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의정부 탈환(1)
그냥 도와줄 수도 있지만,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얻는 것이 참된 도리다.
“역시 소문대로 아주 대범하군. 그래, 내게 원하는 것이 있긴 한가?”
군수물자와 탄약이 음식보다 절실하던 개전 초기에야 미군에게서 얻어야 할 것이 많았지만, 보급이 수월한 지금은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워커 중장보다 맥아더가 빠를 테니까.
“한국이 다시는 전쟁이라는 불운을 겪지 않게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맥아더를 처음 구슬릴 때 그 눈빛 그대로.
워커 중장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마당에 무슨 뜻이지?”
워커 중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야 할 것 같다.
“혹여나 이 전쟁의 끝이 한반도 어디엔가 어떤 선을 긋는 것에서 끝난다면, 시간문제일 뿐 언젠간 다시 전쟁에 휘말리지 않겠습니까.”
미국과 UN 연합군이 최악의 경우 한반도를 버리고 철수할 계획을 세웠던 반면, 워커 중장은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위기에도 미군을 독려해 방어선을 지킨 장군이다.
미군 내부에선 맥아더와 워커.
미 의회에서는 매카시와 공화당 의원들이 강력하게 공산주의 빨갱이 타도를 외친다면, 그 어떤 상황이 와도 미국은 쉽게 한반도에서 발을 뺄 수가 없게 된다.
“난 또 뭐라고. 그런 문제라면 걱정 안 해도 되네.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을 끝까지 지키겠네.”
인간관계 하나 개선 시켜주는 것에 대한 대가치고는, 매우 훌륭한 거래였다.
“사령관님, 혹시 타고 오신 차량을 좀 봐도 되겠습니까?”
워커 중장이 제 역할을 다하려면, 일단 살고 봐야 할 일 아닌가?
현재 도로 특성상 상태가 좋지 못한 건 당연지사, 도로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경우가 더 많았다.
전쟁 중 적에 의해 사망하는 지휘관들도 많았지만, 실제로 많은 국군과 미군 장교들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 참사에서 예외가 되지 못한 박복한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죽는 걸 막으려면, 안전벨트는 아니더라도 끈 뭉텅이라도 차에 달아놔야 한다.
“이게 뭔가?”
“한국에서 오랫동안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어딜 가나 행운이 함께 할 겁니다.”
튼튼하고 긴 천을 여러 개 골라잡아 안전벨트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힘을 줘 당겨보니 아주 튼튼한 것이 몸을 잘 잡아줄 것 같았다.
살짝 조잡해 보일 순 있지만, 임시로 만든 것 치곤 나쁘지 않았다.
정비소에서 제대로 안전벨트를 만들어 장착하는 방법도 있겠다만, 워커 중장이 3살짜리 아이도 아니고 평소에 안 하던 안전벨트를 갑자기 하고 다닐 리 없다.
하고 다닐 이유를 만들어 줘야지.
“자네도 차에 탈 때 이런 벨트를 매는가?”
사령관님, 오래 사셔야 해요.
그래야 날 오래 도와주지.
“물론입니다. 신의 가호가 함께 할 겁니다.”
워커 중장이 밝은 표정으로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다.
***
7월 20일. 특공연대 지휘소.
특공연대는 수도 서울을 가장 먼저 탈환한 선봉 부대라는 명예를 안고, 새로운 임무에 나섰다.
북진할 부대 편제를 나누는 동안, 서울 방위를 위해 의정부를 탈환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1대대는 도로 좌측 고지를 통해 창동과 도봉동 일대로, 2대대는 정릉과 우이동을 우선 탈환한다. 질문 있나?”
“의정부를 탈환한 다음 작전은 어떻게 되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1대대장의 질문에 2대대장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대가 의정부 일대를 완전 탈환에 성공한 후, 서울에 배치된 국군 1개 치안연대에 의정부 요충지와 고지를 넘긴 뒤, 38선으로 향한다.”
“38선을 넘습니까?”
38선을 넘냐는 질문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나에겐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에 보내고, 맥아더를 그렇게 구슬려댄 성과가 어떠냐고 묻는 것과 같았다.
“그래. 의정부를 탈환하는 임무를 마친 뒤, 아군 전선에 맞춰 우리 특공연대는 38선을 넘는다.”
서울 탈환이라는 주요 임무 덕에 특공연대에 채워진 자물쇠의 유효기간은 의정부 탈환까지였다.
의정부를 탈환하고 나면, 한강 방어선 전투 때와 같이 연대장의 독립된 지휘 권한 아래 부대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연대장님, 이번에도 우리 특공연대가 가장 먼저 38선을 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령이 된 김상옥 중령이 왕성한 혈기를 뽐냈다.
추운 겨울이었다면, 코에서 하얀 콧김이 거세게 뿜어져 나왔을 것이다.
“부대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일단은 자네들만 알고 있게. 아직 다른 부대엔 작전 계획이 하달되지 않았을 거야.”
기존 38선 영토를 수복한 것에 만족하고 전쟁을 끝낼 것인지, 북진해 한반도 전체를 확보할 것인지 고민하던 미 행정부와 UN군은 빠른 결정을 내렸다.
“중공과 소련의 전면 개입 행위가 없는 한 연합군의 38선 돌파가 허용될 걸세. 다만 중공과 소련 접경지역까지 다다르면, 특이사항이 없는 한 접경지역 작전은 국군이 전담하는 조건으로.”
미 국가안보회의에서 나온 이 정책들은, 소리 없는 투쟁으로 얻어진 결과물이다.
정책을 얼핏 본다면 결정만 빨라졌을 뿐, 전과 똑같다고 볼지 모르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먼저 ‘전면’ 개입 행위.
기존엔 전면이라는 단어 없는 개입 행위로 정확히 명시되어 있었다.
전쟁에서 개입 행위와 전면 개입 행위는 하늘과 땅 차이다.
중공군을 북한군 군대에 섞고 있는 사실을 안 지금, 개입 행위는 성립된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전면’ 개입 행위는 아니었다.
또 하나는 미군은 접경지역에서의 어떠한 작전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조용히 사라졌다.
사실상 가장 큰 성과였다.
‘겁쟁이라는 비난은 피하고 싶을 테니까. 소련이나 중공처럼 발 한쪽은 한반도에 걸치고 있겠다는 뜻이겠지.’
물론 여러 국가가 섞인 UN 연합군 전체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엔 시간이 조금 걸리는 문제임은 분명하다.
냉정하게 말해서 38선을 회복해 대한민국이 전쟁 전 상황으로 돌아온다면, 동방의 가난하고 작은 나라를 위해 더는 피 흘리기를 원치 않는 게 사실상 각국 국익에 맞으니까.
힘든 과정이 되겠지만, 우리 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방법을 찾아갈 것이다.
미국도, 소련도, 중국도 물론 나도.
그 어떤 국가도 세계 3차대전이 한반도에서 발발하는 것을 원하진 않는다.
다만, 한반도 전역만을 수복하고 끝낼 것인지 묻는다면?
답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중공군이 얌전히 집에 처박혀 얌전히 관전만 하면 모르겠지만, 그 새끼들이 그럴 리가 없거든.’
어쩌면 아주 거대한 무언가를 놓고 펼치는 지독한 눈치싸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철저히, 더 완벽히 준비한 사람이 이기는 그런 눈치싸움.
“다들 이해했으면 곧 출발하지. 언제나 그랬듯 사는 게 최우선이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꽤 많은 전투를 함께한 두 대대장은 내가 말한 사는 것의 의미를 잘 깨닫고 있을 것이다.
사는 것의 의미는 어쩌면 상황마다, 때마다 달라진다.
일단 지금은, 우리가 잃었던 것을 되찾기 위해 살아야겠다.
***
꼬박 하루를 걸었다.
장마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잊지 말라는 듯, 비가 거세게 내렸다.
서울에서 출발해 의정부 중간지점까지 진출했지만, 아무런 적의 저항도 받지 않았다.
“이 빨갱이 새끼들 이거···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 의정부까지 버리고 후퇴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터에선 총성과 포성이 귀를 때려댈 때보다, 이토록 조용할 때가 더 무서운 법이다.
아무런 저항도 없는 이런 순조로운 전진은 아군의 방심을 유도하기 딱 좋은 환경이니까.
“절대 방심하지 마. 이런 곳에 저격수라도 숨어있으면, 대대 전체 발이 묶일지도 모르니.”
“예. 알겠습니다. 전원 사주경계 확실히 한다!”
1대대장 김상옥 중령이 재차 부대원들의 정신을 무장시켰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사람이다.
총성과 포성의 메아리는 피곤과 잠을 잊도록 각성상태를 유지하게 했지만, 이 조용함이 주는 느낌은 마치 풍요 속에 빈곤과도 같달까?
당연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건 좋은 일이지만, 모두가 내심 불안하기 짝이 없을 테니까.
“윽!”
바로 뒤에 따라오던 병사 한 명이 어깨를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저격수다. 전원 엄폐! 엄폐해라!”
다행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가슴을 피해 어깨에 맞은 덕에 목숨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이런 제기랄.
저격수 같은 엿 같은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탕!
빗소리를 뚫고 총성이 울렸다.
병사가 맞고 쓰러진 총알이 발사된 총성이 지금 들린 것이다.
[북서쪽 방향. 소리가 도착한 시간을 계산한 결과 1088M 거리에서 발사되었습니다.]
나노봇이 빠르게 총알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분석을 마쳤다.
북서 쪽 방향엔 누가 봐도 저격수가 자리 잡고 있을 것 같은 동굴이 있었다.
“1대대장. 전원 현 위치 그대로 엄폐시켜!”
적이 고지에 배치한 한 명의 저격수는 이처럼 많은 병력을 묶어두는 것에 효과적이었다.
“연대장님, 안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땅에 고인 빗물이 튀었다.
다행히 아무도 맞은 사람은 없었다.
-탕!
“저 총알에 누가 맞을지 몰라. 대기해.”
이런 상황에서 연대장이 직접 저격수를 잡으러 간다는 것은, 미친놈이나 다름없다.
유고 시 용감했던 연대장이라는 표현보다는 무책임, 지휘 태만 등 온갖 나쁜 수식어는 다 붙는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탕!
날씨가 좋았다면 포병대의 포격이나 항공 폭격을 요청해 이 지역을 지났겠지만, 비가 거세게 오는 지금은 화력지원이 상당히 제한된다.
소규모 특공대를 편성해 보낸들, 이미 저격수는 재미를 본 뒤 빠져나갈 가능성이 농후했다.
내가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연대장이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이 방법이 가장 빠르고 안전했다.
[시력 강화 프로세스를 최대로 조정합니다.]
몇 걸음 내 엄폐물이 있는 곳을 통해 빠르게 동굴 방향으로 내달렸다.
총소리가 계속 나는 걸 보니, 아직 누군가 자신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다.
‘방금 총성과의 거리는?’
총성이 전에 들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들리는 것으로 봐선,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북서쪽 방향. 97M 전방]
대대가 엄폐물에 숨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서인지, 저격수 또한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 계속 저격을 하고 있었다.
‘좋아. 천천히.’
한 발자국을 움직일 때마다 신중에 신중을 다했다.
손바닥에 맺히는 물이 비인지, 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빗소리가 총성을 제외한 주변 소리를 지워주고 있었지만, 그건 적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백번 잘 해왔어도, 한번 삐끗하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영웅이라는 말 대신 무식한 꼴통 소리를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혼자다.’
조금 더 다가가자, 미동 없이 엎드려쏴 자세를 한 저격수가 눈에 들어왔다.
“총 내려놓고 그대로 손 올려. 허튼짓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저격수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조금이라도 움찔한다면, 바로 뒤통수에 빗물이 흐를 것이다.
저격수가 총을 내려놓고 손을 들자, 곧장 총을 발로 차 멀리 떨어트렸다.
“어이, 동무. 익숙한 목소리고만 기래.”
저격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