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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85화 (85/149)

85화. 하늘도 눈 감아 줄 일(3)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피리와 나팔 소리가 중공군 39군의 총공세가 임박했음을 알려왔다.

가장 먼저 놈들과 전투를 벌이게 될 부대는 원형 진지 북쪽에 위치한 1대대.

1대대 진지 한가운데에 타고 온 지프를 세운 뒤, 지프를 단상 삼아 올라섰다.

“모두 들어라!”

그간 전투 전 연설이나 훈시는 되도록 삼갔다.

지휘관이 뽐내는 언변 솜씨를 듣고 있을 바에, 단 몇 초라도 더 쉬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두려울 때가 있다.

밤이라는 어둠에 숨어 사방에서 불어대는 중공군의 피리 소리는 지독하리만큼 아군의 심리를 교묘히 괴롭히며 파고들었다.

나를 믿고 이곳에 남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피리 소리가 주는 두려움과 공포를 지워주는 것 또한, 내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땅을 파고, 총을 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중공군 놈들 머릿수가 우리보다 월등히 많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을 절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총을 들고 적과 싸운다 해서 모두가 군인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곳을 지켜야 할 분명한 명분과 목적이 있다. 또한, 개개인이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정확히 아는 진짜 군인이다.”

나아가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았고, 물러나는 것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물러섰다.

특공여단은 일류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라! 그 어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있는지, 어설프게 흉내 낸 가짜가 진짜를 이길 수 있는지를. 답을 찾았다면 스스로 찾아낸 답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싸워라. 내일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대들이 내린 답이 정답이고 진리일 테니.”

말을 끝마치고 조용히 지프에서 내려왔다.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피리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김상옥 중령. 1대대 전원이 내일 해를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라. 나 역시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답을 찾을 것이다.”

김상옥 중령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1대대! 적 포격에 대비해라! 전투 준비!”

저 멀리 횃불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어림잡아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횃불이 공간 전체를 집어삼켰다.

***

쾅!

중공군의 공격준비포격이 비 오듯 쏟아졌다.

소련으로부터 공여받거나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으로부터 노획한 야포와 박격포였다.

한 차례 포격이 잠잠해지자, 1대대 진지 뒤쪽에서 한 줄기 빛이 북쪽을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빛이 하늘 높이 솟구친 뒤, 폭발해 그 주변을 밝게 비췄다.

“사격 개시!”

1대대장의 외침과 함께 진지에서 기관총과 소총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중공군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펑!

중공군은 공격준비포격이 이어지던 틈을 타 이미 철조망과 지뢰 지대에 다다라 있었다.

사방에서 공병대가 심어놓은 대인지뢰가 터져나갔다.

“이··· 이런 제기랄. 새까맣게 몰려왔군.”

조명탄이 밝힌 주변은 온통 중공군으로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얼마나 그 수가 많았으면 정체가 일어나 빠르게 진지로 돌격하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뒤엉켜 넘어져 넘어진 전우를 밟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넘어진 중공군은 뒤에서 몰려오는 인해 탓에 다시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지금이다! 격발!”

총 대신 격발기를 손에 쥔 채 격발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공병 중대원들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일제히 격발기를 힘껏 움켜줬다.

쾅! 쾅! 쾅!

철조망 지대 뒤에 설치해 둔 크레모아가 일제히 터지며 일선에 있던 중공군을 지워버렸다.

박격포가 터질 때와 비슷한 소리였지만, 근거리에서 정확하게 터진 크레모아의 파괴력은 박격포와 비할 것이 아니었다.

TNT 폭발 화력을 추진 삼아 날아간 수천 개의 쇠 구슬은 제 힘이 다할 때까지 중공군을 관통하며 육신을 찢어발겼다.

“여단장님! 2대대와 3대대 진지도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놈들이 쏴도 쏴도 끝없이 몰려옵니다.”

“적이 1차 저지선을 넘는 즉시 화력 요청해! 어느 한 곳도 절대 뚫려선 안 된다.”

후방을 제외한 4면 중 3면이 중공군을 맞아 힘겨운 전투에 돌입했다.

진지 안에선, 조준 사격을 할 필요가 없었다.

총구 높낮이만 대충 맞추고 방아쇠를 당기면, 진지를 향해 달려오던 누군가는 총알에 맞아 쓰러졌다.

진지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위험을 감수하고 사격하는 것보다, 그저 아른거리는 사람 형체에 마구 갈기는 게 더 효율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염병할. 테트리스가 따로 없군.”

재생성이라도 하듯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을 보고 떠오른 생각이었다.

가까운 블록부터 처리해 제거하고 또 제거해도 반복해서 블록이 떨어지는 무한 테트리스.

물론 시간제한이 없는 건 아니다.

동이 틀 때까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어떻게든.

“여단장님! 2대대, 3대대까지 1차 저지선이 모두 뚫렸습니다. 적들이 진지에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가상으로 그어둔 1차 저지선은 가장 오랫동안 적을 묶어둘 수 있는 지뢰, 철조망 지대였다.

적이 철조망 지대를 돌파했다는 건, 적의 공세 속도가 한층 빨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군단 포병대와 여단 포병대에 정해진 순서대로 화력 요청해. 전달한 좌표로 당장 가진 탄을 모조리 쏟아부으라고.”

“예!”

통신 장교가 부리나케 무전기를 향해 뛰어갔다.

1차 저지선이 돌파당하자, 중공군이 가까워지는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빨라졌다.

하지만 괜찮다.

1차 저지선보다 더 강력한 2차 저지선이 남아 있으니까.

“좋았어.”

통신 장교가 두 팔을 위로 말아 올려 수신호를 보내왔다.

2차 저지선이 만들어질 준비가 됐다는 뜻이었다.

2차 저지선은 1차 저지선의 철조망처럼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지선,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고?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완벽할 때가 있다.

진지 안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온다.’

진지에서 쏘는 박격포와 기관총, 전차포 사격만으로는 10배에 가까운 중공군의 공세를 견뎌낼 수 없다.

하늘에서 수백 개의 섬광이 일제히 땅으로 내리쳤다.

쾅!

진지 후방에 배치된 군단, 여단 포병대대에서 쏘아낸 고폭탄 수 백발이 미리 지정해둔 좌표에 정확히 떨어졌다.

같은 시간, 일제히 사격한 탓에 수 백발의 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마치 하나의 큰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각기 다른 곳에 떨어져 있는 포대에서 서로 다른 고각(高角)과 사각으로 포를 발사했기에 정확한 동시 탄착 사격까진 아니었지만, 완벽한 효력사(效力射)였다.

탄의 장막.

연신 떨어지는 섬광이 여단 진지와 중공군을 갈라놓으며 보이지 않는 장막을 만들어냈다.

이곳에 발을 들이미는 걸 하늘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듯이.

눈에 보이지 않던 2차 저지선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와···”

그 광경에 일부 병사들과 지휘관들은 연신 당겨대던 방아쇠울 밖으로 손가락을 꺼낸 뒤, 넋을 놓고 바라보기까지 했다.

“수정할 것 없이 지금 좌표 그대로 계속 포격 요청해.”

“예! 여단장님.”

초탄(初彈)이 떨어진 후엔 포의 성능이나 포를 쏘는 이의 숙련도에 따라 발사속도가 달라졌기에 조금씩 포성이 어긋나곤 있었지만, 상관없다.

이미 완벽한 평균 탄착점을 형성해 탄의 장막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으니까.

장막에 걸쳐진 중공군들은 뼛조각, 살점 하나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잘고 곱게 분해됐다.

장막을 넘어선 이들에겐 기관총과 소총이 쏘아진 총알 세례가 집중됐다.

거침없이 밀려오던 인해(人海) 곳곳에서 주춤하며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는 파도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말이야, 이미 해안을 향한 파도가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갈 수 있던가?

너무 많은 병력이 밀집한 탓에,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자기들끼리 등을 떠밀며 탄의 장막으로 전우를 밀어 넣었다.

“넉넉히 넣긴 했는데, 준비한 첫 번째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군.”

내가 한반도에 찾아온 손님에게 준비한 선물은 하나가 아니다.

어렸을 적부터 배웠다.

버선발로 직접 찾아온 손님은 아주 정성을 다해 대접해야 한다고.

손님이 섭섭해하는 일이 없도록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두둑하게 챙겨줄 것이다.

“오늘 하나님이 좀 바쁘시겠네.”

일거리가 조금 많이 늘어날 것 같은데, 일할 분들은 충분히 뽑아놓으셨나 모르겠다.

설마 일거리가 너무 많다며 노하시진 않겠지?

아, 걱정할 필요 없겠다.

이번엔 하늘도 눈 감아 주기로 미리 약속했으니까.

***

일본 도쿄. 극동 사령부.

“사령관님. 중공군이 이강산 대령이 이끄는 특공여단 방어 진지를 향해 공세를 감행했다는 보고입니다. 최소 3개 사단 규모가 투입됐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번엔 정말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펀치 중령의 심각한 보고에 맥아더 사령관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정말 어려울지도 모르겠군. 중공군이 말이야.”

“예?”

아까 타 준 커피에 독이라도 들어있었나?

맥아더 사령관이 드디어 노망이라도 난 건 아닌지 그의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봤다.

노망은 아닌 것 같은데.

노망난 노인의 눈동자라기엔 너무 또렷하고 선명했다.

“만약 내가 중공군 사령관이었다면, 동서남북에 각각 군단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고 진지 중앙에 공수부대도 투입했을 것이네.”

어떻게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저런 광기에 가까운 말을 아무렇게 내뱉는지, 펀치 중령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농담이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나저나 정말 이강산 대령이 말했던 대로 흘러가는군”

맥아더 사령관의 여유로운 태도만 놓고 보면, 마치 한국군 3개 사단이 구축한 우주 방어 진지를 중공군이 1개 여단으로 뚫으려는 어이없는 작전을 펼친다고 착각할 법했다.

그의 머릿속에 특공여단이 진지 방어에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워싱턴에선 아직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적당히 이 전쟁을 마무리할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한국군을 지원할 것인지···”

“자네는 아직 멀었군. 내 밑에서 한참 더 배워야겠어.”

순간 펀치 중령 이마에 혈관이 튀어나오려다 들어갔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맥아더 사령관은 저렇게 돌려 말하고 이해할 수 없는 소리나 내뱉는 인물이 아니었다.

극도로 직설적이고, 고집불통에 가까웠다.

더럽게 재미없는 농담을 툭툭 내뱉지도 않았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며칠 안에 워싱턴에서 연락이 오겠군. 한국에 갈 준비나 미리미리 해놓게. 이번엔 더 길어질지도 모르니 가족들과 시간도 좀 보내고. 생각난 김에 지금 퇴근해.”

퇴근이라는 말에 펀치 중령은 생각했다.

자신이 모시는 맥아더 사령관님이 최고라고.

일찍 퇴근시켜주는 상사만큼 최고의 상사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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