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81화 (81/149)

81화. 꼬리잡기(4)

“탄약 분배량을 두 배로 늘리고, 만일 적이 나타난다면 그 규모에 따라 2대대, 3대대 방어진지로 후퇴한다.”

진지를 전방과 후방으로 나눴을 땐, 전후방 긴밀한 의사소통과 더불어 부대원들이 정확한 후퇴 지점과 집결 지점을 숙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자칫 의사소통의 부재는 후퇴하는 아군을 적으로 착각해 오인 사격하는 끔찍한 참사를 불러올 수 있으니까.

“기마대와 전차 1소대를 말씀하신 위치에 배치 완료했습니다.”

“수고했네. 2대대와 3대대는?”

“양쪽 고지에 진지 구축을 완료했다고 합니다.”

병력 배치, 인접한 아군 상황을 파악하는 건 목숨과도 직결된 사안이다.

미비 된 점은 없는지 셀수없이 확인했다.

“이제 곧 어두워질 테니 자네도 진지로 돌아가게.”

“예. 마지막으로 진지 상태를 확인해보겠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진지 구축을 시작했음에도,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쯤이 돼서야 진지 구축이 마무리됐다.

한여름 장마의 빗줄기를 머금은 땅을 파 만든 진지 내부는 매우 습하고 축축했다.

진지를 파 내려가다 보면, 온갖 벌레는 물론 가끔 폭격에 맞아 죽은 북한군의 신체 일부가 나오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것조차 전쟁터에선 매우 평범한 일상의 범주에 속했다.

***

같은 날 저녁 11시경.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도 한참이 지났다.

찌르르. 찌르르.

사방이 고요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풀숲에 몸을 숨긴 채 짝을 찾는 귀뚜라미나 풀벌레들의 구애 울음소리뿐이었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가려나···’

천천히 걸으며 진지를 조용히 살폈다.

한줄기의 달빛 아래 편지를 써 내려가는 병사, 군복 안주머니나 전투모 안에 넣어둔 가족사진을 꺼내 보는 병사, 막간을 이용해 눈을 감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빨리 이 전쟁이 끝나야만 저들이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가족, 연인 품에 돌아가 안길 수 있다.

옷깃에 달린 계급장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다.

“어?”

눈을 감고 있던 병사가 눈을 번뜩 떴다.

‘왔군.’

내게 느껴진 무게가 책임의 무게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공기마저 무거워졌다.

“적이다! 사격 준비! 적의 공격에 대비해라!”

이내 소대장과 중대장들이 진지 이곳저곳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적이 출현했음을 전파했다.

모두가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소총 가늠쇠에 가져다 댔다.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중공군이 불어대는 악기 소리만 공허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피리, 나팔 소리는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느낄 만큼 섬뜩했다.

“여단장님! 1사단, 7사단, 8사단 진지에서도 나팔 소리가 들려온다는 보고입니다. 전 전선에 적이 출현했습니다!”

1대대 통신장교가 다급한 목소리로 타 부대 상황을 보고했다.

“알겠네. 자네는 예하 부대들과 통신이 두절 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주게.”

악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중공군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철조망과 백린 연막탄이 매설되어있는 지대에 도달한다.

‘조금만 더···’

-철컥.

진지 안에는 소총을 장전하는 소리와 병력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의 격앙된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사격개시! 쏴!”

사격 개시 명령과 거의 동시에 전방 곳곳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마침내 백린 연막탄이 심어진 곳까지 다가온 것이다.

백린이 타오르며 빛을 뿜어냈다.

시야가 서서히 확보됨에 따라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적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

-쾅!

진지 뒤에 숨어 있던 패튼 전차의 90mm 주포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쏴라! 아낌없이 퍼부어라!”

전투가 벌어지기에 앞서 2배의 탄약을 배분했기에, 탄약은 밤새 싸워도 될 만큼 충분했다.

가장 먼 곳에 심어놓은 백린 연막탄이 모두 터지자, 전선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공군 1개 연대. 1000여 명 규모.’

중공군의 머릿수가 1대대의 두 배 이상이라고는 하나, 공격은 방어하는 진영에 비해 몇 배는 많은 전력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패튼 전차와 더불어 대대 후방에서 쏘아낸 곡사 포탄이 중공군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쾅!

포탄이 굉음과 함께 땅을 두들겼다.

“여단장님! 여단장님!”

김상옥 중령이 자세를 낮춘 채 다가왔다.

“현재 적은 약 1개 연대 규모로 판단됩니다. 포격과 철조망에 막혀 아직 제대로 된 대응 사격조차 해오고 있지 않습니다.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계속 전투해! 단, 절대 추격은 금한다.”

중공군은 넓게 깔린 철조망 지대에 가로막혀 허우적거릴 뿐, 좀처럼 앞으로 돌격하지 못했다.

앞선 병력이 수월하게 돌격하지 못하자 명절 고속도로 마냥 병목현상이 일어났다.

-쾅!

병력이 밀집된 곳곳에 패튼 전차의 포탄이 정확히 떨어져 내렸다.

“다른 부대 상황은?”

“현재 전투가 벌어진 다른 부대들 또한 적을 1개 연대 규모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공세라면 후퇴 없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기갑 전력이나 화력지원이 거의 전무 한 중공군 1개 연대만으로는 진지와 화력 편제가 잘 갖춰진 1개 대대 방어선을 뚫어낼 수 없다.

“측면··· 장철부 중령에게 들어온 보고는 없나?”

“예. 아직 교전 중이라는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방어선 측면엔 기동력이 좋은 기마대를 배치했다.

정면 주력이 사그라져 가는 상황에 아직 측면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측면으로 우회한 병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쾅!

총성과 포성, 비명이 공기의 흐름을 가득 메운 상황에서도 다음을 생각해야 했다.

‘고작 1개 연대만을, 그것도 방어선 전면에만 투입 시켰다고?’

뭔가 이상했다.

중공군이 아무리 병력을 일개 소모품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1개 연대로 견고한 방어선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다.

예상한 것처럼 방어선 측면으로 우회해 포위하려는 작전도 아니라면···

“여단장님! 놈들이 후퇴합니다.”

아군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

반면, 철조망 지대를 넘어서지 못한 중공군의 시체가 길게 늘어져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몇몇 병사는 아예 진지 밖으로 나와 편한 자세를 잡고 후퇴하는 중공군을 향해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설마.

“통신병! 지금 당장 절대 적을 추격해선 안 된다고 각 부대에 전달해. 어서!”

꼬리잡기 작전을 펼치는 건, 국군뿐만이 아니었다.

“여단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다급한 목소리에 김상옥 중령이 다가왔다.

“이건 단순한 유인술이 아니야. 지금 절대 적을 추격해선 안 되네.”

“중공 지휘부가 백린 연막탄과 철조망 지대가 이리 촘촘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은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처음엔 단순한 중공군의 판단 착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갈수록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가장 먼저, 멀리서부터 피리로 자신들의 위치를 드러냈다는 점.

이때 까지만 해도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군에겐 두려움을 주니 그러려니 했다.

“고작 보병만으로 구성된 1개 연대로 방어선을 뚫으려 했던 게 아니야.”

더 수상한 점은 우회하는 병력이 없었다는 것.

무엇보다 적당히 병력을 소비한 채 후퇴하는 모습에 내 생각이 옳다는 확신이 느껴졌다.

“타 부대 상황은, 아직인가?”

타짜들이 호구를 작업하기 위한 판을 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적당히 잃어주는 것이다.

호구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며 판단을 흐리게 한다.

“8사단은 현재 교전을 마친 뒤, 진지 보수 중이라고 합니다. 추격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7사단은 아직···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유인책이라 판단하지 못한 건, 중공군이 유인책을 펼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한 곳에 병력을 집중시켜 포위 공격하는 제파 전술을 사용했다.

가뜩이나 많은 머릿수에 집중까지 되니, 적을 막아야 하는 국군이 보기엔 적이 파도처럼 밀고 온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이번엔 달랐을까.

정주, 태천, 운산.

국군이 북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아직 청천강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지역들이다.

펑더화이는 총공세를 퍼부어 국군 전체가 후퇴한들, 청천강만 넘으면 더 이상의 추격이 불가하다는 것을 염두하고 있던 것이다.

“여단장님···”

병력을 소비해가며 유인하는 유인책임을 인지한 이상, 적당히 속는척하며 적을 갉아먹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이 판에 호구가 앉아있어선 안 된다.

“7사단 후방에 있던 8연대가 후퇴하는 적을 쫓아 7사단 전방 3연대를 초월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런 씨발.”

게다가?

더 할 호구 짓이 남아 있다는 말로 들렸다.

“8연대 추격대는··· 유재흥 사단장님께서 직접 이끌고 가셨다 합니다.”

판에 앉은 호구는 본인이 호구인지 알지 못했다.

“당장 8사단 사령부 연결해! 빨리.”

8연대의 흔적이라도 건지려면, 서둘러야 했다.

***

튀어 오르는 피가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이런 제기랄. 후퇴! 전부 후퇴해!”

바닥을 흥건히 적실만큼 많은 피였다.

대부분 국군 8연대 병력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분명, 조금 전 3연대에서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중공군은 방어선에서 무기력하게 병력의 절반을 잃고 후퇴하고 있어야 했다.

중공군은 철조망 지대에 봉착하는 순간 전의를 상실했고 행색이 딱 거지꼴이라고 들었다.

이걸 그냥 보내?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눈앞에서 도망치는데,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컥··· 큽. 대체 어떻게···”

국군 7사단 8연대장 김용주 중령의 배에서 따듯한 피가 흘러나왔다.

손바닥으로 총알이 지나간 자리를 눌렀지만, 소용없었다.

꿀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가 새어 나오는 구멍이 한 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전속력으로 전방에 있던 3연대 진지를 추월해 중공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연···연대장님. 후. 저희 이제 죽는 겁니까? 무섭습니다. 저는 죽기 싫습니다. 연대장님 살려···”

-탕!

“이런 씨···씨발.”

총알이 날아와 공포에 빠져 허우적대던 8연대 병사의 목을 그대로 꿰뚫었다.

급소에 총상을 입은 병사는 단발마의 비명도 내뱉지 못한 채 고꾸라졌다.

“나와! 나와. 이 개새끼들아! 나오라고! 큽···”

간신히 M1 소총을 지렛대 삼아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저곳 총상을 입은 탓에 어디서 고통이 느껴지는 지도 모르겠다.

피를 그토록 쏟아냈으니, 이젠 몸 안에 쏟아낼 피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달빛이 나무 사이로 간간이 들어올 뿐, 사방이 어두웠다.

중공군을 추격해 이 곳에 들어온 뒤로, 중공군의 모습은 온데 간데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위치를 알 수도 없이 사방에서 쏟아진 총알세례에 8연대는 단숨에 와해됐다.

“후우··· 후웁···”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로웠다.

찢어진 뱃가죽 사이로 길쭉한 무언가 흘러나왔다.

'왜 웃음이 나는 거지?'

흘러나오는 내장을 손으로 부여잡고 있는 상황에 웃음이 나오다니, 이제 갈 때가 된 모양이다.

정신없이 도망치다보니 중공군의 총알도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혼자.

마지막 마무리는 스스로 해야 할 것 같다.

M1 소총 총구를 턱 밑에 가져다댔다.

총이 길어서 그런지 방아쇠를 당길 자세를 만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히히히.”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몸뚱이 이곳저곳에 구멍이 난 마당에 정상적인 웃음소리가 나올 리 없었다.

언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눈에선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봐. 그만! 그만둬! 8연대는 어디에 있나?”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잘 모르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