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평양(2)
평양.
이 시기 평양은 굽은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동평양과 본평양으로 나뉘어 불리고 있었다.
“연대장님, 여기서부터는 선교리입니다.”
특공연대는 이미 지동리를 통과해 선교리에 도착했다.
평양 선봉의 명예를 얻은 것 치고 크게 기뻐하거나 탄복하는 부대원은 없었다.
동평양에는 미립 비행장, 논과 밭들이 몰려있는 것에 반해 본평양에는 김일성 대학, 모란봉, 관공서와 같은 핵심 건물들이 몰려있었다.
적 수도를 점령했다는 감흥을 제대로 받기 위해선, 푸른 빛으로 넘실거리고 있는 대동강을 건너 본평양으로 입성해야 할 것 같았다.
“미 1 기병 사단은 어디까지 진출했지?”
“아마 늦어도 3시간 후면 선교리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 발이 아니라 세 발은 빨랐습니다.”
지동리를 지나고 선교리에 도착하기까지, 연대 전력을 다 투입해야 할 만한 전투는 없었다.
북한군 최고 사령부는 평양사수를 위해 3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새롭게 편제했다.
평양 방위군은 억지로 끌고 온 사람들에게 군복을 입혀 부대의 형태를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훈련을 제대로 못 받은 건 둘째 치더라도, 지도부들이 속속 평양을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부터는 그 흔해 빠진 명분조차 없었다.
명분으로 가득 찬 정예라 한들, 북쪽에서 내려오는 미 10군단, 좌측에서 올라오는 미 24사단, 남쪽 정면을 돌파해 올라오는 미 1 기병 사단을 모두 막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겠지만.
“미 1 기병 사단 선봉이 도착할 때까지 선교리에서 대기한다.”
“연대장님.”
“말하게.”
김상옥 중령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꼭 미 본대를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괜히 기다렸다가 평양 중심부에 서로 먼저 입성하고 싶은 마음으로 인해 분쟁이 생기진 않을지 우려됩니다.”
1대대장의 우려는 현실적으로 일어날 법한 일이다.
미 1 기병 사단은 사실상 평양으로 북진하는 연합군의 주력이었을뿐더러 압도적인 차량과 화력을 보유한 사실상 평양에 선봉으로 입성하지 않으면 이상한 부대였다.
선봉을 빼앗겼단 사실이 당연히 달가울 리 없다.
“저기 끊어진 대동교가 보이나?”
대동교는 동평양과 본평양을 연결하는 교량 중 가장 큰 교량이었다.
북한군이 과거 끊어진 한강철교를 보는 느낌이 이랬을까?
선교리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북한군이 후퇴하며 대동강에 설치된 교량들을 폭파한 뒤였다.
“미 1 기병 사단이 그토록 자랑하던 차량, 기갑전력과 함께 대동강을 넘으려면 저 대동교를 복구하거나 임시 부교를 건설해야겠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선교리가 위치한 곳은 대동강 중류.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제대로 된 도하준비 없이는 건너는 게 불가능하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공병대를 아무리 쪼아댄들, 하루 반나절은 족히 걸릴 것 같습니다.”
“우리가 미 1 기병 사단과 함께 이곳을 도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네.”
고작 편히 도하 하기 위해 금 같은 시간을 써가며 미 1 기병 사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김상옥 중령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꽤 가슴을 졸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각 부대 지휘관에게 군기가 풀어지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전달하게. 아직 전쟁이 끝난 게 아니야.”
평양을 완전히 점령한다 해도,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어쩌면 이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일지 모르니까.
***
고된 행군 탓에 발바닥이 멀쩡한 인원이 극히 드물었다.
이 무거운 군화를 벗어본 지가 언제였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야 물론 나노봇 덕에 발이 뻐근한 정도에 그쳤지만, 부대원 일부는 군화 안에서 발이 부어버린 탓에 군화를 벗으려 시도할 때마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연대장님, 저기 오는 것 같습니다.”
지평선 끝이 검게 변하고 있었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미 1 기병 사단이 들판을 건너오는 중이었다.
특공연대가 선교리에 도착한 지 2시간이 지난 후였다.
“어찌 이리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던 거지?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자네들을 공수 부대라고 착각할 법도 하겠군. 서로 인사하게. 여기는 미 1 기병 사단장 호바트 게이 소장.”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넨 이는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었다.
양어깨에 걸친 벨트를 푼 채 차량에서 내리는 걸 보니, 아주 뿌듯했다.
미군 수뇌부가 이곳 선교리까지 행차한 것으로 봐선, 간간이 게릴라 공격을 해오던 적들까지 깔끔하게 정리가 된 모양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국군 특공연대장 이강산 대령입니다.”
“미 1 기병 사단장, 게이 소장일세.”
휴, 큰일 날 뻔했다.
게이 소장이라는 관등성명을 듣는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당황스러움을 표출하려던 입꼬리를 간신히 붙잡아 내렸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다니, 상당히 운이 좋았던 모양이군.”
아휴, 그럼요.
어련하시겠어.
그냥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게이 소장의 태도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고작 전차 중대와 막바지에 합류한 기마대, 2개 보병대대로 이루어진 특공연대에 선봉을 뺏긴 게 매우 언짢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워커 중장과 허물없이 대화하는 걸 보면 높은 계급과 직책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강산 대령 이쪽으로 오게, 이쪽은 로우 소장. 대통령 각하 특사 임무를 맡아 이곳에 왔네.”
특사라.
트루먼 대통령 정신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좌뇌와 우뇌 둘 중 하나쯤은 이 전쟁에 할애하고 있을 것이다.
그보다···
로우 소장, 당신도 내 팬클럽 할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강산 대령입니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인사와 동시에 세상 친절한 미소를 함께 건넸다.
“오, 말로만 듣던 이강산 대령을 여기서 보게 되는군. 이곳저곳에서 이야기 많이 들었네. 먼저 동평양에 도착했을 줄이야.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이제 시작일 뿐인데, 대한민국을 넘어 미국까지 소문이 난 모양이다.
내내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이 소장과 상반되어서인지, 로우 소장의 칭찬에 더 기분이 뿌듯해져 왔다.
“자, 교량 복구는 공병대에 맡기고 우리는 막사로 가서 서로 간 앞으로의 작전계획을 검토하도록 하지. 가세.”
워커 중장이 차량에 올라탄 뒤, 벨트를 양어깨에 걸었다.
아무래도 저 양반, 이번 생에는 오래 살려는 모양이다.
***
미 1 기병 사단 지휘소.
규모가 조금 크다는 것만 제외하면, 미군 지휘소라 해서 별다른 건 없었다.
지휘소 안에서 통용되는 말이 영어냐, 한국어냐의 차이일 뿐이지.
“공병대장에게 보고받기로는 교량을 복구하는데 최소한 30시간은 필요하다는군.”
일 단위가 아닌 시간 단위로 말하는 것으로 보아 공병대의 젖먹던 힘까지 갈아 넣을 모양이다.
“사령관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정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앉기 전부터 이미 나눌 대화의 기승전결을 정해둔 참이다.
시간이 많다면 게이 소장의 찡찡거림을 조금은 받아줬겠지만, 이미 이 대화를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은 만큼, 판을 짜고 대화를 주도해나가야 한다.
“부탁? 말해보게. 자네가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거나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것은 아닐 테니.”
워커 중장이 보란 듯 흔쾌히 대화의 주도권을 승낙했다.
그의 승낙이 떨어졌다면, 이번엔 압박이 한번 들어올 차례다.
“이봐 자네, 이 자리에서 무작정 평양 진격에 우선권을 달라 우기진 않겠지? 미 공병대가 복구한 교량에 가장 먼저 발을 들이겠다던가.”
예상대로 게이 소장의 압박이 들어왔다.
이 정도 압박은 입 재간 한 번이면 풀어진다.
“아닙니다. 어찌 공적에 눈이 멀어 그런 부탁을 드리겠습니까.”
“눈이 멀어? 지금 나보고 하는···”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게이 소장의 눈이 점점 빨개졌다.
“게이 소장, 이 대령이 아직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네. 좀 차분히 들어보지.”
워커 중장의 중재에 게이 소장이 입을 다물었다.
드리블 한 번 쳤을 뿐인데, 두 명을 제친 기분이었다.
“대동강 이북 평양엔 수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특히 대동문, 을밀대, 연광정 이곳 일대 말입니다. 이 부근엔 포격을 제한해 주셨으면 합니다.”
“도하 작전 중 포격을 하지 말잔 소린가?”
그럴 리가.
포격은 적에게 할 일이지, 문화재에 할 일은 아니었다.
“물론 포격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도상에 표시하는 이곳들에 대한 포격만 조금 신중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곳들은 문화재가 있을 뿐, 적에게 유리한 지형이라던가 애써 방어할만한 곳이 아니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북한군이 미치지 않고서야 나라가 없어질 판에, 문화재를 지키겠다며 병력을 집중시켰을 리 없다.
친절히 문화재가 많이 분포해 있는 곳에 일일이 표시를 남겼다.
어차피 지금 평양에 있는 문화재들은 곧 대한민국 문화재가 될 테니까.
“이렇게 정확한 위치 정보가 있다면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안 그런가?”
워커 중장이 게이 소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판에서 게이 소장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은 하나뿐이다.
수긍하는 것.
내 의견에 반대하는 건, 남의 나라 문화재를 포격해 부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광범위한 곳을 포격하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정확한 위치까지 제공한 이상, 거절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포병대에 한국군의 특별 요청이라 전달해두겠습니다. 연대장, 부탁은 끝났나?”
아직.
두 가지라고 했잖아.
“한 가지 더 남았습니다.”
게이 소장의 표정을 보니, 자신의 수비력으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모양이다.
“현재 특공연대가 관리해야 할 포로의 수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특히 지동리부터 이곳에 도착하면서 늘어난 숫자만 350명이 넘습니다. 포로에 대한 최소한의 대우를 갖추고는 있지만, 버거운 판국입니다.”
두 번째 부탁은 포로를 미 1 기병 사단이 관리하도록 넘기기.
더 쉽게 말하면 짬 때리기였다.
“참나, 귀찮은 일은 죄다 넘길 생각인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미군은 자네 엉덩이 닦아주는 곳이 아닐세.”
압박에 이어 들어온 태클.
“포로 관리에 대한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십, 수백 년은 따라다닐 꼬리표입니다. 귀찮아서가 아닌, 전쟁포로 대우에 대한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특공연대에는 미 전차 중대도 소속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발끝을 높이 쳐들고 들어오는 태클을 쉽게 피해냈다.
“혹여나 나중에라도 이 나라를 목숨 바쳐 지켰던 미군 명예에 작은 흠집이라도 생길까 해서 한 우려였습니다. 게이 소장님께서 괜찮다고 하신다면야··· 제 부탁은 이게 전부입니다.”
심판이 못 본 사이, 얄미운 발끝을 살짝 밟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쟁포로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매우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대령이 참 사려가 깊군. 이 대령의 부탁은 미군을 위해서라도 수락함이 어떨까 합니다만.”
로우 소장이 자신의 관련 분야라는 듯 나섰다.
이번에도 외통수다.
전쟁포로 문제는 안중에도 없는 무자비한 사단장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지.
“자, 그럼 교량 복구가 완료된 뒤엔 어떻게 할지 얘기해 봄세.”
부탁보단 청탁에 가까운 시간이 끝난 뒤에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미 1 기병 사단이 먼저 도하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게이 소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금 상황에서 먼저 도하 한다는 건, 먼저 도착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말 괜찮겠나? 평양만큼은 한국 정부에서도 한국군이 먼저 발들이길 고대하는 곳 아닌가.”
“예. 정말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다.
나는 알아서 할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