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북진(2)
전쟁에 있어 어떤 전투가 최선의 전투일까.
그 어떤 훌륭한 지휘관에게 묻는 들, 자신이 겪어온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대답을 할 것이다.
용맹 무쌍한 지휘관 아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또 넘어 최후의 1인이 남더라도 작전지역을 점령하는 전투?
적이 예상조차 못 할 기발한 방법으로 적의 심장부에 비수를 꽂는 전투?
상황에 따라 둘 다 정답 일수도, 아닐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전투는···
“차량의 배기통을 떼어내라. 배기통을 떼어 낼 수 없는 차량엔 구멍을 뚫어라.”
멀쩡한 차량 배기통에 구멍을 뚫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차량 정비병들이 무슨 날벼락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대장님, 배기통을 제거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혹시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평양 입성에 선봉이 되기 위해서라고 하면 설명이 되겠나? 배기통을 떼어보게.”
배기통을 떼는 것과 평양 선봉이 무슨 상관관계냐고?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빠르다.
정비병이 더 이상의 군말 없이 차량 밑으로 들어갔다.
“완료되었습니다. 이러면 아마··· 차량 배기 소리를 줄여줄 장치가 없어 차량에서 탱크 소리가 날 겁니다.”
차량 밑에서 나온 정비병 얼굴에 검은 그을음이 잔뜩 묻어있었다.
-크릉! 드드드드드드드드.
시동을 걸자 정제되지 않은 거친 배기음이 뿜어져 나왔다.
“연대장님. 말씀대로 모든 차량에 대한 배기 통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정비 반장이 다가와 작업을 마쳤음을 알려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배기음이 마치 고성능 차들이 즐비한 레이싱 서킷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심어줬다.
“수고 많았네. 정비반이 전차 30대를 만든 것이나 다름없어.”
“설마 일부러 배기 소리를 키워 빨갱이 놈들이 혼란스럽게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그렇네. 어떤가? 차량을 오래 만져온 자네라면 적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에 전차가 내는 소리와 이 소리를 정확하게 구분해낼 수 있겠나?”
고작 군용 트럭, 차량에 배기 통을 떼어냈다고 해도 M46 전차의 웅장한 배기 소리와 같을 순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상황이라면?
M46 전차는 지금 북한군에게 있어 소리만으로도 공포심을 심어주는 저승사자나 다름없다.
사람이라는 게, 한번 쓴맛을 보고 난 뒤 무의식에 새겨진 공포심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도 속는 멍청이야 있을 리 없지만, 음··· 정신없는 와중에 이 소리라···”
정비 반장이 조용히 눈을 감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여기에 진짜 패튼 전차 소리도 섞이지 않겠습니까? 제가 느끼기로는··· 수십 대의 전차가 몰려오는 저승 직행 소리로 들립니다.”
성공적이었다.
정비 반장이 헷갈릴 정도라면, 빨갱이들이 제대로 구분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 특공연대에 있어 최선의 전투.
적이 스스로 우리를 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
특공연대 진격로. 고랑포.
서울에서 출발해 문산을 지나 어느덧 고랑포를 지나고 있었다.
배기통을 제거한 효과가 있었는지, 고랑포에 오는 동안 북한군과 그 어떤 교전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제 좀 익숙해지는군. 안 그런가?”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지는 소리도 들어온 마당에 이 정도 소리는 뭐··· 참을만한 것 같습니다.”
김상옥 중령이 배기 통을 제거해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쯤은 별일 아니라는 듯 중령이 귀를 후볐다.
특공연대는 국군 1사단, 미 1 기병 사단, 미 24사단과 함께 경의 축선, 축선의 우측을 맡아 평양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간 보여준 압도적인 공적이 있었기에, 특공연대가 평양 진격을 최우선 목적으로 함에 의문을 갖는 지휘관은 없었다.
“미 1 기병 사단이 벌써 개성을 지나 금천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더 빠르군. 다음에 나오는 마을에서 휴식한다.”
“예. 알겠습니다.”
M46 패튼 전차 6대를 제외하고, 특공연대에 배속된 차량은 30여 대.
그마저도 5대는 귀하신 몸, 패튼 전차를 모시기 위한 전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반면 미 1 기병 사단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1000대에 육박하는 차량을 이용한 신속한 기동력을 기반으로 쾌속 진격을 이어나갔다.
흔히 비교하는 걷는 자와 뛰는 자가 아니다.
걷는 자와 차에 타고 달리는 자.
차량도 연료 보급과 정비, 과열된 엔진을 식히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지만, 고된 행군으로 발바닥이 물러 터져버린 사람이 회복할 시간과 비교할 것은 아니었다.
“연대장님! 연대장님!”
미군 전차 중대장과 함께 선두 M46 전차에 탑승했던 통역 장교가 전차에서 뛰어내린 뒤, 달려왔다.
“무슨 일이지?”
“그게··· 음.”
통역 장교가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또 뭔데?
뜸 들임 뒤에 이어지는 말들은 언제나 내 혈압을 오르게 했었다.
이런 경우가 수도 없이 많았음에도, 좀처럼 익숙해 지지가 않았다.
“괜찮으니까 말하게.”
그래.
통역 장교는 말 그대로 통역을 하러 온 것일 뿐, 아무런 죄가 없지.
“전차 중대장이 너무 덥답니다.”
그래서?
“잠시 진격을 멈추고 이 옆에 있는 논에서 등목이라도 하고 가자고···”
아.
등목이라는 걸 미국인들도 하는 거였어?
“등목이라···”
통역 장교가 민망하고 불안하다는 듯 몸을 꼬았다.
자기 입에서 나온 통역임에도, 보고하기 민망했던 모양이다.
생각 같아선 등목하고 싶다는 전차 중대장을 데려다 논두렁에 머리부터 처박아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아 그래도 그냥 처박고 싶은데 어쩌지?’
특공연대에 배속된 미군 전차 중대장만 이러한 것은 아니었다.
미군은 전반적으로 주간에 아주 뛰어난 전투력과 기동력을 보였다.
차량을 이용한 빠른 기동력과 항공 지원, 화끈한 포격 지원으로 북한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열심히 일한 당신, 즐겨라.
이 말이 전쟁통에도 통용되는 말인진 모르겠는데.
문화 차이라고 해야 하나?
전선 상황이 조금 여유롭다 느껴질 때면 저녁엔 더운밥을, 논이나 저수지처럼 물로 몸을 씻을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하면 몸을 씻었다.
“1대대장,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얼마나 남았지?”
“연대장님! 지금도 미 기병 사단보다 현저히 기동속도가 느립니다. 지금 쉬어가는 건···”
“지금 저들 머리끄덩이 잡고 전진해 봐야, 큰 차이는 없네. 오히려 서로 악감정만 싹틀 뿐이지. 가까운 마을이 어딘가?”
“전방 2KM 지점에 구하리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자네는 가서 전하게. 몸 담글 곳은 저쪽에도 많으니 구하리 마을에서 쉬었다 가자고.”
통역 장교를 향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연대장님. 조금의 틀림도 없이 전하겠습니다.”
하긴, 나였어도 고마울 것이다.
온갖 욕을 다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판에 선뜻 요구를 수락해줬으니까.
“이봐. 1대대장.”
“예. 연대장님.”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상옥 중령을 불러세웠다.
그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만큼 평양 선봉에 대한 집념이 강한 것인지, 자신이 존경하는 지휘관이 고작 미군 중위의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들어줘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작더라도 불만의 씨앗이 생겼다는 것.
“자네 표정을 보니 왜 저런 요구를 바로 들어줬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군.”
“솔직히 그렇습니다.”
한 번쯤 돌려 말할 법도 하건만, 제대로 석이 나간 모양이다.
“내가 우리 부대원을 실망하게 한 적이 있던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질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특공연대였나?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숱한 전투를 겪으면서, 서로가 목숨을 빚지고 지켜주며 모두의 피와 땀으로 이룩해낸 결과지. 동의하나?”
“물론입니다.”
김상옥 중령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들도 그리 생각할까? 아직은 아니야. 분명 저들과도 곧 끈끈한 전우애를 나눌 기회가 찾아오겠지. 떼쓰는 아이가 콧잔등을 쥐어박힌다고 떼를 안 쓰던가? 만약 자네가 원하는 게 전시에 안일함을 가진 저 미군 중위 콧잔등을 쥐어 박아주는 거라면, 내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쥐어박아 주겠네.”
주먹을 꽉 쥐어 김상옥 중령에게 보여주었다.
김상옥 중령이 짧게 웃음을 보인 뒤, 그의 표정이 어느덧 죄송함으로 물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연대장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김상옥 중령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멈추지 말고 진격하라는 강압적인 명령을 내릴 수도, 평양에 선봉으로 진입해야만 한다고 부탁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 어떤 방법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형성된 믿음보다 좋을 순 없다.
“자네는 나를 믿나?”
“한 시도 믿어 의심치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방금은 좀 못 믿은 것 같긴 한데.
“나도 자네를, 부대원을 믿네. 나를 끝까지 믿게. 나도 자네를 끝까지 믿겠네.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김상옥 중령 눈망울에 충성심이 넘실거렸다.
아주 순도 높은 진짜 충성심.
조금 더 하면 울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남자를 울리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었다.
***
1개 소대를 투입해 마을 정찰을 지시했다.
정찰 소대가 마을에 들어서고도 아무런 소란이 없자 미군 전차병들이 패튼 전차를 마을 초입에 세운 뒤, 논에 들어가려는 듯 군복을 벗었다.
“오··· 뭐야.”
무슨 일인지 부대원들이 그 주위에서 탄식을 내뱉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연대장님, 저 녀석들은 몸에 뱀을 한 마리씩 달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더라도··· 심상치 않습니다.”
미군이 어느덧 군복을 벗고 속옷만 남긴 채 물에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부대원들은 그 주위에서 무언가를 구경하는 듯했다.
“연대장님은 안 들어가십니까?”
김상옥 중령이 옆에서 물었다.
물론 생각 같아선 미군이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는 아나콘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국산 구렁이를 내보여 국군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고 싶었지만, 연대장 체면이 있지.
아무 곳에서나 옷을 벗어서 되겠는가?
암.
그렇고말고.
절대 한국산 구렁이가 미국산 아나콘다에 꿀리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난 괜찮네. 자네나 원하면 들어갔다 와.”
“어휴,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연대장님.”
한차례 미군을 바라본 김상옥 중령이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어댔다.
구하리는 시골의 여느 마을처럼 조용했다.
이곳은 전쟁을 피해가기라도 했다는 듯.
‘이상할 정도로 너무 조용한데···’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한 명도 남김없이 피난을 갔을 수도 있지만, 어딘가 꺼림칙한 고요함이었다.
“정찰 소대가 마을 주변을 정찰한 결과, 학살의 흔적이나 적 매복 진지는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찰 소대의 정찰결과를 보고받는 찰나.
잠깐.
저게 뭐지?
“전원 동작 그만! 아무것도 손대지 마라!”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