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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82화 (82/149)

82화. 꼬리잡기(5)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용주 중령이 아래턱에 대고 있던 M1 소총 개머리판을 발로 차버렸다.

“이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눈 감으면 안 되네. 위생병! 위생병!”

사지에서 빠져나오는 8연대 병력을 엄호하라는 지시를 받고 출동한 8사단 3연대 1대대장 최원석 중령이었다.

“서둘러!”

그의 외침에 팔에 십자가가 그려진 완장을 찬 위생병이 부리나케 달려왔으나, 적군이 코앞에 있는 야전에서 위생병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대대장님. 출혈이 너무 심합니다. 사실상···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위생병이 고개를 떨궜다.

김용주 중령의 상태는 전설 속 화타가 오더라도 손쓸 도리가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흐··· 흐업. 담··· 담배 있나?”

제대로 된 목소리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김용주 중령이 위생병에게 담배가 있냐며 물었다.

담배라는 말에 위생병이 최원석 중령의 눈치를 살폈다.

“줘. 원하는 대로 해 주게.”

“예. 알겠습니다.”

김용주 중령의 눈동자는 이미 잃어버린 초점을 되찾지 못할 만큼 무기력했다.

서서히 생명이 꺼져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위생병이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김용주 중령 입에 물려주었다.

“힘들겠지만, 자네가 말을 해줘야 8연대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네. 8연대는 어디에 있나.”

“후-웁. 8··· 8연대는···”

김용주 중령이 마지막 진기를 짜내 호흡을 들이켰다.

들숨에 불이 붙은 담배 앞부분이 붉게 타올랐다.

“대대장님. 전사했습니다.”

그는 결국 들이킨 호흡을 내뱉지 못했다.

생애 마지막 소원이었던 담배에 보답이라도 하듯, 배를 부여잡고 있던 오른손 검지를 8연대가 중공군을 추격한 방향으로 꺾어놓은 채.

탐욕과 전공에 눈이 먼 지휘관의 최후는 아름답지 않았다.

어떤 부귀영화나 권세, 권력을 위해 명령을 어겨가며 이곳에 와 죽음을 맞이한 것일까?

이번 작전에 성공해 의기양양함을 뽐내려던 김용주 중령의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은 담배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사치라는 듯, 하늘은 그의 마지막 소원조차 이뤄주지 않았다.

“후퇴하는 8연대를 엄호해 이곳을 빠져나간다! 절대 산속으로 발을 들여선 안 된다. 알겠나?”

“끄아아악! 살··· 살려줘!”

최원석 중령이 내린 명령에 대대원들이 답하기도 전, 산속에서 비명과 외침이 메아리쳤다.

완전한 공포심에 물든 사람의 목소리는 귀신의 울음소리, 귀곡성(鬼哭聲)에 가까웠다.

“1중대, 2중대 사격 준비!”

-철컥.

장전 손잡이를 당기며 들리는 장전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당연하게도 진지를 구축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귀곡성이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1중대, 2중대가 그대로 땅에 엎드리며 엎드려쏴 자세를 취했다.

“3중대는 후퇴하는 아군을 수습해 전투 가능 인원과 전투 불가 인원으로 구분해 전투 가능 인원은 현 방어선에, 불가능한 인원은 후방으로 이격시킨다. 이상!”

명령을 마친 최원석 중령 자신도 땅에 엎드린 채 방아쇠에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옵니다. 대대장님.”

비명과 총성이 점점 가까워졌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려는 찰나, 한 무더기의 인파가 산속에서 빠져나왔다.

국군이었다.

“아군이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중대장과 소대장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들의 목청과 맞바꿔 후퇴하는 아군을 사격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뒤로도 살아남은 8연대 병력이 계속해서 1, 2중대 총구를 지나 후방으로 이동했다.

질서?

당연히 그런 고상하고 신사다운 건 존재하지 않았다.

“대대장님. 이미 3중대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벌써 넘었습니다. 8연대 병력 통제가 되질 않습니다!”

3중대장의 호소에 최석원 중령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이런··· 개판이 따로 없군.”

저승사자의 손을 잡고 저승으로 떠나기 직전, 구사일생으로 후퇴에 성공한 8연대 병력은 정상적으로 운용되는 국군부대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전쟁터에서 목숨과도 다름없다는 개인 화기를 잃어버린 병력이 절반, 인간으로서의 사고력과 판단력을 제대로 부여잡고 있는 이도 드물었다.

후퇴한 8연대 병력 중 전투에 투입 가능한 인원은 열 중 둘, 셋을 넘어가지 않았다.

-탕!

-탕! 탕! 탕!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총성이 울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대대장님! 후퇴하는 8연대를 추격한 중공군 중 일부가 방어선 전방에 나타났습니다!”

“이런 제기랄. 최대한 정확하게 조준 사격하라고 지시해!”

후퇴하는 8연대 병력과 그를 추격하는 중공군이 뒤섞여 방어선 전면에 쏟아져 나오는 상황, 이건 처할 수 있는 상황 중 최악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방어선 뒤에선 3중대가 후퇴 병력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전투에 승리하려면, 적을 조준한 방아쇠를 당김에 있어 일말의 주저함도, 자비도 없어야 한다.

울리는 총성의 빈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1중대와 2중대가 얼마나 고심 끝에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지.

“아군과 섞인 중공군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방어선과의 거리가 빠른 속도로 좁혀지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오늘따라 밤이 아주 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해가 이곳을 훤히 비추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건, 동네 바보도 알만한 사실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아군과 중공군이 뒤섞여 쏟아져 나오고 있다.

게다가 그들 모두 젖먹던 힘까지 써서 도망치고, 쫓는 중일 터.

아군을 피해 적만 정확하게 사격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대장님! 전원 사격 명령을 내리시든, 퇴각 명령을 내리시든, 명령을 내려주셔야 합니다!”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중 최선은 없었다.

최악과 그보다는 나은 선택지만 있을 뿐이었다.

별반 차이가 없긴 했지만.

“전원···”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땅을 울리며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최원석 중령의 고막을 때렸다.

***

최원석 중령의 고막을 때린 소리는, 그가 빠르고 정확한 선택을 하도록 도왔다.

“전원 착검!”

1대대 방어선 일대에 착검 명령이 떨어졌다.

명령에 따라 부대원들이 총구 앞부분에 잘 벼려진 대검을 장착했다.

“이랴!”

장철부 중령의 기마대가 두려움 따윈 배우지도 않았다는 듯, 전투에 합류했다.

맹렬한 기세로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는 성난 파도가 방어선에 다다르기 직전.

“전원 돌격!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최원석 중령의 착검 돌격 명령이 떨어졌다.

명령이 떨어지자 엎드려 있던 1중대, 2중대 부대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퍽.

잘 벼려진 대검은 부드러운 인간의 피부와 살을 단번에 파고들어 적의 숨통을 깔끔하게 끊어놓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단단한 갈비뼈가 대검의 진로를 방해한다.

최원석 중령이 개머리판을 비틀어 대검을 중공군 가슴팍에 쑤셔 넣었다.

“끄윽···”

급소인 심장을 찔린 중공군이 입에 거품을 물며 바닥에 쓰러졌다.

“여단장님께서 보내서 왔네. 어서 병력을 수습해 본대로 돌아가지. 이랴!”

장철부 중령이 말 위에서 짧은 안부를 건네고는, 이내 거칠게 말 고삐를 당겨 중공군을 향해 쏘아졌다.

“고··· 고맙습니다. 1대대! 후퇴한다! 후퇴!”

최석원 중령은 같은 중령 계급을 가진 장철부 중령에게 존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1대대가 후퇴할 때까지 그들을 엄호한다! 모조리 죽여라!”

장철부 중령의 기마대는 전세를 단번에 뒤집은 것으로도 모자라 권총, 대검을 사용해 중공군만을 도륙해나갔다.

‘저기 살아 있었군.’

장철부 중령의 시야에 겁에 질린 채 주저앉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7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보였다.

서둘러 군마를 몰아 유재흥 사단장에게 향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가시죠.”

장철부 중령이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눈동자에 초점이 있는 걸 보니, 비교적 정신이 멀쩡한 축에 속했다.

“그래.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 주게. 빨리!”

유재흥 사단장이 장철부 중령이 타고 온 군마에 올라타려는 순간.

“사단장님?”

빡!

장철부 중령이 개머리판으로 유재흥 사단장의 머리를 쳐 기절시킨 뒤 군마에 올려 태웠다.

가져온 밧줄로 그가 군마에서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묶은 뒤, 말에 올라탔다.

“제 말에 함부로 손대지 마십쇼. 생각 같아선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은데, 명령이라 참고, 또 참는 겁니다. 사단장님.”

말 뒤에 초라하게 묶여 기절한 사단장을 보며 혀를 찼다.

기마 대장의 군마는 두 명을 등에 태웠음에도, 별다른 기색조차 없었다.

“이랴! 가자!”

밀물처럼 전선을 휩쓸어버린 기마대가 썰물처럼 전선을 빠져나갔다.

유능한 아군보다 무서운 건, 무능한 아군이라는 교훈을 뼈에 남긴 채.

***

2군단 사령부. 청천강 이남.

전과 똑같지만 다른 회의가 열렸다.

같은 자리, 같은 사람이 모인 회의였지만, 분위기만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8연대 병력 3500명 중 2000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실종됐고, 남은 인원 중 전투 가능 인원은 채 500명이 되질 않습니다. 군단장님.”

사실상 연대 해체에 가까운 피해였다.

오른쪽 날개를 잃은 7사단도 더는 사단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처참한 보고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은, 김석원 군단장의 유쾌함도 셀 틈을 찾지 못할 만큼 밀도가 높았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김석원 군단장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군단장님!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저에게 딱 한 번의 기회만 주신다면··· 윽.”

밧줄에 묶인 유재흥 사단장이 입을 열자, 김석원 군단장이 일본도를 검집 채 그의 명치에 박아넣었다.

“혀를 잘라버리기 전에 입도 뻥긋하지 말게.”

“8사단장?”

김석원 군단장이 이성규 사단장을 보며 물었다.

그의 질문에 이성규 사단장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여단장.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상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 및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해 수천 명의 아군을 죽인 자는 즉결처분 해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절대, 살려둬선 안 된다.

“그럼 왜 이 자를 살려서 이곳까지 데려온 거지?”

김석원 군단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옷깃에 붙은 별 때문에 살려둔 겁니다. 중공군이 국군 사단장을 생포하거나 사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기가 더욱 크게 오를 것입니다. 죽어서도 아군에 악랄한 피해를 줄 것을 예방하고자 함이지, 살려둘 필요가 없습니다.”

“법··· 법대로 처분받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어디에서도 사단장을 즉결처형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가 받아야 할 죄가 있다면 법정에서 달게 받겠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창피할 정도로 추악하군.”

수천 명을 희생시킨 장본인이 법을 운운하자 분노가 치솟았다.

끝까지 추하고,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속에 있던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감히! 이강산 대령 너 이 새끼···”

-탕!

김석원 군단장 권총에서 화약 연기가 피어올랐다.

“유재흥 준장을 상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으로 즉결 처형한다. 이하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군단장인 내가 진다.”

즉결처형을 마친 김석원 군단장이 권총을 탁자에 던졌다.

“치워.”

총성을 듣고 안으로 달려 들어온 참모진이 유재흥 사단장의 시신을 수습했다.

“후··· 자, 아군 1개 연대가 전멸하고 적의 사기는 크게 올랐네. 이제 어쩌면 좋겠는가.”

김석원 군단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를 대신해 즉결처분을 내린 그의 심란함이 묻어나왔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나설 차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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