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의정부 탈환(2)
“이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 꼴이 말이 아니고만. 기래.”
저격수가 고개를 뒤로 꺾어 나를 응시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아는 얼굴을 떠나 중요한 건 어떻게, 그리고 왜?
“당신이 어떻게 국군을 향해 저격 질이나 하고 있을 수 있지? 꼴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만, 지금이 훨씬 추하군.”
그때.
저격수가 말하는 그때는 채병덕이 총참모장이던 시절, 업어치기에 날아가 버린 그때를 말하는 것 같다.
저격수의 정체는 채병덕의 부관이었던 라엄광이었다.
정보부에 끌려간 뒤 생사나 어떻게 됐는지는, 미처 알 수 없었다.
사실 다시 만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한 적 없지만, 직접 뒤통수에 총구를 겨누게 될진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도 서울을 비우고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던 도중 탈출했거나, 서울에 그대로 방치된 뒤 북한군에 의해 풀려났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동무, 뒤통수가 따가워서 그런데 총 좀 내릴 수 없겠서? 내 꼴을 보라. 허튼짓은 할 수도 없지 않네.”
라엄광의 양다리는 땅에 박힌 긴 철근에 매단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총을 발사한 뒤, 일부러 위치를 바꾸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바꿀 수 없던 것이다.
“자네가 사는 나라는 간첩 짓까지 해 가며 충성을 바친 것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군. 안 그런가?”
채병덕의 부관으로 위장해 정보를 북한에 빼돌렸던 공로 따위, 북한에서는 개나 줘 버린 모양이다.
한국과 북한, 두 나라 모두에게 버림받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꼴이었다.
“동무 이름이 이강산··· 맞네? 팔자 좋아 보이는데 조심하라. 총 든 군인 놈 팔자 조져지는 건, 순식간이네.”
내 팔자 걱정은 고마운데.
여느 빨갱이가 그러하듯 간나새끼를 외치며 팔딱팔딱 댈 힘도 없는 모양이다.
눈을 뜨고는 있었지만, 눈동자가 흐릿한 것이 삶에 대한 의지는 진즉 사라진 듯했다.
“걸을 수 있나?”
친하지도 않은 마당에, 안부 주고받기는 이 정도면 족했다.
비무장 상태의 포로 뒤통수에 총을 쏠 순 없기에, 서울을 거쳐 포로수용소로 보내야 했다.
“내래, 끌려가 봐야 당할 꼴이 우스워서 못 가지. 죽이라.”
라엄광이 상체를 비틀어 총구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마치 얼굴을 보고 쏘라는 듯.
-연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연대장님!
고지 중턱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격이 멈춘 틈을 타 나를 찾기 위해 움직인 모양이다.
“못 쏘겠네? 이깟 배포도 없어서야. 잘 보라. 내래 도와주갔서.”
“움직이지 마.”
라엄광이 다시 상체를 똑바로 엎드린 채, 손을 슬그머니 총에 가져대 대고 있었다.
“마지막이다. 총에 털끝이라도 닿으면 여기서 죽어.”
“연대장님! 여깁니다. 여기! 괜찮으십니까?”
가장 먼저 동굴에 도착한 병사가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흡.”
잠깐 관심이 병사에게 돌아간 사이, 라엄광이 마지막 남은 모든 것을 쏟아내 총을 쥐었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리려는 순간.
-탕!
먼저 방아쇠를 당긴 건 나였다.
방아쇠를 당김과 거의 동시에 라엄광 뒤통수에 닿은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아주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해맑게 나를 찾았다며 소리친 병사 머리에 먼저 총알이 닿았을 것이다.
라엄광 머리에서 새어 나온 빨간 잉크가 비와 섞이며 번져갔다.
모든 것이 아주 짧은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
비가 점점 그치고 있었다.
하늘은 원래 우중충한 잿빛이 아니었다는 듯, 군데군데 푸른빛이 잿빛을 밀어냈다.
우리가 그러했듯, 북한군도 새로운 부대를 편제할 시간을 벌기 위해 최선을 다해 지연전술을 펼치고 있었다.
지연하는 시간만을 놓고 따진다면, 북한군이 더 많은 시간을 지연시켰을지도 모른다.
고지에 묶어둔 저격수 한 명이 대대급 부대의 전진을 늦출 수 있었으니까.
우리와 다른 점을 꼽자면, 빨갱이들에겐 인간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윤리나 도덕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대장님, 그렇게 혼자 가셨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 저희를 못 믿으시는 게 아니라면, 다음번엔 저희에게 맡겨 주십쇼.”
1대대장 김상옥 중령이 애절한 부탁이라도 하듯 말했다.
못 믿어서?
못 믿어서가 아니다.
지금의 특공연대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다.
이미 많은 실전 경험과 전투력을 갖춘 정예 부대로 거듭났으니까.
“흠흠. 이곳을 벗어나면 114번 고지가 나온다. 114번 고지만 탈환하면, 의정부 지역 임무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무례하다고 생각하시더라도, 이번에는 꼭 대답을 들어야겠습니다. 연대장님.”
집요하긴.
가장 빠른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을 뿐이었다.
“연대장님께서 부대원 한 명, 한 명을 아끼시기에 위험을 감수하시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몇 명의 목숨을 살리셨는지는 세어 볼 필요도 없을 겁니다. 특공연대원 중 연대장님께 목숨을 빚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함께 전투를 겪으면서, 느는 건 전투 경험만은 아닌 듯했다.
김상옥 중령을 처음 봤을 때도 똑 부러지긴 했지만, 분명히 이 정도 말발을 가지고 있진 않았으니까.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걸 보면,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연대장님께서 잘못되신다면, 남은 특공연대원들은 빚쟁이로 전락할 겁니다. 살아서 그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빚쟁이가 제발 빚을 갚게 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경우가 이런 것일까?
절대 아첨이나 아부, 출세를 위해 손 비비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런 낌새가 조금이라도 느껴졌다면, 절대 이렇게 길게 말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테니까.
하여간 웬만해선 보기 힘든 광경인 건, 분명했다.
“알겠네. 알고 있겠지만 자네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야. 이 날랜 몸을 가만히 놔두려 해도 놔둘 수가 있나. 앞으론 충분한 상의를 거치도록 하지.”
“걱정되는 마음에··· 무례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김상옥 중령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이 정도면 적당히 가벼운 분위기로 환기된 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가장 중요한 한마디를 잊을뻔했다.
“무례는 무슨, 그리고 자네들은 결코 빚쟁이가 아니야. 그런 생각은 하지 말게. 알겠나?”
작전 중 혼자 위험을 감수하는 건, 줄여나가야 할 일인 건 맞다.
조금만 기다리면 줄여나갈 수도 있을 테고.
“예!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저기 114고지가 보입니다.”
좁은 골짜기에 소로를 따라 흐르는 개울을 건너자, 건너편에 있던 114고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114고지에 포격 요청해. 능선에 있는 적을 제압한 뒤 반대쪽에 있는 2대대와 합동 공격한다.”
2대대는 중앙 도로를 기점으로 형성된 소지 능선에 다다랐다.
114고지 능선에 있는 적 진지와 호만 화력 지원을 받아 파괴한다면, 양쪽에서 진격해 고지를 탈환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대대에는 폭격이 끝나는 즉시 고지를 공격하라 전하면 되겠습니까?”
국군과 연합군, 북한군까지.
고지 탈환을 위해 공격하는 방법은 얼추 비슷했다.
폭격기와 곡사포로 적이 공들여 파놓은 진지를 박살 낸 뒤, 보병 편제 공용화기와 중화기를 이용해 적을 고지에서 밀어내는 방식이었다.
고지를 쟁탈하기 위한 고지전은 엄청나게 많은 폭격과 포격 이후에도 많은 병력까지 갈아 넣어야 했다.
-쾅!
후방 포병대대가 쏜 포탄 한 발이 정확히 능선에 떨어졌다.
초탄이 능선에 명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능선 전체를 포탄이 두들겼다.
-쾅! 쾅! 쾅!
포탄이 떨어지는 모습만 봐서는 능선 안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없겠다 느껴질 정도지만, 북한군은 땅굴에 가까운 호와 임시 방공호를 만들어 포격을 피하고 있었다.
“연대장님, 곧 포격이 끝날 것 같습니다.”
“2대대에서 온 무전 없나?”
“아직··· 들어온 건 없습니다.”
주문한 물건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예상배송시간보다 빠르게 도착했다면, 분명 2대대장이 이게 뭐냐며 무전이 왔을 것이다.
“2대대에 포격이 끝난 뒤, 곧장 공격하지 말고 대기하라 전달하도록.”
“오늘 114고지를 공격하는 게 아닙니까?”
평소와 달라진 계획에 김상옥 중령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일단 대기시켜. 자네, 우리 특공연대에 가장 부족한 점이 뭔지 아나?”
지금까지 특공연대를 지휘하면서 몇 가지 느낀 장, 단점이 있었다.
장점으로는 보병을 위주로 한 편제로, 그 어느 부대보다 빠르고 은밀하게 작전지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과 지휘관 능력에 따른 다양하고 참신한 작전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음··· 능선이나 고지를 돌파할 때마다, 이처럼 번번이 화력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네. 조금만 기다리면 그 단점을 해결해 줄 물건이 도착할 거야.”
-쾅!
포격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하는 대화라기엔, 너무 평화로운가?
“이젠 연대장님께서 뭘 준비하셨는지 기대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특공연대가 가진 박격포나 무반동총 같은 중화기로는, 적 진지에 유의미한 큰 타격을 주기 어려웠다.
항공기를 통한 폭격 지원은 날씨의 영향을 받았다.
곡사포 포격 역시, 급격한 사격이나 목표물이 움직이는 경우 효력이 떨어졌다.
드르르르르르르르르.
무언가 후방에서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와 돌을 분쇄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후방에 적 전차 출···”
“아니, 아니야. 괜찮네.”
궤도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김상옥 중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일입니다. 이 소리는···”
“잘 들어 보게. T-34 전차가 이렇게 빨랐나?”
“아닙니다. 확실히 T-34 전차보다 빠른 것 같습니다.”
“물건이 도착한 모양이야.”
물론 산 건 아니고, 미 7사단에서 빌려온 거긴 한데.
뭐,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쓰고 돌려줄 생각이다.
“이건 미군 전차 아닙니까!”
“이젠 우리 전차가 되었지.”
거대한 쇳덩이가 우람한 몸집과 길고 두꺼운 포신을 자랑하며 멈춰섰다.
M-46 패튼.
깡통 전차와 현대 전차의 과도기에 개발되어, 얼마 활약하지 못한 비운의 패튼 전차였다.
‘이젠 비운이라는 수식어는 필요 없지.’
현시점의 M-46 전차는 그저 깡패나 다름없다.
그간 T-34로 인해 당했던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줄 차례였다.
패튼 전차 각 1개 소대를 1대대, 2대대에 배치했다.
6대라는 전차 수는 특공연대에 최적화된 수량이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산이다.
전차를 운용하는 것은 화력에서 엄청난 도움이 되지만, 운용을 위해 필요한 엄청난 연료와 부품을 조달하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순 없다.
챙겨야 할 것이 늘어난다는 건, 부대 기동력의 약화와 같으니까.
“지금쯤 2대대에도 전차 소대가 도착했을 거야. 공격준비 명령 전달하게.”
-쾅!
후방에서 쏜 마지막 포탄이 능선에 떨어졌다.
“예! 알겠습니다.”
이젠 친절을 베풀 차례다.
평범한 고폭탄 맛에 질렸을 빨갱이들에게, 색다른 맛을 보여줄 차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