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북진(4)
굽은 도로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타난 T-34 전차는 총 10여 대.
미 공군의 융단폭격을 피해 간신히 살아남은 전차여단의 사실상 마지막 주력이었다.
“중대장, 후속하는 전차에 명령내리게. 빨리!”
만약 아군이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T-34 전차였다면, 전면과 측면에 아군끼리 오인 사격을 막기 위한 표식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앞에 보이는 T-34 전차에 표식 따위는 없었다.
“음··· 음··· 일단 선두 전차를 공격하고···”
선두 전차에서 전차들을 지휘해야 할 전차 중대장이 당황했는지, 어디서 꿀이라도 주워 먹고 벙어리가 되었는지 명령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물론 몇 초 안 된 시간.
문제는 그 몇 초 후면, 적도 사격준비를 마칠 것이다.
준비하지 못한 채 적을 만난 것은 아군이나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몇 초라도 먼저 적을 발견한 건, 불행 중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다.
혼란에 빠진 전차 중대장이 정신 차리는 것과 그 이점을 고스란히 바꿀 순 없다.
“이리 내!”
전차 중대장이 손에 쥐고 있던 무전기를 서둘러 건네받았다.
무전기는 패튼 전차끼리 교신을 위해 연결되어 있었다.
“전방에 적 전차 발견! 전속력으로 후진해 양옆으로 갈라설 것!”
내 명령에 패튼 전차들이 육중한 덩치에 걸맞지 않은 날렵한 움직임을 보이며 후진했다.
숙련된 전차 운전병의 경우, 패튼 전차 포탑을 전방에 고정한 채 제자리에서 궤도를 360도 움직이는 기동이 가능했다.
명령을 받은 선두 패튼 전차가 굉음을 내며 최대속도로 후진했다.
“전차 1소대는 적 선두 전차를, 2소대는 맨 끝 후미 전차를. 준비되면 쏴!”
약속이라도 한 듯 전차 1소대는 길 좌측으로, 2소대는 길 우측으로 빠져 맨 앞 전차와 맨 뒤 전차에 사격할 준비를 마쳤다.
“1소대 사격준비 끝.”
“쏴! 재장전 후 계속 사격할 것.”
적 전차는 이제 막 우릴 발견하고 허겁지겁 포신을 돌리고 있었다.
늦었어.
이 새끼들아.
“파이어!”
-쾅!
1소대 3대의 패튼 전차 포신에서 불을 뿜어져 나왔다.
명중.
90mm 주포에서 발사된 포탄 3발이 정확하게 선두 전차에 작렬하며 검은 연기를 뿜어댔다.
아군을 향해 움직이던 포신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전차끼리 붙는 전차전에서 먼저 보고, 먼저 쏘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었다.
“2소대 사격준비 끝. 파이어!”
후미에 있는 T-34 전차에 조준을 끝낸 2소대 3대 패튼 전차가 곧바로 사격을 이어갔다.
역시 명중.
좁은 길을 돌아 나온 적 전차의 선두와 후미가 격파되자, 중간에 있던 T-34 전차들은 기동이 불가했다.
-쾅!
간헐적으로 T-34 전차가 포격을 가해왔지만, 포탄은 패튼 전차 근처에도 미치지 못했다.
기동로가 전부 막혀 움직이지 못하는 T-34 전차들은, 그저 성난 패튼 전차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분당 최대 8발.
모든 패튼 전차 포신에서 최대 발사 속도로 포탄을 퍼붓고 있었다.
“목표물 제거 완료.”
전차 1소대와.
“목표물 제거 완료.”
전차 2소대가 적 전차가 모두 파괴되었음을 알려왔다.
적 전차가 모두 무장해제되었음에도, 특공연대원들은 서서히 적 전차로 다가가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받게. 마무리는 해야지.”
무전기를 다시 전차 중대장에게 건넸다.
그 역시 나와 같은 방법, 혹은 더 나은 방법으로 전차를 지휘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갑작스레 나타난 전차에 가슴이 벌렁거렸을 뿐, 평양까지 동행해야 할 아군을 머저리 취급하고 싶진 않았다.
나 역시 포신을 보는 순간 오금이 저릿할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연대장님.”
그가 감사 인사를 건네며 두 손으로 공손히 무전기를 받아들었다.
“1소대, 2소대는 피해 상황 보고할 것.”
전투 후 아군 피해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 중 기본.
“1소대 이상 없습니다. 저런 눈먼 탄에 맞을 애송이가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2소대에도 애송이는 없습니다.”
“다들 수고했다. 탄약 채워 넣고, 정비 필요할 시 보고 하도록. 이상.”
몇 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50여 발의 포탄을 적을 향해 쏟아부었다.
적도 나름의 대응을 하긴 했겠지만, 선두와 후미가 막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대응은 아군에게 간지럼 정도의 피해도 주지 못했다.
“만약 연대장님이 이 전차에 타 계시지 않았다면··· 저의 무능함으로 인해 전차 중대, 어쩌면 후속하는 특공연대 전체가 위험에 빠졌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자책 말게. 내가 좀 더 빨랐을 뿐, 자네도 곧바로 정신을 차린 뒤 나보다 더 훌륭한 지휘를 하지 않았겠나?”
뚝, 울지마.
자책하는 전차 중대장을 달랬다.
예상일 뿐이지만, 그의 말처럼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내가 탑승한 선두 패튼 전차가 박살이 나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우리도 박살이 났겠지만. 그렇지?’
신속하고도 정확한 전차 중대의 전투 숙련도를 보니, 5대의 전차로도 충분히 적을 격파할 수 있긴 했을 테니까.
“아닙니다··· 한순간의 실수로 집에서 저만 기다리고 있을 줄리아를 두 번 다신 못 볼 수도 있었다는 생각만 하면···”
“그만 자책하고 고개 들게. 줄리아는 자네 아내인가? 여기 있는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왔지. 자네는 미군 지휘관이야. 더 강해져야 하네.”
생사를 오갔다 오며 집에서 오매불망 자신을 기다릴 아내 생각이 난 모양이다.
전쟁이 길어진다면,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해 생기는 향수병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통에 얻는 지독한 병 중 하나였으니까.
“연대장님··· 저는 아직 미혼입니다.”
아, 그럼 여자친구?
자식, 파병을 마치고 건강하게 무사히 집에 돌아가는 날, 꽃다발 들고 프로포즈할 계획을 세우고 있나 보군.
“시간 날 때마다 여자친구에게 편지라도 자주 남기게. 훗날 함께 편지를 본다면 아주 좋은 추억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연대장님··· 저는 여자친구도 없습니다. 줄리아는 제가 키우는 강아지입니다.”
“자네···”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다독이고 있던 오른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우드득.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설마 부러진 건 아니겠지?
***
대륙시대 대만, 장제스 안가.
“교장 선생님, 중공군이 북한 국경을 넘어가기 직전이라는 첩보입니다.”
교장 선생님이라 불린 남자는 장제스였다.
그는 수많은 호칭 중, 교장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했다.
분열된 근대 중국을 어렵사리 통일한 찰나에 일본과의 전쟁, 2차 대전 승전국의 일원이 되어 인정받으려던 찰나에 국공내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과의 국공내전에 패해 국부 천대의 치욕을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씨 없는 수박이라는 불운까지.
고자인 장제스는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의 표본과도 같았다.
“마오쩌둥 그놈이 결국 전면 개입을 선택했다는 말인가? 국부군 파병 계획은?”
“아직 전면 개입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만, 상황이 달라지는 대로 즉각 보고 하겠습니다. 미국과 UN 측에 3개 사단 파병을 건의했으나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도움을 거절하는 놈들에게, 부탁까지 해가며 파병을 꼭 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장제스가 콧잔등을 쓸어내렸다.
“중공뿐 아니라 미국, 한국에 대한 작은 것 하나 놓쳐선 안 돼. 알겠나?”
넓디넓은 대륙을 공산당에 내준 채 섬으로 망명한 장제스에게 한국전쟁은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이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한국에 전면 개입하자, 그간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유일무이한 기회가 왔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물론 미국은 국부군을 파병하겠다는 그의 말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특히 맥아더 사령관은 대만을 중공으로부터 지키기도 힘든 판국에 놓인 국부군의 장비 상태 불량, 조직 정비 불량, 사기 불량을 이유로 장제스의 파병제안을 수차례 거절했다.
“예! 작은 움직임도 절대 놓치지 않겠습니다.”
“수고하게. 나가봐.”
“예!”
대륙이 섬을 정벌하는 것보다, 섬이 대륙으로 나아가는 것은 수십 배, 수백 배는 어려운 일이다.
중일 전쟁과 국공 내전을 겪으며 군사와 경제가 박살 난 후라면 더욱이.
“이미 도화선에 불이 붙었단 말이지···”
제자리에서 움직임 없이 한참을 고민하던 장제스가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
금천군 시변리.
격파된 T-34 전차가 길을 모조리 막아버린 탓에, 길을 조금 우회에 시변리에 들어섰다.
시변리의 작은 언덕마다 북한군이 토치카를 만들어 아군의 진격을 늦추고 있었다.
“항공 지원은?”
“다시 한번 무전 해보겠습니다.”
“아니야. 안 해도 될 것 같네.”
하늘에 뜬 작은 점 여러 개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작은 점은 시간이 지나며 전투기, 폭격기의 형태로 바뀌었다.
-쾅! 쾅! 쾅! 쾅! 쾅!
공중 폭격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건 토치카였던 것과 북한군이었던 것, 폭격에 한 번에 죽지 못하고 삶의 의지를 상실한 북한군뿐이었다.
-쾅!
패튼 전차가 반쯤 부서진 토치카에 확인 사살이라도 하겠다는 듯, 포격을 가해 완전히 부숴버렸다.
특공연대와 미 전차 중대는 크고 작은 전투들을 함께 겪으며 서로에게 융화되어갔다.
“이··· 이 국방군 미제 앞잡이 새끼들···”
어찌 살아남았는지 모를 북한군들은 진지 밖으로 나와 무작정 북쪽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탕!
도망가던 북한군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특공연대원들은 그들에게 기회를 줬다.
삶의 의지를 포기해버린 이번 생을 빨리 끝내고, 다음 생을 시작할 기회를.
-동무, 동무. 대답하라.
토치카 안에 북한군이 사용하던 무전기가 울리고 있었다.
나는 토치카 안으로 들어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동무, 말하라.”
-시변리 방어선이 무너진 게야? 사실대로 말하라. 만약 무너졌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끌라.
응. 무너졌는데, 진작에.
시간을 끄는 것도 안 될 것 같고.
“동무, 김일성 동지는 어디 계신가. 잘 탈출하셨나?”
아직 평양에? 아니면 진즉 도망갈 곳을 찾아 도망갔으려나?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장본인들은 잘 계신지 문득 궁금해졌다.
-뭐이야? 동무가 시변리에서 김일성 동지는 왜 궁금해··· 이보라우. 너 누구야.
수신자가 바뀌었다는 걸 이제야 알아챈 모양이다.
애초에 큰 기대도 안 했지만, 이 무전으로 어떤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어려울 듯 보였다.
그렇다면.
“동무. 김일성 개새끼 해보라. 아니면 스탈린 개새끼도 괜찮아.”
-이··· 국방군 나부랭이 아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사지를 찢고 창자를 뽑아버리갔서.
“뽑아 봐.”
-뭐이 간?
“그보다 빨갱이 동무. 살고 싶으면 지금 당장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주변에 간간이 들리던 총성이 어느덧 완전히 멈췄다.
금천군 북쪽 시변리가 완전히 아군 손에 들어왔기 때문일 터.
“연대장님, 시변리 일대를 모두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미 10군단이 안주에 무사히 상륙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고 많았네.”
보고를 받은 뒤에도, 수화기에선 뭐라고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도 없는 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전을 끝내기 위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봐, 동무. 아까 살고 싶으면 도망치는 게 좋다고 했던 말 취소하지. 동무는 이미 늦은 것 같거든.”
위로, 아래로.
평양은 완벽하게 포위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