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74화 (74/149)

74화. 웨이크섬(3)

참새는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바로 짠 참기름 냄새마냥 고소한 분위기가 주변을 감쌌다.

“내가 웬만한 사람 마음속은 다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네만, 자만이었군. 자네 속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 걸 보면 말이지.”

트루먼 대통령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까지, 온갖 군상의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했을 것이다.

그런 수많은 경험으로도 내 속을 알아차릴 순 없었던 모양이다.

“어서 말해보게. 자네가 가진 패가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졌는지는 들어보고 판단하는 게 도리에 맞지 않겠나.”

트루먼 대통령이 의자를 당겨 가까이 앉는 걸 보니,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꽤 급한 모양이다.

하긴, 가진 패에 대한 값어치를 흥정하려면 패를 먼저 보이는 게 우선이다.

“이제부터 한국군과 연합군이 맞붙어야 할 상대는 중공군입니다. 아마 상당히 많은 전쟁비용이 들어가겠죠. 만약 중공과의 전쟁비용을 중공에 떠넘길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중공에 돈을 받아내는 것이다.

본디 돈이라는 게 어디 쓰는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는 거니까.

생활하는 데 쓰면 생활비, 음주 가무를 즐기는 데 쓰면 유흥비, 전쟁에 들어가면 전쟁비용이지 뭐.

“그러니까 자네 말은, 중공 측에 전쟁비용을 충당할 만한 돈을 받아낼 방법이 있다는 말인가? 만약 내가 이해한 게 정확하다면 자네를 당장 워싱턴으로 데려가 책상을 하나 만들어 앉혀 버리고 싶군.”

“맞습니다. 설사 돈을 받아내지 못하더라도, 중공을 압박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은 물론, 아주 좋은 명분 거리 하나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과 딜할 패를 내는 것엔, 제한 사항이 있다.

당장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패여야만 한다는 점.

만약 대한민국이 만주나 요동을 점령해 그곳에 있는 유전을 미국에 전부 넘겨주겠다고 한들,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유전을 확인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림은 물론이거니와 미국이 유전을 차지할 명분도 마땅하지가 않다.

석유나 철광석, 석탄 같은 자원들이 탐이 날 순 나겠지만, 트루먼 대통령이 이런 불확실한 딜을 받아줄 리 없다.

“이 대령. 조금 쉽고 빠르게 패를 보일 순 없겠나? 자네 입에서 단어 하나하나 나오는 것이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네만···”

맥아더 사령관마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3명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1911년, 청나라가 후베이성과 광둥성을 잇는 철도를 깔기 위해 이율 5%의 채권을 발행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채권을 거둬드리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1911년 청나라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4개국에 철도 건설을 위한 금리 5% 채권을 발행했다.

문제는 대륙이 좀 넓은가?

청나라는 철도를 연결하는 엄청난 비용을 외부의 투자 없이 홀로 감당할 수 없었다.

“잠시, 이런 채권이 있는지 확인부터 해봐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트루먼 대통령이 멀찍이 떨어진 참모진에 손짓하자, 참모 중 한 명이 재빨리 달려왔다.

“1911년에 청나라가 미국에 발행한 채권이 있는지 사실확인 하게. 최대한 빨리.”

“예. 알겠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참모가 잽싸게 왔던 길 그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말이네. 채권이 있다고 한들, 지금 중공과 중화민국으로 나뉜 상황에서 청나라 채권을 인정하려 하겠는가?”

“당연히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이 채권의 값어치가 가장 높은 순간입니다.”

소련의 경제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금 상황에선 인정할 수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미-중 수교가 체결된 1979년 이후에도 중국은 쇠망한 옛 정부의 해외부채를 인정할 수 없다며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긴 하지만.

어디 남에 돈 빌려다 배 째라면 끝인가?

중공 놈들에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지.

“제가 알기론 국민당 정부는 중공에 의해 대만으로 밀려나기 10년 전인 1939년까지 철도 채권에 대한 이자를 지급해 왔습니다. 만약 중공 정부가 이 채권을 갚지 않는다면···”

청나라가 멸망한 자리에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 채권을 비롯한 청나라의 모든 의무는 중화민국으로 승계됐다.

중화민국은 일본과 전쟁을 치르면서 1938년 디폴트를 선언, 1939년까지만 채권 이자가 지급된 이유기도 했다.

“대만에 있는 장제스 정부가 이 채권을 상환한다면 아주 재밌는 상황이 벌어지겠군.”

트루먼 대통령 머릿속에서도 톱니가 맞물려 돌기 시작한 모양이다.

“맞습니다. 채권을 상환해도, 상환하지 않아도 아주 재밌어질 겁니다.”

일거양득을 원하는 이 중공 욕심쟁이 새끼들은, 제 배를 갈라야 할 것이다.

청나라와 중화민국을 계승한 국가임을 부정하고 채권을 상환하지 않는다면, 현재 영국령인 홍콩, 포르투갈령인 마카오를 합병할 명분이 사라진다.

위구르, 티베트, 내몽고는?

무엇보다.

“국제사회가 대만 정부를 국가로 인정할 명분이 충분해집니다. 중공 입장에선 최악에 가까운 상황일 겁니다.”

지금 중공은 대만을 아직 수복하지 못한 미수복 국토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바람에 수복이 미뤄지고 있지만.

하나의 중국, 원 차이나?

시간이 지나 중공이 중국으로 인정받고 국제사회에 나와 각국과 수교를 시작해 성장을 시작하면, 엄청난 자원과 노동력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중국의 성장세는 멈출 수 없다.

‘이번에도 배 째라?’

암, 어림도 없지.

너희는 여러 갈래로 쪼개져 있을 때 가장 아름다워.

“대통령님.”

얼마나 달려왔는지, 트루먼 대통령 참모 얼굴에서 땀이 쏟아져 내렸다.

“아직 미국에 상환되지 않은 청나라 채권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1939년까지 이자가 지급된 기록이 있습니다.”

“채권 규모는?”

절대 푼돈은 아닐걸?

“이자 지급이 중단된 1939년부터 복리 5%로 채권 상환액을 계산하면··· 5천억 달러에 육박합니다.”

“5000억 달러라··· 알겠네. 가보게.”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에게 개인 화기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고 있는 중공이 과연 어떤 반응을 해올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대통령님, 제가 보여드린 패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트루먼 대통령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따라 국제사회에도 큰 변화를 불러올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이 패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무궁무진하다.

“넌지시 생각했던 것보다 아주 큰 패라 당황스럽기도 하군. 나는 자네에게 어떤 패를 보여주면 되겠나?”

“딱 그 패가 가진 가치만큼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해보게.”

트루먼 대통령 입에서 한숨이 세어 나왔다.

***

“그럼, 잠시 다녀오겠네.”

트루먼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담을 중간에 끊어가는 경우는 있어도, 오찬을 중간에 끊어가는 경우는 처음 들어봤다.

트루먼 대통령이 참모진과 의견을 나눌 시간이 필요하다며 일어선 것이다.

“이 대령. 정말 궁금해서 묻네만, 자네는 대체 태어나기도 전에 발행된 채권을 어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게지?”

맥아더 사령관이 애절함을 가득 담아 물었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검색이 가능한 21세기라면 모를까, 1950년에는 불과 몇 년 전 기록을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 우연히 보게 된 책에 적혀있던 내용이라··· 책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지금까지 정확히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그땐 몰랐지만, 꽤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나라에 전쟁이라는 비극이 닥치고 대통령님, 사령관님과 함께 하는 오찬에서 이 내용이 떠오를진 꿈에도 몰랐습니다.”

우연히.

우연히 보게 된 책에 적혀있었다는데, 기억이 안 난다는 데 별수 있나?

우연이라는 한 단어로 모든 뒤끝을 일축 시켰다.

“자네는 항상 우연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우연이···”

맥아더 사령관 입에서 나올 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럼 어디 한 번 선수를 쳐볼까?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 되고, 그 필연이 반복되면 운명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혹시 사령관님께서 하시려던 말씀이··· 이런 것입니까?”

“세상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걸 기억하기도 하지만, 쉽게 잊기도 한다.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맥아더 사령관에게 처방한 약의 약발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기적인 처방은 필수였다.

“저기, 대통령님께서 오십니다.”

참모진으로 둘러싸였던 트루먼 대통령이 사이를 헤집고 나와 다가오고 있었다.

‘얘기가 잘 됐으려나?’

이야기가 잘 통했을지 궁금했다.

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패를 보여준 대가로 몇 가지를 요구했다.

그 중엔 이곳 웨이크섬 안에서 대답해줄 수 있는 것들도 있겠지만, 아닌 것들도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봤다시피 걱정이 좀 많아야 말이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참모진과 트루먼 대통령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심했을 것이다.

명분과 이해관계에 초점을 맞춰서.

“아닙니다. 괜히 제가 오지랖을 부려 대통령님 시간을 뺏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닐세. 우선, 미국 본토로 유학 오는 한국군 장교의 규모를 늘리는 것에 대해선, 얼마든지 환영 의사를 밝히는 바네.”

전쟁 이전부터 일부 장교들이 미군의 선진 전술 교리나 행정을 교육받기 위해 미국 본토에 유학을 가고는 있었지만, 국군의 체계를 바꿀 수 있는 고급 장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런 제안을 먼저 한 이유는, 친미 군부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 현재 국군의 장교들은 크게 나누자면 독립군, 만주군, 일본군으로 각기 다른 출신을 가졌다.

이런 출신에 대한 제약을 없애고, 국군의 체계를 바로잡을 방책으로 선진 군대를 가진 미국으로의 유학을 택했을 뿐이다.

미국이 지구에서 가장 선진화된 군대를 가졌다는 것에 반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유학 장교의 규모를 늘리는 것은 들어주기 가장 쉬운 제안이었다.

진짜는 지금부터.

“사실, 다른 제안들은 내가 이 자리에서 확답을 주기 어렵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을 것이네. 자네 말대로 나는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아니니까.”

내가 준 패는, 트루먼 대통령이 워싱턴에 돌아가 다방면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용법이 나올 것이다.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사용한들,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어떤 대처를 하는지에 따라 또 다른 결과들이 도출될 테니까.

“너무 섭섭해하진 말게. 참모진 중 하나가 이런 말을 하더군. 한국 속담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속담이 있다고. 나머지 제안들은 반드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약속하겠네.”

바로 답을 듣긴 어려울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살짝 숙이려던 찰나.

“저들이 한국의 눈과 이를 다치게 했으니, 최소한 둘 중 하나라도 먼저 보상을 받아내야 하지 않겠나? 일단 이 아름다운 섬을 떠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세.”

트루먼 대통령이 조용히 속삭였다.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그의 말 속에 녹아 있는 건 희망이었다.

동시에, 하고 싶던 말은 속으로 삼켜냈다.

한국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곱빼기도 있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