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하늘도 눈 감아 줄 일(2)
평안북도 구성 남단 10km 지점 특공여단 지휘소.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하게 됐다.”
오른쪽 왼쪽 날개를 다 떼어낸 몸통만으로 중공군과 맞서야 한다는 건, 그 누가 듣더라도 달갑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태천과 운산에 진출한 7사단과 8사단이 청천강 유역으로 후퇴하기로 했다.”
“이런 제길··· 신의주 진격은 완전히 물 건너간 것입니까?”
1대대장 김상옥 중령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말했다.
일부 부대가 아닌, 서부 전선 전체를 뒤로 후퇴시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듯, 달가운 소식도 뜸 들일 시간 없이 바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우리 특공여단은 이곳에 남아 중공군 주력을 청천강으로 유인할 미끼 역할을 맡았다. 지금까지 해왔던 그 어떤 전투보다 더 치열하고, 위험할 것이다.”
“여단 단독으로 말입니까?”
“그렇다. 자칫하면 적에게 포위되어 전멸당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작전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 작전에서 빠지고 싶은 사람은 지금 빠져도 좋다. 그 어떤 불이익도 없이 다른 부대로 전출시켜 줄 것을 약속하지. 대신 시간이 없으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주길 바란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정적은 매우 찰나에 불과했다.
“여단장님.”
2대대장 문기준 중령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작전에서 빠지려는 지휘관에게 의견을 바꾸도록 회유하거나, 겁쟁이라며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누구도 죽고 사는 것을 강요할 순 없는 법이니까.
“왜 혼자 멋있는 건 다하시는 겁니까? 저도 멋져질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무래도 지금이 그 기회인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은 모르겠지만 저 문기준은 남습니다!”
자칫 무거워질지 모르는 분위기를 먼저 풀어내려는 문기준 중령의 노력이 엿보였다.
“고맙네.”
고맙고, 감사했다.
이 말 외에 할 다른 말은 딱히 떠오르질 않았다.
“저는 여단장님이 강제로 전출 보내셔도 바짓가랑이 붙잡고 안 놔드릴 겁니다. 저 말고 전차 중대를 지휘할 인재가 또 있답니까?”
이미 한차례 내게 목숨을 빚진 것이나 다름없는 전차중대장 심민수 중위의 앙칼진 대답과.
“전쟁터에 목숨을 걸지 않고 싸우는 군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단장님 지휘 아래 있는 이곳이 한반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이 가장 안전하다는 김상옥 중령의 묘한 설득력 있는 말 뒤로 모든 지휘관이 특공여단을 떠나지 않을 의사를 밝혔다.
“난 분명 기회를 줬네. 자! 그럼 이제 진짜 작전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나를 바라보는 그들 눈엔 전의가 뜨겁게 타오를 뿐, 후회나 망설임 따위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구성 일대 평야 지형.
그간 구축해왔던 1자 형 진지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진지를 만드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바람이 꽤 선선해졌음에도, 모두의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다른 부대로 전출 갈 기회는 지휘관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형제, 부자지간에 함께 부대에 있거나, 홀로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병사들에겐 같은 조건의 기회가 주어졌다.
“저희는 아무 데도 안 갑니다.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겠습니다!”
대부분. 아니 모두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결국, 부대를 떠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까지 스스로 훌륭한 지휘관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혹시라도 인기투표 비슷한 걸 한다면, 어쩌면 중간도 못 갈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전투에서 공적을 세우는 것과, 존경받는 것은 어쩌면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
조금 유별난 여단장을 만났다는 이유로 부대원들은 항상 가장 위험한 작전을 수행하는 선봉에 서야 했다.
특공여단은 다른 부대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했고, 할 일도 더 많았다.
‘나도 꽤 괜찮은 지휘관이 된 모양이야.’
훌륭?
훌륭은 모르겠고, 꽤 괜찮은 지휘관이라는 자찬은 해도 될 것 같다.
이 작전이 위험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를 진정으로 믿고 따라준 것이다.
이런 믿음에 작은 흠집 하나도 내고 싶지 않았다.
“여단장님. 지시대로 중공군 정찰대를 놓아주었습니다. 아마, 일부러 놓아주었다는 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수고했네. 진지 구축 상황은?”
아군 진지를 정찰하고 돌아가는 중공군 정찰대를 일부러 놓아주었다.
아마 평생 술안주로 삼을걸?
셀 수 없이 많은 총알이 날아들었지만, 그 어떤 총알도 자신에게 닿지 못했다고 자랑하면서.
도망치느라 바빠 추격대가 일부러 허공을 향해 사격했다는 건 평생 알지 못할 것이다.
“본 진지 구축은 좀 전에 끝났습니다. 기관총 진지와 전차 포대도 이제 곧 마무리단계에 접어들었고, 말씀하신 대로 진지 구축을 일찍 마친 인원들을 추려 공병대에 지원을 보냈습니다.”
공병대는 정말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숨은 공신이다.
철조망 설치, 백린 연막탄 및 지뢰 매설, 상황에 따라 전투에 투입되기까지.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부대였다.
히이잉!
군마대 대원들이 투레질하는 군마 입에 여물을 든든히 넣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 맡은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훌륭히 수행하며 진지를 견고히 만들어 나갔다.
특공여단은 서부 전선의 견부진지(肩部陣地) 그 자체였다.
전방 및 측 후방 모두를 지휘소 한곳에서 통제할 수 있고, 적이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요충지에 구축된 견부진지(肩部陣地)임과 동시에 중공군을 효과적으로 살상할 살상진지(殺傷陣地)이기도 했다.
“여단장님. 진지 구축이 끝났습니다. 공병대도 임무를 마치고 진지로 복귀하고 있다고 합니다.”
1대대장 김상옥 중령이 슬며시 다가와 진지 구축이 끝났음을 알려왔다.
그의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은 그저 가만히 앉아 명령만 내린 것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탄약통을 진지에 일정한 간격으로 미리 배분하고, 절대 탄약이 부족하지 않도록 비축분을 최대한 풀어 놓게.”
“예. 알겠습니다.”
새롭게 구축한 진지는 지름 2km 남짓의 원형 진지였다.
김상옥 중령이 자리를 떠남과 동시에 시야를 넓혀 주변을 살피자 최선을 다해 구축한 진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북쪽엔 1대대, 서쪽엔 2대대, 동쪽엔 3대대가 진지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중공군 일부 부대가 후방으로 우회해 침투할 가능성을 미리 염두해 남쪽에는 기마대와 공병대, 지원 중대를 배치했다.
동서남북 어디 한 곳도 비어 보이는 곳이 없었다.
“자, 와서 물어라.”
진지 구축이 완벽히 끝난 지금, 남은 할 일은 중공군이 미끼를 물때까지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
중공군 38군 전방 지휘소.
“동지! 군장 동지!”
중공군 두 명이 거의 쓰러지다시피 지휘소 안으로 들어왔다.
한국군 진지를 정찰하기 위해 보낸 정찰병이었다.
“무사히 돌아왔군. 여긴 안전하니 숨돌리고 천천히 말하게들.”
정찰병을 다독인 사람은 38 군장 량싱추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군장급 지휘관이 일개 정찰병을 직접 대면하고 보고받는 일은 없다.
반드시 직접 보고하라는 량싱추의 명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위군 놈들이 후퇴하는 걸 제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대규모 병력을 한 번에 후퇴시키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1개 여단 규모의 부대가 구성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량싱추의 눈매가 가늘게 찢어졌다.
“지난번 전투 막바지쯤 39군에 큰 피해를 줬던 기마대 있지 않습니까? 그 기마대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다른 후퇴하는 위군 부대에는 말이 보이지 않았으니 아마 확실할 겁니다. 죽을 힘을 다해 놈들 추격대를 간신히 따돌리고···”
“시끄럽긴. 보고 끝났으면 나가봐.”
“아직 다 말씀드린···악!”
권총이 있는 허리춤에 손이 가자, 정찰병이 들어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밖을 향해 튀어나갔다.
중요한 건 정찰 보고지, 정찰병이 아니었다.
정찰대가 몰살당했더라도 보고만 제대로 들어왔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허리춤에 가려던 오른손의 궤적을 바꿔 위로 들자, 한 발자국 뒤에 떨어져 있던 부관이 가까이 다가왔다.
“부총관 덩화 동지에게 알려라. 나 량싱추가 이끄는 38군이 오늘 밤 위군 사냥을 위해 출정한다고.”
지난번 수많은 군장과 정치 위원이 모인 자리에서 펑더화이 총관에게 받았던 모욕을 생각하면, 아직도 밤마다 치가 떨렸다.
불명예스러운 치욕은, 오직 그보다 큰 공적으로만 씻어낼 수 있다.
본대 후퇴를 엄호하는 한국군 1개 여단을 몰살시키고 후퇴하는 적의 꼬리를 물어뜯을 생각에 미소가 번졌다.
“당장 3개 사단을 출동시켜 놈들 방어선부터 부숴버린다. 해가 뜨기 전까지 모조리 다 죽여버리겠어.”
“예! 동지. 방어선과 가장 가까운 전방 3개 사단에 즉시 출동 명령을 하달하겠습니다.”
량싱추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지휘소 안을 가득 메웠다.
***
어디 한 곳도 찌그러지지 않은, 완벽하게 둥근 달이 하늘에 떠올랐다.
마치 특공여단이 구축한 원형진지를 보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달이 크고 둥근 것 같군. 안 그런가?”
원형 진지 중심에 있는 지휘소에서 달을 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저렇게 밝은 달이 뜬 저녁에 개울가에서 물놀이나 실컷 하면 원이 없겠습니다.”
김상옥 중령이 좀처럼 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될 걸세.”
달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싶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저 그 생각이 무엇이든 이뤄질 것이라 대답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늘에 걸려 밝게 빛나는 달이, 중공군과의 교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오는 것 같았다.
“달을 보고 있으니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여단장님은 달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글쎄.
강렬한 태양 빛을 머금어 은은하게 빛나는 달은 낭만의 대명사이긴 한데.
그런 낭만의 대명사를 보고도 낭만 가득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생각은 무슨. 저 달이 조금이라도 빨리 사라져 주기만을 바랄 뿐이네.”
“역시. 여단장님께선 그 말씀을 하실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가? 이제 나를 너무 잘 아는군.”
“제가 여단장님을 모르면 그 누가 알겠습니까.”
김상옥 중령의 웃음소리가 왠지 조금은 쓰게 들렸다.
중공군과의 전투는 주로 달이 뜬 밤에 일어난다.
물론 낮에도 곳곳에서 산발적인 교전이 일어나곤 하지만, 밤과 비할 것이 아니었다.
오늘 저 보름달이 전부 지켜볼 것이다.
누가 죽고, 누가 사는지.
“내가 달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해가 뜨면 알려주겠네. 가지.”
아주 구슬픈 피리 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