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꼬리잡기(1)
야심한 밤. 적유령 산맥 땅굴.
대낮에도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던 땅굴.
촛불 하나가 켜지며 땅굴 안을 밝혔다.
“드디어 때가 왔다.”
초에 불을 붙인 사람은 중공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펑더화이였다.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지냈음에도, 그의 눈동자는 또렷하고 선명했다.
“지금 이 굴에서 나가는 순간, 정해진 진격 장소로 진격한다. 괴뢰군을 최대한 빨리, 많이 섬멸하라는 마오쩌둥 동지의 지시가 떨어졌다.”
청나라 채권 상환을 요구하는 미국에 대응하는 마오쩌둥의 첫 명령은 북진해오는 한국군을 모조리 몰살시키라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요구한 5000억 달러 채권 상환에 코웃음 쳤다.
가뜩이나 소련의 경제 원조로 버티고 있는 와중에 줄 돈도, 설사 돈을 마련한다 해도 곱게 줄 생각이 없었다.
[미군이 청천강을 넘으면 즉시 보고할 것. 미군이 청천강을 넘지 않는 이상, 괴뢰군을 모조리 섬멸하라.]
마오쩌둥이 총사령관 펑더화이에게 보낸 명령서에 적힌 내용이다.
코웃음에 열이 잔뜩 받은 미국이 청천강 방어선을 넘어 북진을 택한다면, 그때 가서 다시 상황을 판단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때마침 북진을 해오는 것은 한국군뿐이었고, 마오쩌둥은 현 상황이 중공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판단의 근거는 북진해오는 한국군을 몰살시킨다는 전제하였다.
“한센추. 자네는 먼저 서둘러 9병단 병력을 이끌고 장진호로 출발하게.”
“예, 반드시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놓겠습니다.”
한센추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 야심하고 어두운 새벽을 틈타 9병단 12만 명의 병력이 적유령 산맥을 떠나 장진호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덩화, 홍쉐즈. 우리는 계획대로 13병단을 이끌고 청천강을 넘은 위군(한국군)을 사냥한다.”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단번에 괴뢰군의 숨통을 끊어놓을 것입니다.”
전투에 투입된다는 말에 덩화, 홍쉐즈, 한센추 3명의 부사령관 모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방심을 극도로 경계하는 총사령관 펑더화이 역시 그들을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당분간 적을 죽이고 얻는 전리품은 모두 병사 개인에게 귀속한다. 음식이 됐건, 소총이 됐건··· 어린 처녀가 됐건 뭐든 말이야.”
“예! 사령관님.”
홍쉐즈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북한 지역에 잠입한 9병단, 13병단이 가져온 군수 물자라고는 소총과 좁쌀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마오쩌둥의 최종 승인을 기다리며 땅굴에 숨어있는 동안, 개인이 배급받아 가져온 식량 대부분을 소진한 상태였다.
중공군은 야간에 땅굴에서 나와 산에 있는 나물과 풀뿌리를 캐 먹으며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미 숱한 전쟁과 전투를 통해 약탈이 주는 쾌락을 아는 그들에게 전투는, 배고픔에서 벗어나 부족한 전투물자를 채우고 자신의 성욕까지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는 싸움일 뿐이었다.
“일어서라! 출병이다.”
수백, 수천 번도 넘게 전투를 그려본 펑더화이 머릿속에서 미군과 연합군을 제외한 한국군에게 지는 그림은 단 하나도 없었다.
-후.
그의 입김과 함께 동굴을 밝히던 촛불이 꺼졌다.
***
북한 평안도 운전.
국군 2군단과 특공여단은 이렇게 무사히 청천강을 넘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무사히 청천강을 넘었다.
청천강 이북을 지키고 있던 북한군 진지는 이미 미 10군단이 상륙함과 동시에 군함 함포사격, 항공 폭격으로 잿더미로 변한 지 오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패튼 전차가 아주 예쁘게 꽃단장을 한 것 같습니다. 여단장님.”
내가 위치한 곳은 특공여단 최선봉.
여단 최선봉에선 부대는 심민수 중위가 이끄는 전차 중대와 보병 1대대였다.
조금의 꽃단장을 한 패튼 전차를 보며 1대대장이 말을 건네왔다.
“그렇게 예뻐 보이면 손으로 좀 쓰다듬어 줘 볼 텐가? 어때.”
“아름다운 꽃은 꺾지 말고 가만히 지켜보라 배웠습니다. 이번만큼은 사양하겠습니다. 여단장님.”
말이라도 못하면.
김상옥 중령이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패튼 전차의 꽃단장은 전면, 측면, 해치 위까지 촘촘하게 감긴 철조망이었다.
전차 승무원이 타고 내릴 때마다 해치에 있는 철조망을 치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하지만, 전차에 근접해 해치를 열려는 중공군들을 막아낼 수만 있다면 이깟 번거로움쯤이야.
바다에 위대한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이 있다면, 육지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난 패튼 전차가 있다.
“부대 정지. 오늘은 이곳에 진지를 구축한다. 공병대 투입 시켜.”
국군은 약속대로 북진하며 서로의 진격 속도와 위치를 수시로 주고받았다.
국군 7사단은 박천, 1사단은 운전과 박천 사이까지 진출한 참이었다.
“공병대 투입!”
다른 부대들은 진격을 멈추면 진지 구축을 마친 뒤 경계병을 세운 채 대기 상태에 돌입하지만, 공병대의 일과는 진격을 멈추면서 시작된다.
시야가 노출된 곳에 철조망을 설치함과 동시에 81mm 박격포에서 발사하는 백린 연막탄을 기폭제와 함께 방어선 인근에 묻었다.
백린 연막탄을 진지 전방에 매설하는 건 야간 기습을 감행하는 중공군을 상대하는 데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누구 머릿속에서 나왔는지 참···’
칠흑같이 검은 어둠도 결코 빛을 이겨낼 순 없다.
철조망이 설치된 전방 경계 구역에서 백린 연막탄이 터지면 10분 이상 그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중공군은 어둠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철석같이 믿겠지만, 백린 연막탄이 터지는 순간부터 어둠은 우리 편이 된다.
중공군 진영은 대낮같이 밝아질 것이고, 국군 진지는 야음에 숨어 적에게 총탄을 퍼부어 댈 것이다.
“전방지역 정찰은 김동석 대위를 보내면 되겠습니까?”
임시 진지 전방은 지긋지긋한 산악 지형이었다.
시간상 중공군 주력 부대가 이곳 운전까지 내려오진 못했겠지만, 그들 역시 국군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정찰대나 선발대를 보냈을 터.
꼭 중공군 정찰대나 선발대가 아니더라도 북한군 잔당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전방에 있는 산악 지형에 대한 정찰은 꼭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전차 1소대를 선두에 세운 뒤, 그 뒤로 정찰대를 후속시켜 산악 지대를 정찰한다. 이상.”
기마대나 정찰대만 보내 정찰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적의 선발대가 미리 매복하고 있다면?
적이 있다는 정찰보고에 대한 대가는 정찰대의 전멸이다.
패튼 전차 역시 산악 지형에서는 화력이 제한된다고는 해도, 든든한 장갑은 평지, 산을 가리지 않는다.
“앗! 깜짝이야. 여단장님? 아니 여단장님이 왜 여기에···”
“쉿. 조용히 하고 해치 닫게.”
해치에서 전차 내부를 들여다본 전차 중대장 심민수 중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단 들어와.
김상옥 그놈에게 걸렸다간 나 질질 끌려나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김상옥 중령의 눈을 피해 1번 전차에 몰래 올라타 있었다.
“가만히 있으려니 적적해서 말이야. 오늘만 좀 함께하지.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비밀이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명령이야.”
응, 그래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이야.
아주 근엄하고,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명령이라는 말에 심민수 중위의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기분 탓으로 묻어두기로 했다.
“여단장님께서 안 보이시면 아마 다들 난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난리 나는 일은 없을 것이네. 자네는 다른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서 출발이나 하게.”
정찰대가 출발하면 알게 될 것이다.
자연스레 김상옥 중령 귀에 들어가게 사람을 섭외해 뒀으니까.
‘정찰 한 번 나가기 더럽게 힘들군.’
대대장일 때는 그나마 덜한 거였다.
연대장일 때는 귀에 딱지가 앉게 여기저기서 걱정 섞인 잔소리를 들어야 했고, 아마 여단장인 지금은···
다녀와서 생각해야겠다.
계속 최전방에서 굴러다니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펑더화이도 병력을 북한으로 침투시키기 전에 호위병 몇 명만 대동한 채 북한 지역에 들어와 전선을 시찰했다던데?
“출발하겠습니다. 여단장님.”
“가지.”
특공여단 최고 지휘관인 내가 위험한 정찰에 나선다는 게 아주 위험한 행동이라는 건, 귀에 딱지가 듣게 들어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오늘 정찰에 동행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새롭게 부대에 편제된 기마대, 공병대, 정찰대, 전차 중대가 어느 정도의 전투력을 갖췄는지 알아야 했다.
기마대는 지동리 전투에서, 정찰대는 강건을 생포하는 전공을 세우면서 자신들의 전투력을 입증했다.
공병대는 차질없이 철조망 설치, 백린 연막탄 매설을 하는 것으로 봐서 당분간 손 볼일이 없을 것 같고, 남은 건 전차 중대뿐이었다.
패튼 전차는 여단의 핵심 전력이다.
문제는 그 핵심 전력이 누가,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무거운 쇳덩어리가 될 수도 있고, 적에게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미군 전차병들이야 익숙한 자국 전차를 능숙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지만, 심민수 중위를 포함한 국군 전차병들은 짧은 훈련을 받은 뒤 실전에 투입되는 건 지금이 처음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지에서 전방을 바라볼 때 왜인지 모를 불안한 기분이 엄습했다.
“정지.”
선두전차가 정지하자 뒤따라오던 전차들도 자리에 멈춰섰다.
그에 따라 전차 소대와 거리를 두고 잇따르던 정찰대 역시 발걸음을 멈췄다.
“와··· 여기는 전차 운용 교육 때 들었던, 전차 운용에 있어 최악의 조건을 다 갖춘 지형인 것 같습니다.”
“동의하는 바네.”
마치 좁은 협곡처럼 느껴졌다.
좌우가 전차가 지날 수 있는 길보다 조금 고지대인 것은 물론, 고지마저 수풀과 바위에 가려져 적의 매복을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정찰 없이 이런 지형에서 중공군 주력을 맞이하는 상상은 꿈에서도 하기 싫었다.
“선회하게. 진지로 돌아가지.”
길이 협소한 탓에 전차를 편하게 선회시키는 것조차 일이었다.
밀러 중대 전차 운전병보다는 조금 부족한 게 사실이지만, 전차를 움직이는데 버벅거림이 없었다.
주어진 짧은 시간에 최선을 다해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이런 곳에 매복이 없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빠져나갈 때까지 집중하게. 우리가 발견치 못한 숨어있는 적이 있을 수 있으니.”
심민수 중위의 입이 방정이 아니길 바랐다.
내 경험상 말을 내뱉는 순간, 없던 것도 생겨나는 기적이 눈앞에 펼쳐져 왔으니까.
-깡.
뭐지?
무언가 작은 물체가 패튼 전차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기에,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런 염병할.”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