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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75화 (75/149)

75화. 청천강 방어선(1)

청천강 UN 연합군 방어선.

에메랄드 파도가 일렁이던 웨이크섬에서 회담을 마친 뒤, 곧장 한반도에 돌아왔다.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 D.C로, 맥아더 사령관은 극동 사령부가 있는 도쿄로, 나는 연합군 전선 최전방 청천강에 도착했다.

“먼 길 오가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연대장님. 이쪽입니다.”

나의 든든한 대대장들이 안부를 전해왔다.

별다른 피해 없이 특공연대를 남진해 내려오던 미 10군단과 연결해 청천강 방어선에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내가 없는 사이에 있었던 특이사항이 있나?”

이틀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전쟁터 최전방에서의 이틀은 다른 곳에서의 시간과는 조금 다르다.

“국군 1군단이 원산을 완전히 점령했다고 전해왔습니다. 또한, 청천강 이북지역의 작전은 국군에게만 승인됐기에, 국군 부대 재편이 한창입니다.”

국군 1군단만으로 원산 점령에 성공했다는 건, 미 10군단을 원산에 상륙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오자마자 해야 할 일이 산더미군.’

먼 거리를 비행한 피로가 풀리기도 전에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역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특공연대를 독립 전투여단으로 재편하는 것.

전투여단은 사실 전투부대의 꽃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사단이나 군단 규모의 대형 편제는 많은 병력과 화력을 갖춰 강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신속한 기동이나 급격한 상황변화에 따른 대응이 어렵다.

반면 전투여단은 전투 종합 선물 패키지나 다름없다.

전투여단 내 편제된 보병, 포병, 기갑, 지원부대만으로 상위 부대의 도움이나 지휘를 받지 않더라도 독자적 작전 수행에 전혀 지장이 없는 유연성을 갖추고 있다.

전쟁터에서 독자적, 독립, 유연성, 이 단어들이 빛을 발하려면 여단장은 물론이거니와 각 부대 지휘관의 지휘능력이 받쳐줘야만 가능했다.

“두 대대장은 막사로 오도록. 머리 아픈 고민은 좀 같이 해보자고.”

원래 새로운 살림을 꾸린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

청천강 방어선 지휘 막사 안.

“연대장님, 그쪽 지역 바다는 하늘색과 차이가 없다는 게 정말입니까?”

막사에 들어오자마자 김상옥 중령이 궁금했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질문하고는.

누가 보면 회담이 아니라 신혼여행이라도 다녀온 줄 알겠다.

“음···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수평선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도 같군.”

“와··· 기회가 있다면 꼭 한번 보고 싶습니다.”

김상옥 중령이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늘에서 폭탄과 총탄을 쏘아대는 폭격기, 전투기만 숱하게 봤을 뿐이어서일까?

수송기를 타고 웨이크섬에 간 것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저도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2대대장, 문기준 중령이 곧장 질문을 이어나갔다.

생각해보니 웨이크섬에서 서둘러 출발한 탓에, 고생한 두 대대장과 지휘관들에게 선물로 줄 만한 어떤 것도 챙기지 못했다.

물어보고 싶은 궁금한 것이 참 많을 텐데, 선물 대신 질문에 대한 답이라도 열심히 해줘야겠다.

“미안하게도 자네들 선물을 챙겨오지 못했네. 대신 궁금했던 것이나 실컷 묻게. 내가 아는 한에서는 성실히 대답해 줄 테니.”

자, 마음껏 질문 해보라고.

얼마든지 대답해줄 테니까.

“그··· 미국 여인들은 그런 하늘색 해변에서 비···”

문기준 중령의 얼굴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존경하는 연대장님. 저는 하늘에 맹세코 2대대장의 질문에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김상옥 중령이 발을 빼는 걸 보니, 하늘에 맹세코 두 대대장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짜낸 민망한 질문인 모양이다.

“제대로 할 질문 없으면 이만하지. 그래도 괜찮은가?”

“안 됩니다! 해변에서 비··· 비키니라는 옷을 입는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문기준 중령이 절대 안 된다는 듯 손사래 치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두 대대장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파묻었다.

비키니? 내가 아는 그 비키니?

이게 성에 대해 극도로 보수적인 1950년 대한민국에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인지 의아했다.

누가 대체 이들에게 음란마귀를 씌워놨단 말인가.

하긴, 전쟁통에도 할 건 하고 알 건 알아야지.

“누가 그런 소리를 했지?”

사실 범인은 뻔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미국인이겠지.

“연대장님께서 웨이크섬에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전차 중대장 밀러 중위 그놈이··· 외람된 질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웨이크섬에서 만난 사람이라고는 비키니 입은 미녀가 아니라 트루먼 대통령, 맥아더 사령관, 내가 입을 열 때마다 노려보던 머리 빠진 미국 참모진뿐이었지만···

그들이 펼치고 있는 상상의 나래를 지워버리고 싶진 않았다.

“비키니는 옷이라기보단 옷 조각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지. 내 손바닥 크기의 옷 조각 세 개가 끝이네. 자네들 표정을 보니 웨이크섬에 대한 질문은 끝난 것 같은데 맞나?”

“예! 그렇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비키니로 대동단결.

활기찬 대답 소리를 보니, 선물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자, 그럼 부대 재편에 대해 의논을 시작해보지.”

부대 이야기가 나오자 가볍던 분위기가 증발함과 동시에 두 대대장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선 1개 보병대대를 추가해 총 3개 보병대대와 1개 기마대로 편제를 늘릴 생각이네. 새롭게 특공여단으로 편제될 부대들과 하나로 뭉치기 위해선 자네들의 노력이 중요하네.”

단순히 병력 머릿수만 늘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특공연대가 지금까지 괄목할만한 전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맡길 수 있는 상호 간의 신뢰.

그 신뢰를 바탕으로 지휘관들이 작전을 훌륭하게 지휘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차 조종 훈련을 끝마친 국군 병력이 미군 전차 중대의 빈자리를 메꿀 것이네. 그 외에도 포병대대, 공병대대, 지원대대가 특공여단에 합류할 것이다. 중공군과의 전투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새롭게 올 대대장들이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물론 아무나 특공여단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가장 먼저 숨은 영웅들을 부대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부대 재편에 대한 김홍일 총참모장의 전폭적인 지지 의사가 있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터.

처음엔 조금 삐걱댈지도 모른다.

사공이 많아진 만큼 배가 산으로 가려 할 수도, 사공끼리 다툴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력화.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고 거치면서 비로소 막강한 전력을 갖추는 것이다.

“당연히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연대장님. 괜한 걱정일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말을 꺼낸 김상옥 중령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편히 말해보게.”

“사실 이전부터 종종 들려온 말을 지금까지는 무시하고 있었습니다만, 국군 내에 특공연대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몇몇 있는 것 같습니다.”

날카로운 바늘이 머리를 찌른 듯, 찌릿한 편두통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터라 놓치고 있던 부분이 있었다.

미처 뒤를 신경 쓰지 못했군.

“계속 말해보게.”

“사람마다 욕심의 크기가 다르다 한들, 군인이라면 누구나 공적에 대한 욕심을 조금은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평양에서 8연대와의 마찰도 그러한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욕심이 넘치면 시샘이 되는 것이고, 현재는 전투가 소강상태다 보니 그런 시샘을 드러내는 자들이 몇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조언이었다.

한여름 태양이 모든 것을 태워버릴 기세로 아무리 강하게 내리쬔 들, 늘 어딘가에 작은 그늘은 생기는 법이다.

모든 방면에서 가장 우수한, 해처럼 빛나는 사람을 보통 에이스라고 부른다.

에이스가 존재하는 곳엔, 그늘진 곳에서 그런 에이스를 견제하고 시샘하는 자들 또한 항상 존재해 왔다.

맥아더 사령관과 김홍일 총참모장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총애를 받고 이 전쟁을 개척해나가고 있는 나는,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견제와 시샘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얘기해줘서 고맙네. 그 부분에 대해선, 숨기지 말고 작은 것 하나까지 직접 보고 하도록.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네. 나가서 일들 봐.”

“연대장님. 괜히 심려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저희에게 있어 연대장님보다 뛰어난 지휘관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가보겠습니다.”

김상옥 중령의 말을 끝으로 두 대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한 뒤 막사 밖으로 나갔다.

“후···”

자연스레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김상옥 중령의 말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 그늘이 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왜 미처 몰랐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댔다.

대한민국 군인이 되기로 한 이상, 대한민국 영토를 지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임무다.

영토를 침략한 적과 맞서 싸우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내가 너무 앞만 보고 달렸나?”

처음엔 단순히 살기 위해서였다.

이곳에 아무 연고가 없는 나로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군인이 됐다.

살아남은 뒤에는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머지않은 미래에 중국과 북한에 받을 고통, 분단국가의 아픔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 전쟁을 완벽하게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적을 인정받아 유례없는 전시 특진을 거듭했고, 훌륭한 부하들을 휘하에 뒀다.

만약 내가 남에게 시샘 당할 만큼 뛰어난 공을 세우지 않았다면?

“물론 그 자리엔 다른 영웅이 생겨났겠지. 그늘은 그곳에도 졌을 테고.”

그래, 그랬을 것이다.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복잡했던 머리가 정리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니었더라도 그 자리에 다른 영웅이 생겨났을 것이고, 그 영웅을 시샘하는 놈들이 생겨났을 것이다.

대한민국, 미국, 북한, 중공, 소련, 그 외에도 자유와 공산이라는 이념 아래 양쪽으로 갈라져 전쟁에 참여한 많은 국가가 있지만···

중요한 건 악에는 국적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하면 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이 주는 교훈은 사촌이 배가 아프지 않게 사촌에게도 땅을 나눠주라는 걸까?

아니?

그게 아니지.

그 사촌이 가까운 사람이 잘되는 것을 기뻐해 주진 못할망정 시기하고 질투하는 나쁜 새끼라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채병덕, 신성모 같은 큰 똥 덩어리들을 전쟁 초기에 치워냈다.

설사 국군이라 하더라도 단순한 시샘을 넘어 이 나라를 위한 계획까지 방해하려 든다면, 앞으로도 가차 없이 치워낼 것이다.

잡초가 눈에 들어온다면, 바로바로 뽑아내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서 욕심으로 그늘을 만드는 게 어떤 새끼야?”

참을 필요가 없다.

명분이 뭐냐고?

권선징악(勸善懲惡) 정도로 해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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