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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76화 (76/149)

76화. 청천강 방어선(2)

워싱턴 D.C

트루먼은 웨이크섬에서 돌아온 이후, 단 한 번도 숙면을 한 적이 없었다.

집무실 책상에 앉아 고심, 또 고심.

그러다 마지못해 책상에 엎어져 잠시 잠들곤 했다.

“해리. 그러다 당신이 먼저 쓰러지겠네요. 이거라도 마시고 고민해요.”

베스 트루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소꿉친구이자 9년간에 구애 끝에 결혼한 영부인이었다.

영부인이 티를 책상에 내려놓은 뒤, 트루먼 대통령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베스. 도통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뭔지 모르겠어.”

최고의 인재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속 터놓고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의원들은 아니나 다를까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갈라져 설전을 벌여댔고, 각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경험에 따라 모두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지금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에 따라 미래에 막대한 영향을 줄 것이 너무나 분명했지만, 이토록 골치가 아픈 이유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똑똑하다는 사람들의 조언이 당신의 결정에 별 도움이 안 됐다면··· 당신을 제일 잘 아는 나한테 조언을 구해보는 게 어때요?”

“당신이 웬일로? 음··· 좋아. 그럼 너무 복잡한 질문은 말고. 내가 누군가와 딜을 좀 했어. 상대는 나에게 몇 가지 조건을 걸며 패를 전부 보였고, 그 조건을 어디까지 들어줘야 할지 고민이야.”

“당신이 친구들끼리 칩 몇 개 던지며 노는 카드놀이 판에 이렇게 고민할 리는 없고, 그 판에 어떤 게 걸려있죠?”

“판이 좀 커. 최소한으로 보자면 동북아시아? 판이 커지면 미국이 될지도 모르지.”

“생각했던 것보다는··· 판이 별 볼 일 없네요.”

영부인의 대답을 들은 트루먼 대통령이 못 말리겠다는 듯 영부인과 함께 웃음 지었다.

영부인 베스 트루먼의 조언은 순전히 그의 남편 해리 트루먼을 다독이기 위한 것이었다.

영부인으로서의 최소한 사회적 의무는 전부 이행했지만, 자신이 정한 분명한 선 안에서만 움직였다.

웬만한 사교 자리에서도 그녀를 보기 어려웠고,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트루먼 대통령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기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딱 한 번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는데, 왜 언론에 모습을 비치지 않냐는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은 확고했다.

[나는 대통령 당선인이 아니다. 내가 대중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나와의 기자회견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딱 한 번 열린 기자회견이자 마지막 기자회견이었다.

“당신과 이렇게 이야기하며 웃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군. 고맙소.”

트루먼 대통령이 팔로 영부인 허리를 휘어 감았다.

오랜 세월 함께 늙어온 아름다운 노부부의 사랑이 공기를 가득 메웠다.

“내가 당신 결정에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하겠지만, 지금 보니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영부인이 트루먼 대통령의 눈을 응시했다.

“당신은 그 패를 보여준 사람이 정말 자기가 가진 패를 다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어?”

트루먼 대통령이 허리를 세우고 책상에 있던 안경을 집어 썼다.

내내 무엇을 선택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지만 고민했다.

한국군 장교 이강산 대령이 말한 청나라 채권은 중공을 압박할 대단한 패긴 했지만, 이강산 대령이 제시한 요구를 모두 다 들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요구를 들어줘 미국이 얻는 이득이 없다면, 적당히 한국 장교들의 유학을 받아주고 그에 대한 비용을 지원해주면 그만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당신을 잘 알아요. 이렇게까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내가 볼 때 주도권은 당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있는 것 같은데요? 누군진 모르겠지만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네요. 그 사람에게 남은 패가 더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겠고.”

쉬지 않고 전쟁을 계속한 미국에 훌륭한 군인은 넘쳐났다.

훌륭한 군인의 기준을 전쟁에서의 공적으로 한다면 말이다.

다만 지금껏 이토록 궁금한 군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해리. 당신이 늘 해왔던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미국의 자유와 정의를 훼손시키는 일이 아니라면 옆에서 응원할 테니.”

트루먼 대통령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그걸 방해한 건 당신의 현명함이야. 알겠지?”

“그럼요. 가볼 테니 일 보세요.”

영부인이 조용히 가져왔던 찻잔을 다시 집어 든 채 문밖으로 나갔다.

찻잔에 든 티에선 아직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애치슨 국무장관 들어오라 전해주게.”

영부인이 나가자마자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를 집어 국무장관을 호출했다.

그토록 고심을 거듭해도 답을 찾지 못하던 트루먼 대통령이 답을 찾은 듯했다.

찻잔에 든 티가 채 식기도 전에.

***

청천강 방어선. 국군 특공여단 임시 지휘소.

“여단장님. 도착했습니다.”

“가지.”

이름 대신 연대장님이라는 호칭으로 오래 불려와서인지, 아직 여단장이라는 호칭이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해지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임시 지휘소 막사 밖으로 익숙하고 웅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단장님, 특공여단에 합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밀러 중위 대신 전차 중대를 이끌 심민수 중위였다.

그 뒤로 M-46 패튼 전차 9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그간 봐왔던 패튼 전차와 달라진 점은, 포탑에 그려진 별 문양 옆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는 것.

“잘 왔네.”

어서 와.

특공여단은 처음이지?

청천강에서 부대를 재편하며 미군은 국군에게 M-36 잭슨 구축전차를 제공했다.

국군은 미군이 제공한 잭슨 전차를 제51 전차 중대, 제52 전차 중대로 나눠 국군 최초의 전차 중대를 창설했고, 특공여단에는 내 요청에 따라 그와 별개로 M-46 패튼 전차를 기반으로 한 전차 중대가 만들어졌다.

미국은 최신예 무기를 절대 다른 나라에 제공하지 않는다.

최신에 가까운 패튼 전차를 특공여단에 편제하기까지는, 맥아더 사령관, 어쩌면 그보다 큰 뒷배가 필요했다.

“특공여단의 전차 중대는 개활지에서 적에게 위용을 떨치기보다 좁은 도로, 산악, 개울처럼 최악의 지형에서 활약하게 될 것이네. 최악에서 최선을, 최선보단 최고가 되길 바라네.”

“예! 알겠습니다. 여단장님.”

M-36 잭슨 전차와 M-46 패튼 전차에 달린 주포는 같다.

뻥 뚫린 개활지에서 화력지원을 위해 포만 쏠 거라면, 굳이 어렵게 패튼 전차를 받아낼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여기, 이걸 참고해 내일 출발 전까지 전차를 이렇게 만들어 놓게.”

미리 그려둔 도안을 심민수 중위에게 건네줬다.

북한군이 섞여 있긴 하겠지만, 앞으로 특공여단이 주로 상대하게 될 적은 중공군.

야음을 틈타 좁은 도로, 산악을 이용해 공격해오는 중공군은 전차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차를 먹잇감으로 생각해 달려드는 미친놈들도 있었을 정도로.

“최··· 최선, 아니 완벽하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래, 최선은 됐고.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수고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지금까지 경험해왔듯, 목숨이 걸린 전쟁터에서는 최선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다 같이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고, 그러려면 최고가 되어야 한다.

“여단장님. 전차 중대가 합류하면서 부대 편제를 모두 마쳤습니다.”

“전 지휘관은 막사 안으로. 아, 포병대장에게 신용관 중위도 함께 오라 전하게.”

각 부대 최고 지휘관만 지휘소로 불러들였음에도, 지휘소가 전과 달리 제법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또 이렇게 한자리에 모일 수 있을지 모르니, 다들 면부터 트지.”

전차 중대장과 포병대 신용관 중위를 제외하면 모두가 중령, 소령급 지휘관이었다.

보병 1대대와 2대대는 각각 김상옥 중령과 문기준 중령이 지휘를 맡아 변화도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특공여단 보병 3대대를 맡게 된 공정식 소령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증원될 보병 3대대였다.

작전 중 뒤처지거나 맡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한다면, 증원하지 않느니만 못할 테니까.

한강 방어선에서부터 서울 탈환까지.

훈련과 장비가 열악했음에도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낸 해병 3대대를 통째로 특공여단에 합류시켰다.

3대대장을 그대로 공정식 소령으로 임명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군대에서 계급은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기존 1대대, 2대대장과 계급 차로 인해 생길지 모를 불필요한 마찰을 사전에 차단하고 3대대장을 빠르게 융화시키는 것은 기본, 김상옥 중령과 문기준 중령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마음 편히 작전에 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앞으로 잘해보자고. 3대대장.”

문기준 중령이 먼저 손을 내밀며 따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기마대장 장철부 중령입니다.”

전차보다 빠르고 은밀한 기동력을 갖춘 기마대.

“수색 중대장 김동석 대위입니다.”

정찰 및 수색, 상황에 따라 침투 임무까지 도맡게 될 수색대는 언제든 자유로운 작전 수행이 가능하도록 여단 직할로 편제했다.

수색 중대장 김동석 중위는 강건 생포의 공적을 인정받아 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한 인재였다.

“신 중위, 자네 차례일세.”

“음··· 신용관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와 긴장도 되고 하지만 특공여단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긴장했나?

이래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된다.

신용관 중위는 사실 패튼 전차만큼이나 데려오기 힘들었다.

차출 명령에 싫다고 했다나 뭐라나.

긴장하고 있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이곳에서 북한군을 제일 많이 사살한 사람을 꼽으라면 신용관 중위다.

신 중위의 주특기는 81mm 박격포.

박격포 다루는 솜씨를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로 일품이었다.

그는 개전 초기, 서부 전선에서 단 1문의 81mm 박격포만으로 연병장에 집결해있는 북한군 1개 연대를 괴멸시켰을 정도로 포에 관해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우리 특공여단은 내일 07시 부 청천강 방어선에서 출발해 신의주를 향해 진격한다. 자세한 작전 계획은···”

-여단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각 부대 지휘관에 작전 계획을 하달하려던 찰나, 지휘소 밖에서 통신장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신장교가 나를 직접 찾아왔을 때는 둘 중 하나다.

굉장히 좋은 일이 있거나, 굉장히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지금까진 물론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긴 했지만.

“들어와.”

통신장교가 곧장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드디어 국내에 군수물자를 생산할 공장이 지어질 것 같습니다. 기술 공유를 위해 미국과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보내온다고 합니다.

“잘됐군.”

매우 좋은 소식이었다.

국내에 군수 공장을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소식이지만, 미국에서도 기술자를 보내온다는 건 트루먼 대통령이 뭔가 갈피를 정했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니까.

“군수 공장이 지어질 위치는 어디라던가.”

내가 생각하는 미래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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