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평양 비행장
평양 비행장.
평양 일대 방공을 책임질 대공포가 촘촘히 배치됨과 동시에 정찰기와 전투기들의 비행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승인되지 않은 물체가 평양 상공에 나타난다면,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방어 태세였다.
“곧 착륙한다고 합니다.”
거대한 위용을 뽐내는 C-54 수송기가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평양 비행장에 서서히 착륙했다.
수송기 몸체에 그려진 커다란 별 문양이 미 공군 수송기임을 알리고 있었다.
C-54 수송기가 완전히 활주로에 멈춰 서자, 미군이 재빨리 사다리형 계단을 문 앞에 가져다 댔다.
“오랜만이군. 이강산 대령.”
C-54는 맥아더 사령관의 전용기로 쓰이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선글라스와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문 채 손을 흔들며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평양까지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령관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예정에 없던 아주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니 궁금증이 샘솟았다.
“뭘 이렇게들 거창하게 나와 있는지 모르겠군. 나는 자네만 있으면 되는데 말이야.”
맥아더 사령관쯤 되는 거물이 움직이는 건, 본인은 간단하게 생각할지 모르나 방문지 근처에 있는 부대는 그리 간단하게 느껴지는 일이 아니다.
아마 저기 이 활주로에 서 있는 미군 중 절반 이상은 속으로 쌍욕을 내뱉고 있을걸?
“지휘소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입니다. 사령관님.”
서둘러 맥아더 사령관을 차량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저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주는 방법은 맥아더를 지휘소로 서둘러 데려가는 방법뿐이니까.
미리 운전병이 시동까지 걸어놓은 채 대기하던 차량에 올라타려던 찰나.
“펀치 중령, 뒤에 있는 차를 타고 오게. 나는 이 대령과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맥아더 사령관이 자신의 부관인 펀치 중령까지 뒤로 물리며 내가 탄 차량에 올라탔다.
아! 선지자로 착각 당하는 삶이란.
“출발하겠습니다.”
열성 신도들의 구애를 모두 받아주려면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것 같다는 생각과 동시에 차가 출발했다.
“이렇게 급히 평양에 올 일이 생길 줄 알았으면 훈장 수여를 내가 직접 할 걸 그랬네. 너무 서운해 말게.”
정말 하나도 서운한 건 없었지만, 눈에 힘을 빼고 입꼬리를 내려서 세상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사령관님께서 직접 주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이런 급한 사안으로나마 대면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이 또한 운명에 이어짐이 아니겠습니까.”
“역시··· 그리 생각해준다니 고맙네. 한국군에 자네 같은 지휘관이 있어 도쿄에 있을 때도 마음 놓을 수 있었다네.”
진정해 형, 거기까지.
맥아더와 관계 유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고, 그 선을 넘으려다가도 넘지 않는 줄타기.
그와 이런저런 수다를 떠는 동안, 평양 임시 지휘소(CP)인 만수대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사령관님.”
평소 같으면 누가 들어와도 엉덩이 뗄 일이 별로 없는 계급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맥아더가 지휘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리에 앉아있던 모든 이들이 일어났다.
“다들 앉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대체 얼마나 중요한 극비 사안이길래 맥아더 사령관이 직접 평양까지 날아와 전달하는지.
맥아더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다들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이군. 그래, 내가 왜 다른 건 다 뒷전으로 하고 평양에 왔는지 궁금하겠지. 안 그런가?”
워커 중장, 게이 소장은 물론 대령급 참모들도 모두 같은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론부터 말하지. 미 정보국에서 중공군이 이미 참전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한 모양이야. 지난번처럼 발뺌하기 쉬운 군복 증거 같은 수준이 아닐세.”
중공군 참전.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이다.
중공이란 말에 굳은 침을 삼켰다.
“국공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지금 시점에 중공이 참전했다는 게··· 정보국의 증거라면 어떤 것입니까?”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질문을 던졌지만, 그리 의미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세계 1차대전과 2차대전의 간격도 그리 크지 않았을뿐더러, 한반도는 일제강점에서 벗어난 지 채 5년도 되지 않았으니까.
저우언라이가 38선을 넘으면 참전하겠다고 짖어댄 건 기억도 안 나는 모양이다.
“기다리게.”
맥아더 사령관이 그의 부관 펀치 중령에게 문서 한 장을 건넸다.
“정보국에서 파악한 정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흠. 흠흠.”
펀치 중령이 차분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북한 동지들이 미국의 무장 개입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지난해와 올해 우리는 미국의 무장 개입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재차 지적했지만, 김일성은 이에 가능성이 없다고 답했다. 라는 것이 첫 번째 전문이고···”
정황상 중공이 소련에 보낸 전문이 거의 확실하지만, 이 전문만으로 소련의 개입을 국제사회에 알리기엔 부족하다.
스탈린의 서명이라도 있었다면 빼도 박도 못하겠지만, 온몸을 비틀어가며 잡아뗄 테니까.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에 선동당한 자들로부터 조선반도와 인민을 수호하기 위해 중국 인민 지원군이 각지에서 궐기하였다. 이것이 입수한 두 번째 전문입니다.”
펀치 중령이 문서를 탁자에 내려놓은 뒤 앉았다.
지원군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다.
적어도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이 저급한 수에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길 바랐다.
“지원군이라면 중공이 직접 개입했다기보다 자발적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의용군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게이 소장의 입에서 똥 덩어리 같은 말이 쏟아져나왔다.
누가 이 저급한 수에 속나 했더니, 너였구나?
항미원조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말 그대로 명분일 뿐.
연합군이 38선을 넘는 순간, 이미 중공의 참전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중공 입장에서 북한이 사라지면 완충지대가 사라지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뻗칠 곳이 사라지는 것을 뜻하니 달가울 리 없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참전을 통해 한반도 이북을 실질적으로 통치할 기회가 눈앞에 왔는데 참을 수 있을까?
욕심과 욕망으로 가득 찬 마오쩌둥은 절대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새끼들은 그게 언제가 됐건 간에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
“섣불리 의용군으로 판단하는 것보다는 실질적으로 중공에서 넘어온 병력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습니다. 정말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는 의용군이라면, 제대로 된 편제와 지휘체계를 갖추기도 어려울뿐더러 중화기나 항공, 기갑전력은 전무 해야 앞뒤가 맞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반박할 여지는 없다.
설마 소소하게 한푼 두푼 성금을 모아 전투기와 탱크를 구매했다는 개소리를 한다면, 더는 같은 인간으로서 대화하기 어려우니까.
“이 대령 말이 맞네. 정보국이 저들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노력 중이네. 청천강 이북에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가 사실인지 확인하는 중이야.”
맥아더가 담배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만약 중공군과 미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일어난다면, 자칫 전쟁이 크게 확전 될까 우려됩니다. 지금 전선을 유지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는 것은 어떨지···”
이봐 워커 중장.
그런 말이나 하라고 수명을 늘려준 게 아니라니까?
‘내가 대변인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군.’
물론 내 의견이 국군의 의사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나보다 높은 계급과 지위를 가진 국군 지휘관은 많지만, 미국이 내릴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이 사령관 나리들과 말이 가장 잘 통하는 건 나라고.
“청천강 이북 지역 작전은 한국군이 전담하니 크게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이 전쟁을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것은 이런 예와 비슷합니다. 지난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게 나치가 점령한 땅만을 수복하고, 독일 본토는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면 수긍하실 수 있겠습니까?”
“현 상황에서 확전에 대한 우려를 줄일 수 있는 건, 강력한 힘뿐입니다. 오히려 중공군이 청천강을 넘어 공격해 올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미 10군단은 많은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에 대비하고자 한다면, 한반도에 지금보다 더 많은 병력과 화력이 증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미 전쟁에 발을 들인 이상 발을 빼고 싶다 한들 그리 쉽게 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의 전력이 강해졌으니, 우리도 더 강한 전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말에 반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군인들을 설득하는 것과 정치인들을 설득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긴 하지만.
시간을 조금만 더 번다면, 국군의 단독 작전 수행이 가능해질 때가 온다.
미군의 든든한 우호 아래 국군의 단독 작전 수행이 가능해지면 한반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선전포고한 것이나 다름없는 중공 머저리들까지 조질 수 있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자네 의견에 동감하는 바이네. 책상 앞에 앉아 펜이나 굴리는 어르신들이 동감할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들 생각은 어떤가?”
맥아더 사령관이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도 책상에 올라와 있는 보고서들을 보고 지침을 결정하는 행정부와 전쟁터에서 직접전투를 지휘하는 지휘관 사이에는 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이 대령 말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워커 중장과.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게이 소장까지 공감하는 걸 보면.
“자, 오늘은 이만하고 변동사항이 있으면 알려주겠네. 일어들 나지.”
무리한 북진을 자제해 청천강과 원산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중공군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아챈 이상, 과거 1.4 후퇴처럼 다시 평양과 서울을 내줘야 할 일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현시점에서 가장 급선무는 중국 인민 지원군이 곧 중공군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일이 될 것 같다.
외교적으로 물어본들, 맞다 할 리는 없으니까.
-똑똑.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사령관님. 한국군 측에서 이강산 대령을 찾아온 자가 있습니다. 잠시 기다리라 해도 한시가 급해 기다릴 수 없다 하여 부득이···”
누구지?
여기까지 찾아와 문을 두들길만큼 나를 급히 찾을 사람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들어오라 하게. 얼마나 급한 일인지 나도 궁금하고만.”
맥아더 사령관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자네···”
문이 열리자 보인 얼굴은 익숙하고도 반가운 얼굴이었다.
하루빨리 보고 싶었던 얼굴이기도 했고.
“죄송합니다. 1초라도 빨리 아셔야 할만한 정보가 있어서 불쑥 찾아왔습니다.”
아무래도, 회의를 지금 끝내면 안 된다는 신의 계시가 내려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