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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80화 (80/149)

80화. 꼬리잡기(3)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 2군단 사령부.

2군단 사령부는 평안북도와 남도를 가르는 청천강 이남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중공군 피비린내가 채 몸에서 빠지기도 전 지프를 타고 2군단 사령부로 향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군. 아직 안 죽고 살아있었나?”

저놈의 일본도는 질리지도 않는지.

김석원 군단장이 애지중지 키우는 애완용 일본도를 품에 낀 채 말했다.

“예. 명줄이 제법 긴지 무사합니다.”

“자네가 온다는 보고는 받았네만. 그저 내가 보고 싶어 온 것은 아닐 테고··· 마침 7사단장, 8사단장이 들어와 있으니 함께 자리하겠나?”

“그리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간 낭비 없이 2군단에 속한 사단장들의 상태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단장들이 무엇 때문에 군단 사령부에 들어와 있는진 모르겠지만.

하기야 내가 이끄는 특공여단 사령부가 조금 많이 특이한 축에 속한다.

매번 전선 최전방에서 2km 이상 떨어져 사령부를 설치한 적이 없었으니까.

보통 연대 이상급 부대의 사령부는 적의 포격이나 기습에 당하지 않게 멀찍이 떨어져 설치됐다.

2군단에 속한 1사단, 7사단, 8사단 사령부 역시 아직 모두 청천강 이남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셨습니까. 군단장님. 생각보다 자주 보게 되는군. 이강산 대령.”

김석원 군단장과 함께 들어간 천막엔 7사단장 유재흥 준장과 8사단장 이성규 준장이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쉽게도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은 아마 나를 보는 게 그리 달갑진 않을 것이다.

평양에서 당한 쪽팔림은 좀 사라졌으려나?

“얼굴 보기 힘든 특공 여단장도 온 김에, 우리도 작전 회의나 해보는 건 어떤가. 대면해서 회의할 기회가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좋습니다.”

“예. 군단장님.”

“알겠습니다.”

김석원 군단장이 내 마음이라도 꿰뚫어 봤는지, 말하지 않았음에도 판을 깔아줬다.

사실 어떻게 판을 깔아야 하나 걱정하던 참이었다.

현재 상황으로만 놓고 보자면 중공군에 당한 부대도 없을뿐더러, 첫 조우에선 모두 승리했으니까.

설마 여기서 첫 전투 승리기념으로 수다나 떨고 있던 건 아니겠지?

“다들 바쁜 몸이니 핵심만 집어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

김석원 군단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말을 이었다.

“군단장님. 가장 중요한 각 부대 진격속도에 대해 논해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수차례 경험했듯 유재흥 준장은 평범이면 모를까 절대 깊은 생각 있는 지장은 아니다.

8사단장 이성규 준장은 직접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언제 적 주력과 마주칠지 모르는 상황에 군단 사령부 천막에 앉아 유재흥 준장과 수다나 떠는 걸 보니, 높게 평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의미 없는 수다나 떨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나로선, 깔린 판에 가장 먼저 말을 올리는 게 시간을 아낄 방법이었다.

“진격속도라··· 좋네. 마침 특공여단, 7사단, 8사단 모두 중공군과 한 차례씩 전투를 마친 참이니 말이야. 7사단장, 자네부터 말해보게.”

이 자리에서 오가는 말을 듣고 김석원 군단장이 1차 판단을 내릴 것이다.

호탕한 그의 성격답게 시원시원하게 회의를 이끌어나갔다.

우선 진행 좋고.

“우선 선봉에서 북진하던 8연대가 1개 중대 규모의 적을 완벽히 소탕하였습니다. 제가 보고 받은 바로는 적의 무장상태나 전술 숙련도는 국군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어째 사람이 그토록 발전이 없는지 의문이다.

뒤에 나올 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정찰 부대는 본디 가장 날래고, 훈련이 잘 된 병사들만이 속할 수 있는 부대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소규모였다고는 한들, 전체적인 중공군의 전투력이 그리 높지 않으리라고 판단됩니다. 기세를 잡은 김에 조금 더 서둘러 진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입으로 숨을 들이켰다간 아주 긴 한숨이 나올 것 같았으니까.

시키는 것만 잘해도 중간은 간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래, 모든 국군 지휘관이 똑똑하고 현명하며 순간적인 임기응변을 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음··· 이강산 대령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마지막에 발언권이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일찍 차례가 왔다.

“저는 중공군에 기습당한 전차 소대 전차 안에 직접 타고 그들과 전투를 치뤘습니다.”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는 말에 김석원 군단장의 콧수염이 조금씩 씰룩거렸다.

“제가 느낀 바로는 중공군이 장비나 보급이 부족한 건 맞지만 생각보다 집요하며, 전투 시에 날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좀처럼 예상하기 힘든 기동력을 지닌 그들과 근접 거리에서 대규모 전투가 일어난다면 아군 역시 큰 피해와 더불어 후퇴를 감수해야만 할 것입니다.”

적당히 기분 나쁘지 않게, 알아듣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마쳤다.

“이봐, 자네.”

유재흥 준장 이마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이번에도 역시 반대되는 의견에 열이라도 받은 모양이다.

“의정부에서부터 느낀 것이지만 자네 눈에는 다른 지휘관들이 전부 한낱 애송이로 보이고, 국군은 중공군조차 상대하기 버거운 허수아비 군대라는 건가? 무조건 자네 말만 옳다는 근거라도 있나?”

그가 기분 나쁜 티를 내며 화를 냈다.

전혀 기분 나쁠 만한 말투로 이야기하지 않았음에도, 그동안 쌓여왔던 자격지심이 폭발한 모양이다.

애석하게도 유재흥 사단장은 본인 입으로 본인의 무덤을 파고 말았다.

중공군의 공세 규모와 능력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선, 부대가 각개 전투에 돌입하면 국군이 중공군에 우세를 점하기 힘들다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누가 저 우유부단했던 유재흥의 눈을 멀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상관에 대한 예우를 갖춰주기로 했다.

정말 마지막으로.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찌 저 혼자만 잘났다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처럼 진격속도를 늦춰 적의 공격에 대해 충분한 방어를 대비하고, 대공세를 감행해 올 시 청천강 유역으로 후퇴해 청천강 방어선의 연합군과 합동 공격을 할 수 있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사단장님.”

국군 꼬리잡기 작전에 숨은 의도는 수차례 말했듯 중공군을 청천강으로 유인하기 위함이다.

[연합군이 자연스레 전투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끔 작전상 후퇴할 것.]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 이런 명령을 직접 내릴 순 없는 노릇이니까.

“이···”

내 말 뒤에 들리는 건 유재흥 준장의 입이 다물어지는 소리뿐이었다.

얼마나 세게 입을 닫았는지 어금니가 미세하게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7사단장. 진정하게. 서로 의견을 나누는 자리지, 우리끼리 다투는 자리가 아닐세. 나로서도 직접 전투에 참여해 보고 느낀 특공 여단장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는군.”

김석원 군단장이 다소 무거워져 버린 분위기를 쇄신시켰다.

전쟁은 떼쓰는 아이에게 사탕 하나 더 줄 수 있는 그런 자비로운 게 아니다.

“회의는 이쯤 하도록 하지. 특별히 상황이 바뀌는 게 없다면, 현행대로 전선을 맞춰 진격을 개시하도록 한다. 이상!”

쿵.

김석원 군단장이 일본도를 바닥에 찍으며 회의의 마침표를 찍었다.

“저는 이만 사단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재흥 사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더 감정이 격해진 모양이었다.

‘불안한데···’

그를 보고 멍청한 지휘관이라거나, 공적에 눈먼 지휘관이라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사단장이라는 직책은 만 명이 넘는 병력의 목숨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직책이다.

그에 걸맞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길 바랄 뿐이었다.

“자네가 이해하게나. 자네 같은 훌륭한 장교를 휘하에 두면 좋은 점이 대다수지만 상급 지휘관으로서 가끔 내가 자격이 없는 건 아닌가? 멍청한 건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네.”

작전 회의가 끝난 뒤, 8사단장 이성규 준장이 내 어깨를 두들겼다.

“감사합니다. 그저 느낀 점을 소신껏 말했을 뿐입니다. 회의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수많은 공적과 함께하기에 자네 소신이 빛을 발하는 것이네. 듣던 대로 가식 없이 시원시원하니 좋네. 그래. 함께 조금만 더 고생해보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성규 사단장이 뒤돌아섰다.

이 회의가 이대로 끝나도 괜찮은 걸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내 입이 본능적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사단장님! 혹시 말입니다···”

아직 회의할 거리가 조금 남은 것 같다.

***

정주 북쪽 10km 지점. 오후 3시.

날이 밝자마자 특공여단은 정주를 거쳐 구성으로 진격했다.

종종 미군 정찰기와 전투기들이 일대를 정찰하며 내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여단장님 저기··· 피난 행렬인 것 같습니다.”

1대대장이 말한 곳엔, 봇짐을 머리에 인 10명 남짓의 노인과 여자, 아이들이 행군 대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르신. 말씀 좀 묻겠습니다.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정주 부근에 들어서부터 부쩍 인파를 보기가 힘들었다.

이유를 찾기 위해 맨 앞에 있는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저 북쪽 10리 좀 넘어가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오. 되놈들이 집을 뒤져대는 탓에 살 수가 있어야지··· 쯧쯧. 여간 조심들 하시게.”

노인이 혀를 차며 그대로 가던 길을 향해 걸었다.

“되놈?”

“아마도 적유령을 넘어온 중공군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곳 노인들은 적유령을 되너미 고개라고 부른답니다.”

적유령 산맥은 아주 오래전부터 거란, 여진, 몽골 같은 외세가 침략해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두보나 다름없었다.

외침의 교두보가 반복되다 보니 되너미라는 명칭이 생긴 모양이다.

“군단에 보고하고 1대대는 이곳에 진지를 구축한다! 2대대 3대대에 미리 정해뒀던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라 전하게.”

“예! 알겠습니다.”

아직 밤이 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조금 일찍 진격을 중지했다.

북쪽에서 내려온 노인은 어찌 보면 현지 정보원이나 다름없다.

‘중공군이 가까이에 있다.’

같은 시각, 국군 2군단 예하 부대들은 각각 태천과 운산에 다다르고 있었고 특공여단이 진격을 멈춤에 따라 일제히 진격을 멈추고 진지를 구축했다.

“마냥 뜨겁게만 불어오던 바람이, 이젠 간혹 서늘한 바람도 섞여 불어옵니다. 여단장님.”

평안북도에서 가장 무더웠던 7월과 8월이 어느덧 지나가고 있었다.

“공병대에 평소보다 백린 연막탄과 철조망을 더 촘촘히 설치하라 전하게. 진지 또한 한 삽이라도 더 깊게 파내라 명하고.”

“예. 여단장님.”

오늘 밤, 왠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섬뜩한 예감과 함께 서늘한 바람이 뺨을 훑으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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