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평양(1)
동이 터옴과 동시에, 땅에서도 동이 트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B-29 폭격기가 지동리 야산을 지나며 떨어트린 폭탄이 불길을 만들어 주변을 밝혔다.
-쾅!
후방 포병대대의 곡사포 포격 지원까지 어우러져 지동리 야산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항공지원과 포격이 야산과 야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킬 것처럼 떨어지지만, 북한군은 진지를 깊게 파거나 굴 안에 몸을 숨기고 있다.
화력지원은 꼭 필요하긴 하지만, 화력지원만으로는 목표를 점령할 수 없는 이유였다.
다만 포격이 이어지는 동안은 진지 밖으로 머리 한 번 내밀지 못한다.
우린, 그 틈을 노릴 것이다.
“공격 준비!”
특공연대의 공격 준비선과 북한군 지동리 방어선까지의 거리는 대략 1.5KM.
아무리 체력이 좋은 군인도 군장과 개인화기를 소지한 채 1.5KM를 전력 질주하는 건 쉽지 않다.
거기서 끝이라면 모를까, 포격이 끝나면 북한군이 머리를 들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전투는 그때부터 시작이나 다름없다.
“가자! 이랴!”
가장 선두에서 먼저 달려나간 부대는 장철부 중령이 이끄는 기마 대대였다.
잘 훈련된 군마는 무장한 기수를 태우고 시속 60KM의 속도로 달려나갈 수 있다.
단순히 계산하자면 대략 1분이면 적과의 전투가 가능한 거리에 들어선다.
“이랴! 공격 개시!”
250마리의 군마가 땅을 박차며 적지로 달려가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포격으로 인한 먼지와 그을음을 비벼 없애고 고개를 들었을 때, 북한군 눈앞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멈추지 않을 듯 달려오는 기마대였다.
포격이 끝난 후 1분이 정신을 차리기 충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혀 아니다.
임금은 수라상에 독이 들었나 확인해주는 기미 상궁이라도 있었다지만, 포격이 끝났는지는 그 아무도 확인해주지 않으니까.
“좌우로 대형 전개! 대형을 좌우로 펼친다!”
적 방어선에 인접하자, 장철부 중령의 지휘 아래 기마 대대가 가운데를 비운 채 좌우로 흩어졌다.
좌우로 흩어진 기마대는 최전방에 돌출되어있는 적들을 공격해 나갔다.
-탕!
누군가는 권총을 쏘고, 누군가는 소총에 착검한 대검으로 북한군을 베었다.
포격과 총성에 잔뜩 흥분한 군마들은 발에 치이는 것들을 모조리 밟아나갔다.
“좌선, 우선 모두 후퇴한다! 후퇴!”
당황한 북한군이 혼비백산하는 사이, 기마대는 유유히 달려왔던 속도 그대로 전선을 이탈했다.
기마 대대의 무장은 기동력을 높이기 위해 매우 가벼운 경무장을 하고 있기에, 북한군들의 토치카를 파괴하거나 중화기를 상대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북한군 토치카가 불을 뿜으려는 찰나.
“동···동지 앞 좀 보시라요! 벌써 국방군 땅크들이 코앞에 와 있습네다.”
쾅!
기마 대대가 좌우로 흩어진 중앙에서 진격하던 패튼 전차의 주포가 기다렸다는 듯 불을 뿜었다.
이제 막 번쩍이는 불꽃을 뿜으려던 토치카는 이내 고요한 자연으로 되돌아갔다.
쾅! 쾅! 쾅! 쾅! 쾅!
나머지 5대 패튼 전차의 주포가 적 방어선 중심부에 있는 토치카, 진지에 날아들었다.
밀러 중위의 전차 중대는 기마 대대의 부족한 화력을 완벽히 채워주었다.
“로케트. 로케트 포 가져오라! 동무들, 여기가 뚫리면 평양도 끝장이야! 물러서지 말고 국방군 아새끼들과 맞서 싸우라!”
북한군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바주카를 패튼 전차에 쏘아내려는 순간.
-탕!
바주카를 들고 있던 북한군 이마에 작은 구멍이 생기며 그대로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즉사한 북한군 신경이 손가락을 자연스레 수축시켰는지, 고꾸라진 상태로 바주카가 발사됐다.
-펑!
본인 장례는 본인이 치르겠다는 의지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자리에 남아있는 건 반쯤 동강 나버린 바주카뿐이었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패튼 전차 뒤에서 엄호를 받으며 방어선에 도착한 특공연대가 방어선을 휩쓸어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멀쩡한 토치카가 5개는 되어 보였다.
쾅!
‘이제 4개.’
살아남은 토치카 중 위협적으로 중화기를 쏴대는 토치카는 한 곳도 없었다.
항공 폭격과 포병 포격, 기마 대대에 이은 전차포 사격.
곧바로 후속해 들이닥친 보병까지.
토치카에 들어가 제대로 정비할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불을 뿜는 토치카는 패튼 전차의 최우선 과녁이 되어 박살 나고 있었다.
“이랴! 빨갱이들에게 매운맛을 보여주자!”
후퇴했던 기마 대대가 지동리를 크게 돌아 다시 전선에 합류했다.
기마병 총에 맞아 죽는 북한군보다, 말발굽에 밟혀 죽는 북한군이 더 많았다.
“연대장님. 놈들이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고 있습니다. 추격할까요?”
장철부 중령이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물었다.
“아니. 도망치도록 놔두게. 저놈들이 어디로 도망가도, 도망가는 그곳이 지옥이 될 테니까.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죽음뿐이야.”
전투가 벌어지기 전 했던 생각이, 점차 현실이 되어 눈앞에 벌어졌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기마 대대는 지동리 인근 잔당을 소탕하겠습니다. 이랴!”
군마 고삐를 당김과 동시에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멋진데?
나도 말이나 타볼까.
***
지동리 외곽 산기슭.
지동리 방어선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 28연대.
연대장이 있는 곳이 연대 본부라면, 지금 북한군 28연대 본부는 외딴 산기슭 어딘가였다.
“으···”
김영철 대좌가 분에 바친 신음을 내뱉었다.
폭격, 전차로도 모자라 달려오는 말까지.
정신을 차려보니 지동리 방어는커녕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도망치고 말았다.
도망치고 싶어 도망친 게 아니다.
정말로 발이 스스로 움직였다니까.
정말이다.
“대좌 동지. 몸 다치신 곳은 없습네까?”
“동무, 지금 이게 연대 병력 전부란 말이오?”
돌아보니 어림잡아 100명 정도 되는 패잔병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북한군 28연대의 최초 편성된 병력은 2500여 명.
모조리 죽은 건지, 다른 곳으로 도망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2대대 동무들 일부가 다른 능선으로 후퇴하긴 하였으나···”
“그만. 말할 필요 없소.”
어차피 어디로 사라졌건 불러 모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 불러 모으면 뭐하겠는가?
며칠을 공들여 지은 토치카와 진지를 품에 꼈음에도 적의 공세 한 번에 방어선이 초토화됐다.
패잔병 나부랭이들을 모아 적을 지연해보겠다는 건, 목숨을 버리는 것 외에 그 어떤 의미도 없다.
“남은 전사들과 어서 돌아가 평양을 지켜야 합네다. 지동리가 뚫렸으니 평양이 위험합네다. 동지.”
“어이, 동지.”
발걸음을 멈춘 뒤, 아까부터 따라오며 쫑알거리던 정치 장교에게 경고를 날렸다.
“한 번만 더 입 열면 죽는기야. 알갔네?”
평양?
염병할 평양은.
책임을 물어 숙청당할 것이 뻔하다.
그게 아니라면, 또 어디서 영혼까지 긁어모은 오합지졸을 데려다 평양을 지키라며 고기 방패를 세울 테고.
‘이 김에 만주로 넘어가야겠다.’
어차피 이제 북조선은 입김 불면 꺼지는 촛불 신세에 불과하다.
망해버린 나라 따위.
“지···지금 당에서 보낸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단 말 입네까? 그건 당에 대한 반역 행···”
-탕!
정치장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소련 군사고문단으로부터 선물 받은 토카레프(TT-33), 일명 떼떼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에 그대로 머리가 뚫렸다.
“거참. 한 번만 더 입을 열면 죽는기라니까. 어이! 이 자리에 있는 동무들 모두 들으라! 이 김영철이를 따라오는 것은 상관없지만, 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이렇게 되는 기야. 동무들 발을 채운 족쇄는 없어.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몇 초 전까지 살아있던 정치장교의 머리통을 발로 차며 말했다.
“이런 빌어먹을 아새끼가 전쟁에 대해 뭘 안다고 씨부리고 자빠졌어.”
갑작스레 울린 총성이었음에도, 근처에 있던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정상적인 사고를 통해 상황을 판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지 오래였다.
그저 초점 흐린 눈과 입을 꾹 다문 채 연대장이었던 김영철 대좌 뒤를 따를 뿐이었다.
북쪽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무작정 걷다 보니, 계곡지형 한 가운데였다.
양옆 고지대에 우거진 수풀과 바위가 빼곡했다.
“내래 이런 곳에 매복이라도 있었으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디.”
맨 뒤에 따라오던 병사까지 모두 계곡으로 들어선 그때였다.
철-컥.
이 평화로운 계곡에 들려선 안 될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장전 손잡이를 당겨 장전하는 듯한 소리.
“사격 개시!”
미리 매복하고 있던 특공연대 매복 조장의 짧고 굵은 외침이 계곡에 메아리쳤다.
그리고는 이내 수백 발의 총탄이 계곡에 쏟아져 내렸다.
쉴새 없이.
-탕! 탕! 탕! 탕! 탕! 탕! 탕!
김영철 대좌를 비롯한 북한군 28연대 소속 패잔병 100여 명이 모두 쓰러지기까지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모두가 쓰러져 미동조차 없자, 계곡 양쪽에 매복해 있던 매복 조원들이 계곡으로 내려와 북한군이 완전히 죽었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중대장님. 대좌 1명, 군관 5명 포함 총 101명 전원 사살했습니다.”
보고를 받은 중대장은 그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연대장이 말했듯, 이곳이 그들의 마지막 지옥이었으니까.
***
율리 북서단. 평야.
지동리 방어선을 뚫어내자 수안, 율리는 거의 저절로 점령되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평양에 더 가까워질수록 북한군 패잔병들이 도망가며 간간이 심어놓은 지뢰를 제거하는데 시간이 소요될 뿐, 적과의 교전으로 허비되는 시간은 없었다.
“드디어 이 빌어먹을 산이 끝났군요! 좋았어.”
아주 넓게 펼쳐진 평야를 본 전차 중대장 밀러 중위가 잔뜩 신이 났다.
지금까지는 험한 산악 지형과 좁은 도로 때문에 전차의 성능을 100%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해치 안으로 들어가 무전기를 잡고 몇 마디 하자, 해치에 나와 있던 전차병들이 함께 환호성을 질러댔다.
“연대장님. 저기 평양이 보입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군. 긴장을 늦추지 말게.”
드넓은 벌판 지평선 끝에 걸린 평양이 보였다.
200필이 넘는 기마대, 육중하고 든든한 전차 중대.
거기에 어디에 내놓아도 최정예임을 부정하지 못할 특공연대 보병이 동과 서를 가로질러 벌판을 지나는 모습은 그 어디서도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드디어 평양이 코 앞이군.’
평양으로 가는 이 넓은 허허벌판을 함께한 모든 전우와 지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두를 살리지 못한 아쉬움도 분명 있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특공연대는 지금까지 중과부적인 적을 맞아 격파해가면서, 전투력을 거의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의 생사고락도 이들과 함께였다.
“지휘관들은 막사 안으로. 밀러 중위 자네도 들어와.”
이제 정말 평양점령까지 남은 관문은 단 하나.
평양이라는 관문 그 자체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