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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86화 (86/149)

86화. 예상된 일(1)

밤새도록 이어진 전투에 전열이 오를 대로 오른 특공여단보다 먼저 지친 건, 기관총이었다.

“여단장님! 기관총 총열이 모두 녹아 더 이상의 화력지원이 불가능합니다.”

“보유한 예비 총열도 모두 소진한 건가?”

“예. 예비 총열이 전부 바닥났습니다.”

공랭식 경기관총 M1919는 그렇다 해도, 물을 부어 총열을 식히는 M1917 중기관총의 총열까지 모두 녹아버릴 정도로 쉴 새 없는 전투가 이어졌다.

기관총 진지 근처에는 이미 작은 언덕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많은 탄피가 쌓여있었고, 기관총 사수들이 시간차를 두고 교대해가며 방아쇠를 당겼음에도 온몸이 심하게 떨릴 만큼 많은 총알을 중공군에 쏟아부었다.

심한 경우, 기관총 반동으로 인해 손바닥 가죽이 쓸려나가기까지 했다.

“한 번의 재정비도 없이 계속 쏟아 부어대는 걸 보니 제대로 열 받은 모양이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편적인 전투 상황은 아니었다.

병력이 기계가 아닌 이상, 아무리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한다 해도 분명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한계라는 게 존재한다.

지금 중공군은 오직 진지 함락.

머릿속에 단 하나의 생각만 들어있는 듯했다.

“1시간. 1시간만 버티면 된다! 동이 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근접한 적 무리엔 수류탄을 던져라!”

수류탄 투척을 명령함과 동시에 수류탄 한 개를 집어 들어 멀리 던졌다.

작은 폭발과 함께 진지로 달려오던 중공군 3명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적이 수류탄의 유효살상범위에 들어올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어서··· 어서 동이 터야 한다.’

웅장한 포격 소리가 몇 시간 째 귀에 울려 퍼졌다.

소총이나 기관총, 수류탄이 폭발하며 내는 소음은 그저 작은 잡음에 불과했다.

목을 잠깐 축일 시간도 없었다.

진지 안에 있는 모두 삼킬 침조차 말라 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아군도 결사 항전의 의지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지만, 중공군의 피해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후방에 있는 5개의 포병대대에서 3만 발에 달하는 포탄이 진지 사방에 떨어졌다.

포탄의 장막을 넘어 진지로 달려오는 중공군은 그리 많은 수가 아니었고, 대부분은 탄의 장막에서 다진 고기로 형태가 변환됐다.

충분한 탄을 보유한 포병대는 이 전투를 조화롭게 지휘하는 마에스트로나 다름없었다.

“왔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리가 포성을 뚫고 들려왔다.

좌우 2개의 왕복 엔진과 프로펠러를 힘차게 돌리며 B-26 폭격기 편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날이 밝으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B-26 폭격기는 기수에 설치된 적외선 장비로 열을 발산하는 물체를 확인하고 식별할 수 있다.

하늘이 조금 밝아진 것만으로도 적과 아군을 충분히 구분해낼 수 있지.

“잘 가라. 이 지긋지긋한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아.”

모든 B-26 폭격기 동체 중앙이 열리고, 각 2톤에 달하는 폭탄이 중공군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건 단순한 항공폭격이 아니다.

목숨을 건 고된 전투 끝에 얻어낸 정의다.

하늘에서 정의가 빗발쳤다.

***

중공군 최고 사령부. 펑더화이 집무실.

펑더화이의 부관 양펑안이 벌써 5분째 문 앞에서 서성였다.

이 문을 여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차라리 튈까?

그 짧은 시간에 수십 번도 넘게 든 생각이다.

“부주임 동지, 거기서 뭐 하십니까?”

“아··· 아무 일도 아니네. 총관 동지께 보고드릴 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던 중이네.”

아, 튀기엔 늦어버렸다.

이 눈치 없는 개새끼만 아니었다면 진짜 튀었을지도 모른다.

-똑똑.

양펑안이 나무로 된 문을 두들겼다.

“총관 동지. 양펑안입니다.”

-오, 들어오게.

기다렸다는 듯 들려오는 펑더화이의 목소리와 나무문이 열리며 나는 끼익 소리가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 량싱추가 평지 한복판에 똬리를 틀고 있던 위군 부대는 섬멸했나?”

“위군이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긴 하였으나···”

“후퇴할 병력이 남았을 만큼 손속에 자비를 두다니. 량싱추도 이빨 빠진 호랑이군.”

38군이 미 공군의 항공폭격을 피하려 잠시 부대를 뒤로 물린 틈을 타 한국군은 후퇴했다.

분명 후퇴는 했는데···

그다음 해야 할 말이 도무지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사방에서 총공세를 펼쳐 포위 공격을 했을 테니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고··· 량싱추 이놈이 끝까지 나를 실망하게 하는군.”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런 착각을 할 줄이야.

펑더화이는 한국군이 후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언짢은 기분을 표출했다.

물은 이미 엎질러져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총관이 더 큰 착각을 하기 전에, 전투 결과를 상세히 보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관 동지··· 그 다름이 아니오라···”

한국군 염병할 놈들.

량싱추 이 씨부라질 놈.

순간 위군 놈들보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병신 같은 작전을 펼친 량싱추에게 더 짜증이 솟구쳤다.

“왜. 위군 진지를 함락하면서 량싱추 그 쓸모없는 놈이 병력을 생각보다 많이 잃기라도 했나?”

생각보다 많이?

그 생각보다 더. 더. 더. 아주 많이.

“그렇습니다. 38군에 속한 2개 사단이 전··· 전멸했다고 합니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와 전멸은 엄연히 다르다.

전멸.

2개 사단, 2만 명에 육박하는 병력이 시체가 됐다는 뜻이었다.

“이런 우라질 놈을 봤나!”

펑더화이가 책상 위에 올라와 있던 집기를 모두 땅바닥으로 쓸어 던져버렸다.

그것으로는 화가 풀리지 않는지, 허리춤에 있는 권총을 뽑아 들었다.

“총··· 총관 동지.”

진정하라는 말은 안 하는 게 상책이다.

성질 더러운 펑더화이가 아닌 그 누가 듣더라도 당장 권총을 뽑아 들었을 테니까.

“고작 그 3000명도 안 되는 병력 진지를 함락하는데 2만 명을 태워? 량싱추 그놈 당장 내 앞에 끌고 와. 빨리!”

퍽!

펑더화이가 던진 재떨이가 이마에 정통으로 부딪힌 뒤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만약 재떨이를 피했다면, 다음에 날아올 것은 분명 총알일 테니.

“그게··· 량싱추가 남은 38군 병력을 이끌고 위군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3만 병력으로도 위군 진지하나 제대로 못 돌파한 새끼가 무슨 재주로! 대체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당장 복귀시키고 내 앞으로 끌어다 놔. 당장!”

2개 사단을 잃었다는 사실도 그의 화를 돋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뇌리에 더 강하게 남은 건, 2만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보다 량싱추에 대한 분노 그 자체였다.

그러나 펑더화이를 대노(大怒)하게 할 보고 거리가 남아있었다.

“량싱추와 함께 위군을 추격하고 있는 동지가 있습니다.”

“동무, 그깟 건 다 필요 없어. 살아있지 않아도 좋으니 지금 당장 내 앞에 데려다 놓으라는 말 안 들려?”

“마오안잉 동지가 함께 갔습니다.”

“마오안잉? 마오안잉! 마오안잉 그놈이 왜 거기에···”

펑더화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목 뒷부분을 부여잡고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주석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

마오쩌둥은 펑더화이가 출병하기 직전, 자신의 맏아들 마오안잉을 데려가라는 요구를 해왔다.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전쟁터에 마오안잉을 데려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저처럼 뛰어난 인재가 지원병 1호가 된다면 필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오안잉이 그 자리에서 염병할 허세만 떨어대지 않았어도, 함께 출병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왜, 대체 왜 마오안잉 그놈이 거기에 있는 건가. 왜!”

혹시라도 사고가 터질 것에 대비해 마오안잉의 직책은 분명 통역장교였다.

적당히 참전했다는 위상만 심어주기 딱 좋은 직책이었다.

“저도 방금 전해 들었습니다만, 만류하는 장교들에게 호통을 치고는 38군으로 향했다 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중국 최고 지도자의 아들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허세 가득하던 놈이었다.

저 호랑이 같은 펑더화이를 노인네라고 불러대질 않나, 비밀 신분을 유지하기로 약속하고선 뒤에서 몰래 자신이 주석의 맏아들 마오안잉이라며 떠벌리고 다니질 않나.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기고만장하기 짝이 없던 놈이다.

심지어 그토록 자랑스레 떠벌리고 다니던 참전 경험도, 독소전쟁 말기에 이미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잠깐 경험했던 게 전부다.

참전 경험이라기보다 체험에 가까웠던 참전이랄까?

“량싱추 그놈이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것인가!”

뇌에 주름이 있는 정상적인 군 지휘관의 판단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오안잉이 그 어떤 허세와 억지를 부려 요구해도, 들어줄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문제는 하루 밤사이 2만의 병력을 잃은 량싱추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가에 대한 문제.

아마 량싱추가 마오안잉을 설득해 사령부에 데려오던, 오지 않던, 그는 펑더화이의 권총 앞에 놓였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마오쩌둥 동지 지시를 받는 것이···”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네. 절대.”

별것 없어 보이던 위군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지금 당장 서부 전선에 있는 군장들 전부를 소집하게. 폭격이든 뭐든 당장 오라고 해.”

더 화낼 힘도 없는지, 펑더화이의 목소리가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

청천강 방어선 이북 20KM 지점.

“여단장님. 장철부 중령의 기마대도 곧 후미에 따라붙을 것 같습니다.”

정찰을 떠났던 김동석 대위가 돌아오자마자 보고해왔다.

“다행이군. 추격대는 어디쯤이지?”

“가장 뒤에 있는 기마대를 기점으로 하면 7KM 정도입니다. 적이 산악지형을 이용해 추격할 경우, 간격이 더 짧아집니다.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든 진지를 함락시키겠다고 달려들던 중공군도, 하늘에서 빗발치는 정의를 마주하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전방 1대대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후퇴에 성공했다.

평지, 산악을 통틀어 기동력이 가장 뛰어난 기마대는 여단의 꼬리를 맡아 마지막으로 진지를 벗어났다.

“알겠네. 서두르지.”

모든 게 생각대로였다.

작은 먹이를 삼키기 위해 큰 물고기가 안간힘을 써댔지만, 결국 삼키지 못했다.

몸집이 한참이나 작은 먹이를 삼키지 못한 게 그토록 억울했는지, 냄새를 맡아 다시 쫓아오고 있었다.

몸집만 거대했지, 하는 짓은 밴댕이나 다름없었다.

“여단장님. 지금 막 들어온 첩보입니다.”

“그래. 말해보게.”

통신장교가 나에게 직접 보고를 해올 때면, 반사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매우 급하고 중요한 보고라는 뜻이 기본 바탕으로 깔려있었으니까.

“미 공군 정찰기가 남하하는 대규모 중공군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적게 잡아도 2개 군 이상이라고 합니다.”

“잘됐군.”

아무래도, 일이 예상대로 흘러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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