제 옆에 계신 걸 보니까 이미 제가 죽은 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가 피 묻은 손으로 몸 구석구석을 쓸어보며 말했다.
“뺨이나 꼬집어 봐라. 아픈지, 안 아픈지.”
“악! 아픕니다.”
자기 뺨을 세게 꼬집는 시늉을 하더니, 너스레를 떨어왔다.
“그럼 살아있는 거겠지. 수고 많았다.”
“연대장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뭐가 그토록 감사한지는 묻지 않았다.
뭐···
한 발자국 걸으면 북한군 시체가 발에 치이는 이 진지 안에서 같이 나뒹굴어서?
“적이 언제 다시 고지를 기습해올지 모른다! 1대대는 주변에 대한 철저한 경계를, 남은 2대대, 해병 1대대는 진지를 빠르게 재구축한다.”
하긴, 생각해보면 연대장이 진지 안에서 피를 뒤집어쓴 채 명령을 내리는 게 정상, 비정상을 떠나 보편적이진 않으니까.
작전지 후방에서 몇 km 떨어진 지휘소에 가만히 앉아 안전하게 돌격명령이나 내리는 건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 해병 5연대로부터 온 교신에 따르면, 현시간 부 백련산 일대와 68고지를 완전히 점령했다고 합니다.”
“다음 공격 개시일은?”
“15일 새벽 06시 30분이라고 합니다.”
하루의 정비할 시간이 주어졌다.
‘이제 남은 고지는 연희고지뿐인가···’
한강을 건너고, 104고지를 탈환했다.
연희고지는 본격적인 서울 시가지에 돌입하기 전 남은 마지막 관문이자, 적의 주공부대가 방어하고 있는 곳이었다.
“1대대장, 2대대장 불러와.”
***
7월 14일 오후 1시, 연희고지 일대 북한군 25사단 지휘소.
“사단장 동지, 큰일입네다. 사단 전방 104고지가 남조선 아새끼들 수중에 완전히 넘어갔습네다. 오늘 내일이면 이 고지에도 공세가 시작될 것 같습네다.”
북한군 25사단장 정현일 소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동서남북 중 북쪽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국방군이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동무, 교통호 정돈은 다 되었네?”
“물론입네다. 미리 파여 있던 진지와 교통호를 완벽하게 구축해 뒀습네다.”
북한군 25사단이 방어선을 펼친 곳엔, 해발 295m의 안산에서 가지처럼 뻗어 나온 능선들이 연희고지 일대를 감싸고 있었다.
과거 일본군이 사용하던 진지, 교통호, 터널이 남아있어 항공기를 이용한 공중 폭격이나 곡사포를 이용한 포격을 효율적으로 피할 수 있는 요지였다.
“내 말 잘 들으라. 최전방 교통호엔 전방에서 후퇴한 놈들로 죄다 처넣으라. 군관이라고 예외는 없는 법이야. 알겠네?”
“알··· 알갔습네다!”
“나가 보라우.”
최전방 교통호는 사실상 총알받이에 가까웠다.
연희고지가 서울 서쪽 최대의 격전지가 될 것을 생각한다면, 죽어서야 교통호 안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국방군 이 간나 새끼들. 이번에야말로 본떼를 보여주갔서.”
정현일 사단장은 자신에 차 있었다.
25사단 병력, 4500명.
78 독립연대, 2000명.
각 부대에 소속된 군관들과 하사관들은 팔로군 출신으로 숙련된 지휘관들이었다.
거기에 더해, 중화기 대대, 공병대대, 포병 대대까지 완전한 편제를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북한군 사단이었다.
일본놈들이 파놓은 진지와 터널을 보수만 하면 되었기에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 인한 피해도 크게 상쇄시킬 수 있다.
“빨리 들어오라. 국방군 새끼들.”
남은 건, 고지를 탈환하려 기어오르는 국방군을 모조리 쏴 죽이는 것.
그것뿐이라 생각했다.
***
104고지 인근 특공연대, 해병 1대대 지휘소.
“그러니까, 연대장님 말씀은 특공연대 안에서 또 특공대를 조직하시겠다는 것이 맞습니까?”
“그렇네. 자네가 들은 게 맞아.”
맞다니까. 글쎄.
몇 번이나 대답해 줬는지 모르겠다.
1대대장, 2대대장이 사이좋게 한 번씩.
아, 방금 김상옥 소령이 재차 물었으니 총 3번이다.
“50명을 1개 소대로. 3개 소대를 1개 중대로, 총 150명 정도면 충분해. 지원자를 최우선으로, 지원자가 많거나 적을시 자네들이 재량껏 채워 넣게.”
“예··· 바로 차출하겠습니다.”
“가봐.”
대대장들이 평소와 다르게 약간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지만, 이내 수긍한 채 지휘소를 나섰다.
‘이게 아니면 여기서 줄초상이야.’
그들이 떨떠름한 이유는 특공대를 차출하라는 말 외에 다른 지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고?
그 특공대는 내가 직접 맡아야 한다.
일찍이 그 사실을 알려주면···
“절대 안 됩니다! 차라리 제가 가겠습니다. 연대장님이 직접 가시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서울 서쪽 연희고지를 방어하고 있는 북한군 25사단은 지형적 이점을 잘 활용해 방어선을 구축함과 동시에 전투경험이 풍부한 지휘관들이 많다.
촘촘하게 설치한 바리케이트로 전진을 막는 것은 물론이고, 고지 일대 전체에 엄청난 숫자의 발연통에서 연기를 피워 항공 정찰과 폭격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아군의 가장 큰 무기인 항공 폭격이 전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
북한군 놈들이 항공기를 관측하면 쥐새끼처럼 터널과 땅굴에 숨었다, 나오기를 반복할 것이 뻔했다.
“연대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미 들어와 있지 않은가. 들어오게.”
이미 들어와선 뭘 그래.
“말씀하신 물건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이게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궁금증에 이곳에 오던 도중 뚜껑을 열어본 모양이다.
한강을 도하 하기 전, 미리 철제를 생산하는 공장에 넣어놓은 나만의 의뢰품이었다.
군수품을 만들어 오던 곳이 아니었기에 완벽하진 않았지만 외형이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제 역할을 하는 것엔 전혀 무리가 없어 보였다.
“이거 말인가? 음··· 혹시 안에 뭐가 들은 지 봤나? 자네가 봐선 안 될 것을 봐버렸군. 연대장 이상 지휘관에게만 허락된 특급 기밀 사항인 것을···”
이 귀여운 물건에 붙일 이름은 조금 고민해봐야겠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이 엄청난 물건에 이름을 대충 지을 순 없으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절대 일부러 보려고 본 것이 아니라···”
“이게 뭔지는 내일이면 알게 될 것이네.”
농담이야 농담.
모양 빠지게 차마 뭐라 불러야 할지, 못 정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상자 안에 있는 물건 중 하나를 집어 든 채 밖으로 나섰다.
***
7월 15일 06시 30분.
150명의 특공대와 나는 본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미 해병 5연대와 공격을 약속했던 시간, 전투의 시작을 알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프로펠러가 폭탄을 잔뜩 실은 육중하고 거대한 폭격기를 하늘에 띄우기 위해 애쓰는 소리.
후방 포병 대대에서 쏴대는 고폭탄이 적지에 떨어지는 소리.
-쾅!
아무리 땅굴이나 터널에 숨는다 한들 몇몇 북한군은 이 소리 들이 살아생전 듣는 마지막 소리였을 것이다.
“어제 교육받은 대로만 하면, 우리 모두 무사히 살아 돌아올 것이다. 이봐, 자네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뭔가?”
“예! 앞과 뒤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걸 보니 교육이 잘 된 모양이다.
“좋아. 실수는 죽음이나 다름없다. 사격지원이 끝나면 은밀하고 빠르게 침투한다.”
절대 실수하면 안 돼.
성능은 확실하다만, 시간관계상 테스트기 같은 안전장치는 못 넣었거든.
혼자 물건을 은밀히 테스트하던 도중 아군이 테스트를 적 포탄 낙하로 오인하는 한차례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성능이 확실하다는 결과를 도출해 냈다.
1타 강사 뺨치는 강의력으로 짧은 시간 내에 특공대 전원이 조작을 능숙히 해내도록 만들었다.
“지금부터는 소리를 최대한 줄인다. 이동.”
근래 안개가 짙게 끼긴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한 날인 것 같다.
북한군이 피워놓은 발화통에 더해져 보통 사람이었다면 한 치 앞 사물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시력, 청력 강화 프로세스를 최대로 실행합니다.]
육성으로 지휘할 경우, 적에게 위치가 발각될 것을 우려해 소대 간 신호선을 이용한 의사소통 법까지 숙지시켰다.
같은 시간, 미 해병 3대대와 1대대는 각각 안산과 와우산 일대에 공세를 퍼붓고 있을 것이다.
특공대와 함께 은밀히 침투하고 있는 곳은, 56고지 능선이었다.
‘정지.’
맨 앞 선두에 서서 북한군 정찰 진지를 교묘히 피해 목적지 근처에 다다랐다.
짙은 안개와 피워놓은 연기로 시야가 제한되는 것은 북한군도 마찬가지였다.
‘설치 개시.’
소대에 지정된 신호수들이 연결된 줄을 통해 신호를 주고받았다.
설치 임무를 수행하는 인원을 제외한 특공대는, 30M 뒤에서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최대한 바짝 엎드려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동무, 이상하지 않소?”
멀리서 희미하게 북한군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원래 공중에서 한차례 퍼부어대고 나면 국방군 놈들이 들이닥치지 않았소. 조용하니 이상하구만 기래.”
“이 안개를 좀 보라. 요 바로 앞도 안 보이지 않네? 뭐라도 보여야 총이라도 쏘지 않갔서.”
특공대와 북한군이 서로를 사정거리에 뒀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북한군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위치를 조금 수정한 다음, 특공대 본대가 엎드려있는 곳으로 향했다.
“설치 확인.”
신호수 귓속에 속삭이자, 신호수가 줄을 빠르게 3번 당겼다.
특공 1소대 설치 완료.
특공 2소대 설치 완료.
특공 3소대 설치 완료.
전원 설치 완료였다.
[FRONT TOWARD ENEMY]
어렵게 써진 영어 대신 앞이라는 글자를 대문짝만하게, 그것도 빨간색으로 써놨으니 실수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남은 건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기온이 올라가면 안개는 서서히 모습을 감춘다.
발화통과 안개가 콜라보를 펼치고 있지만, 둘 중 하나라도 빠지는 순간 앞을 분간할 시야는 확보되기 마련이다.
‘공격 준비.’
조금씩 안개가 걷히고 있음이 느껴졌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자, 북한군이 정성스레 구축한 진지 형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이것도 장관이라고 표현해도 되는 건가 싶다.
진지 안에는 북한군이 빈 곳 없이 들어차 있었고, 사각지대 없이 촘촘하게 거치된 기관총과 공용화기들.
새끼들, 신경을 좀 많이 쓴 모양이다.
그중 일부는 잠시 소강상태를 틈타 포격을 맞고 고인이 되어버린 자신들의 전우를 열심히 진지 밖으로 꺼내고 있었다.
“어이, 동무. 저기 뭔가 번쩍하지 않았네? 확인하고 오라.”
아마, 해가 뜨면서 반사된 빛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북한군 두 명이 진지 밖으로 나와, 특공대가 설치해놓은 물건을 향해 다가왔다.
지척까지 매복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듯, 총을 어깨 뒤로 들쳐 매고 있었다.
“소좌 동지, 이것 좀 보시라요. 묵직하긴 한데, 이게 뭔지 모르겠습네다. 흔들어보니 작은 구슬들 굴러가는 소리가 납네다.”
북한군이 보라는 듯, 근처 진지를 지휘하던 소좌를 향해 들이밀었다.
“잠깐, 거기 연결된 선은 뭐네. 이··· 이런 종간나···”
지금이다.
“격발!”
특공대 전체가 듣고도 남을 큰소리로 외쳤다.
-쾅! -쾅! -쾅! -쾅! -쾅!
엄청난 TNT 폭발음과 함께 수천, 수만 개의 쇠 구슬이 고지 전체를 찢어발겼다.
“전원! 공격개시!”
엎드려있던 특공대가 일제히 고지를 향해 몸을 일으켰을 때, 숨이 붙어 있는 북한군은 몇 없었다.
어때, 쇠 구슬 맛이 좀 매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