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평양 만수대(1)
순간 주변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한겨울 칼날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자네는 상관이 묻는데 대답도 안 하나? 묻잖아. 뭐냐고.”
장철부 중령과 설전이 오가던 자 머리에 그려진 두 개의 태극문양으로 계급을 알 수 있었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차가운 어투로 물었다.
“···”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하는 건 그 중 순위권을 다투는 방법이다.
“연대장님.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려던 찰나, 장철부 중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마대의 말 5필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물론 단호히 거절했지만, 물러가지 않아 이런저런 언쟁이 오가던 중, 연대장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기마대 말을 빌려달라? 이거 순 미친놈 아냐.
왜, 목숨도 좀 빌려달라 하지.
기마대에 말을 빌리는 논리는 목숨을 빌려달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소리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자가 어디서 굴러온 돌덩이냐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입에 재갈이라도 물려놓은 듯 굳건히 닫혀있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저는 국군 7사단 8연대장 김용주 중령입니다.”
7사단?
내가 알고 있는 국군 7사단의 작전지역은 평양과 인접하긴 하다만, 평양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김용주 중령을 따르는 부대는 중대 규모에 불과했다.
“8연대가 왜 다른 부대 작전지역을 넘어온 게지? 자네 독단적인 행동인가? 지금부터는 말을 신중히 하는 게 자네 신상에 이로울 거야. 김용주 중령.”
사실 김용주 연대장의 단독행동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평양에 눈이 멀어 작전지역을 이탈한 것이라면, 고작 중대 병력이 아닌 연대를 전부 끌고 왔어야 앞뒤가 맞는다.
내 예상대로라면, 그는 지금 특사와 비슷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일 터.
“사단장님께서 평양 선봉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따라서 평양과 가장 가까이 있던 8연대가 대동강을 건넌 것입니다.”
어머, 이런 염병할?
기가 차서 웃기지도 않는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아무리 여기저기 가져다 붙여도 말이 되는 게 한글의 위대함이라지만, 평양 탈환도 아니고 평양 선봉 탈환?
인류애 떨어지게 만드는 소리다.
“자칫하면 아군끼리 오인사격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네. 순위 경쟁을 하기에 전쟁터는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얌전히 돌아가게. 얌전히 돌아간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대화는 없던 것으로 하겠네.”
아군 간 정확한 소통 없이 작전구역이 겹칠 경우, 매우 위험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지금이 주간이었기에 망정이지, 야간이었다면 이미 교전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돌아가 전달하겠습니다. 사단장님의 명령을 따랐을 뿐, 그 어떤 악의도 없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용주 중령이 죄송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모르겠지만, 내 눈엔 악어의 눈물로 보일 뿐이었다.
“조심히 돌아가게. 평양에서 볼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짧은 경례를 마친 김용주 중령이 뒤를 돌았다.
“연대장님. 저런 싹수없는 놈을 그냥 보내시는 겁니까?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대체 말은 왜 빌리려고 했던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옆에서 묵묵히 대화를 지켜본 김상옥 중령이 물었다.
“그야 모르지. 설마 군마를 타고 평양을 유유자적 돌아다니며 외신기자 눈에 띄어 멋진 사진이라도 찍히고 싶어서 그랬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안 그런가 기마 대장?”
중대급 지휘를 연대장이 직접하고 있는 것 하며, 말을 빌려달라는 게 설마 평양 어디서 몰래 깃발이라도 꽂아 사진을 먼저 찍으려는 개수작은 아니길 바랐다.
쓸데없는 노력이 될 테니까.
“아무리 공적에 눈이 멀었다 한들, 설마 그럴 리가 있습니까.”
장철부 중령의 진심으로 부정하는 눈을 보니, 아직 사람에게 덜 데어 순수한 면이 남은 모양이다.
“가지. 우리는 우리 임무에만 집중하면 되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많이 허비했군.”
사람이 욕심과 탐욕을 그리 빨리 도려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아니라면 왠지 8연대를 평양에서 또 만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김일성 종합 대학을 점령한 뒤, 다음 점령 목표는 만수대였다.
중앙청이 서울의 상징적인 건물이라면, 평양의 상징은 김일성 집무실이 있는 만수대.
나부끼는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게양해야 할 곳이기도 했다.
“연대장님. 도하 준비를 마친 미 기병 1사단이 작전을 개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7사단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역시.
무럭무럭 자라난 욕심과 탐욕은 그리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뭐라던가. 인접해 있는 8연대가 특공연대를 도와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잔적 소탕 작전을 펼치겠다고 하던가?”
“죄송합니다. 이미 직접 보고 받으셨는지 몰랐습니다.”
통신장교가 한발 늦어 죄송하다는 말을 전해왔다.
“괜찮아. 죄송할 필요 없어. 타 부대와 작전지역이 겹치지 않도록 통신을 긴밀히 유지하도록 수고해주게.”
통신장교의 말처럼 직접 보고받은 적?
당연히 없었다.
그저 평양을 호시탐탐 노리는 8연대가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작전지역에 들어오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럴듯한 핑계라고 해봐야 퇴로 차단과 잔적 소탕이 전부였으니까.
미 1 기병 사단이 선교리를 중심으로 복구된 교량들을 이용해 평양 남쪽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무렵, 특공연대는 어느덧 모란봉 일대를 지나고 있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는 살려줘라!”
아직 발악할 힘이 남았는지 건물이나 엄폐물에 숨어 맹렬히 저항하는 북한군이 있는 반면에, 상당히 많은 수의 북한군이 무기를 버린 채 투항해왔다.
“생각보다 투항해오는 적이 많습니다. 예상보다 빨리 만수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대장님. 최대한 서두르겠습니다.”
김상옥 중령의 표정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8연대 일부가 특공연대를 초월해 만수대를 점령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 같았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네. 8연대는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보다 자네는 왜 북한군이 시가지처럼 본인들이 유리한 전투환경을 가졌음에도 투항해오는지 알겠나?”
시가지는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비대칭적인 전투로 공격하려는 부대에 시간과 희생을 강요해 후퇴시키기 좋은 곳이 시가지다.
“정부 인사나 군 지휘부도 자신들을 놓고 떠나는 마당에, 전투 의지를 상실한 것 아니겠습니까?”
김상옥 대대장이 말한 정답은 틀리진 않았지만 100점을 줄 순 없는 답변이었다.
“전투 의지를 상실한 것도 틀리진 않았네만, 저들은 전투 의지보다 더 큰 것을 잃었어.”
“그게 무엇입니까?”
“정의. 지금 저들은 본인들이 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정의를 잃었네.”
가장 치열한 전쟁의 배경을 들여다보면, 항상 정의와 정의가 맞붙는다.
인간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의 원동력을 얻는다.
“정의라면···”
김상옥 중령이 쉽지 않다는 듯 목덜미를 긁었다.
정의?
정의라는 단어가 어렵고 거창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모든 전투가 치열하지만, 이 전쟁에서 적과 아군이 가장 치열했을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하나?”
“아무래도 개전초기였던 것 같습니다.”
“맞아. 그땐 저들도 정의가 있었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와 같이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자도, 터전을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도.
아주 치열하게 싸울 이유인 정의는 충분하다.
전쟁은 시작부터 인간을 광기에 빠트린다.
코피만 나도 호들갑 떨던 사람이 길가에 나뒹구는 시체를 봐도 아무렇지 않게 변하고, 벌레를 무서워하던 사람이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거나 칼을 쑤셔 박는 것에 전혀 거침이 없어지는 것처럼.
그런 초기의 과정을 겪고 나면 한가지 드는 의문이 있다.
왜?
지금의 북한군은 왜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한다.
핍박받는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해 주겠다는 아주 기가 막힌 정의로 전쟁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의는 사라져 갔다.
자신이 살기 위해 명령대로 전우의 발목에 쇠사슬을 채워야 했고, 아무런 죄가 없는 민간인을 학살해 부비트랩을 만드는 건 자신들이 생각한 정의와 거리가 멀었을 테니까.
“연대장님! 진격할수록 포로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고 있습니다. 투항하지 않는 놈들은 진지를 도망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만수대입니다.”
2대대장 문기준 중령이 전투 상황을 보고해왔다.
“평양 시민이나 투항병을 사격하는 일이 없도록 각 지휘관에게 다시 명령하고, 전에 말한 선무 작전을 준비하게.”
60만 인구가 밀집한 평양 같은 대도시를 점령하는 것은 적의 군대만 몰아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전투 이후에 할 일이 더 많다고 느낄 정도의 일거리가 발생한다.
점령지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선무(宣撫) 작전은 빼놓아선 안 될 작전 중 하나였다.
“손 머리 위로 들어!”
“제···제발 쏘지 마시라요. 저는 지금껏 총 한번 안 쐈습네다. 살려주시라요.”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북한군은 많아 봐야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앳된 청년이었다.
저 어린 북한군의 말처럼 정말 총 한 번 안 쐈는지, 수도 없이 국군을 향해 총을 쏴댔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떤 것이 맞고 틀렸는지를 떠나 마음 한쪽이 아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짜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은 저 앳된 청년에게 군복을 입히고 총을 건네준 새끼들이니까.
“만수대 일대를 점령했습니다. 만수대를 샅샅이 수색한 결과, 김일성이나 고위급 인사는 없었습니다.”
돼지가 이미 자신의 거주지인 돼지우리를 버리고 도망간 모양이다.
애초에 김일성이 만수대를 지키고 있을 확률은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무렇지 않았다.
혹시나 특공대가 높은 덫에 걸리진 않았을까? 라는 작은 기대를 할 뿐.
“알겠네. 인구가 밀집한 곳에는 분대를 보내 치안을 유지하고, 시민들에게는 국군이 왔으니 아무런 걱정 없이 일상을 보내라 안심시키도록. 남은 병력은 남쪽에서 후퇴하며 올라올 적과 전투를 준비한다.”
“예! 알겠습니다.”
간간이 총성이 들려왔다.
총성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을 보니, 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총성이 다시는 들리지 않을 때까지, 전투는 끝난 것이 아니다.
“여긴가?”
북한 최고급 돼지우리 만수대 김일성 집무실에 들어섰다.
꽤 급했는지 먹던 먹이가 그대로 집무실 책상에 남아있었다.
‘이런 돼지 새끼···’
이 책상에서 남침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벌써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지만, 아직 끝을 알 수 없는 전쟁이.
“연대장님. 8연대 놈들이 설치기 전에 태극기를 먼저 게양하심이 어떨까 합니다.”
그래, 태극기.
돼지우리에 대한 감상은 이 정도로 접어두고, 점령한 우리의 국적을 바꿀 차례였다.
“벌써 설치고 싶은 놈들이 온 모양이네.”
창밖으로 말에 올라탄 국군 몇몇이 만수대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맨 앞에 있는 얼굴은, 멀리서 보아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뭐, 어딜 가도 의미 없는 짓거리하는 놈들은 꼭 있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