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예상된 일(2)
“정찰중대장 김동석 대위 좀 불러주게.”
“예! 알겠습니다.”
통신병이 명령을 듣자마자 무전기를 집어 들고 김동석 대위를 호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동석 대위가 옆으로 다가왔다.
“여단장님. 부르셨습니까?”
“자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네.”
“얼마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정찰중대장 김동석 중위가 가슴을 펴 보이며 말했다.
“여단 본대가 청천강에 도착하기 전, 아니 최대한 빨리 우리를 뒤따라오고 있는 중공군 몇 명을 포로로 잡아 올 수 있겠는가?”
중공군은 아군을 최대한 빨리 추격하기 위해 낮에는 산속에 숨어 소규모 부대로 찢어져 이동했기에, 특공여단에서 가장 날랜 병사들이 있는 정찰 중대에 그리 무리한 부탁은 아닐 것이다.
“포로 몇 놈은 지금 당장에라도 잡아 올 수 있습니다. 그간 정찰 활동을 하며 포로를 못 잡은 게 아니라 처치 곤란이 될까 하여··· 헌데 어쩐 일로 포로를 찾으시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직 확실하지 않아 말해줄 수가 없네. 자네가 포로를 잡아 오면 그때는 확실한 이유를 알게 되겠지.”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뭔가 찝찝한 구석이 있어서 말이지.
원형진지를 통해 중공군의 공세를 우주 방어한 뒤, 약이 제대로 오른 중공군이 특공여단을 추격하게 만드는 것까지는 아무런 하등의 찝찝함이 없다.
‘타이밍이 조금 어긋난단 말이야···’
찝찝함의 주요 원인은 미 정찰기가 발견했다는 대규모의 중공군이었다.
만약 가용 화력을 총동원한 대공세로 청천강 방어선을 뚫어내기 위해서라면?
진작에 출발했어야 하는 것은 물론, 그런 대규모 부대의 이동은 이미 미 정찰기 눈에 띄어 움직임이 사전에 모두 노출되었을 것이다.
전쟁경험이 많은 중공군 장교들이 일부러 병력을 축차 투입 시키는 작전을 구상했을 리도 없고, 마치 하기 싫은 짓을 어쩔 수 없이 하는 느낌이랄까?
‘잠깐. 작전계획대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설마.’
순간 번쩍이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펑더화이 같은 여우가 복수에 눈이 멀어 적을 추격하는 것을 절대 허락했을 리 없다.
지금 뒤꽁무니를 쫓아오고 있는 중공군 부대 지휘관은 펑더화이의 명령을 어기고 추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가정을 해보면, 그 뒤를 쫓는 중공군 대부대는 국군을 쫓는 것이 아니라 앞선 자신들의 동료를 쫓는 것이다.
청천강 방어선에 도착해 막강한 화력을 가진 미군, 연합군과 마주해 전면전이 일어나는 것은, 중공군이 그토록 피하려 발버둥 쳤던 일이다.
“이 새끼들이 숨기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군.”
그럼 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사령부에선 명령을 무시한 채 우리를 추격하고 있는 중공군 부대를 멈춰 세워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곧 펑더화이의 급소이자 중공군의 급소나 다름없다.
김동석 대위가 포로를 잡아 돌아오면, 정확한 가닥이 잡히겠지.
불과 몇 분 전에 떠난 김동석 대위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졌다.
상대방의 급소를 노리는 건 내 전문이거든.
***
38군 잔여 병력. 특공여단 후방 5KM 지점.
“공습··· 또 공습이다! 모두 흩어져라!”
마오안잉과 량싱추가 이끄는 38군 1개 사단 병력이 미 공군의 공중 폭격을 피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젠 대체 추격을 하는 건지, 당하고 있는 건지 구분도 제대로 되질 않았다.
“마오안잉 동지! 지금이라도 남은 병력을 살려 돌아가 잘못을 비는 것이 어떻겠소. 이대로 가다간 위군 놈들 꼬리를 잡아보기도 전에 전멸하겠소!”
“이런 멍청 대가리 같으니라고! 대체 머리가 달려있는데 생각은 왜 못하는 거지? 지금 이 상황에서 돌아간다 한들, 펑더화이 그 노인네가 당신을 살려둘 위인으로 보이나?”
마오안잉의 비아냥에 량싱추가 고개를 떨궜다.
흔히 자신이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을 때 하는 말이 있다.
[내가 뭐에 씌였었나 봐.]
량싱추는 한국군의 원형 진지를 함락시키기 위해 전 병력을 축차 없이 동시에 투입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진지를 함락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한국군의 원형진지는 금방이라도 함락될 듯, 함락되지 않은 채 밤새도록 량싱추와 그의 부관들 애간장을 녹여댔다.
2만에 가까운 병력이 작은 원형진지 하나에 모조리 곱게 갈려 나갔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새파랗게 어린 마오안잉에게 멍청 대가리라는 소리나 듣고 있는 건 물론, 사령부의 명령도 무시한 채 진지에 있던 한국군을 쫓고 있었다.
위군이 청천강에 도착하기 전 추격,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진격했다.
낮에는 이처럼 미 공군 폭격기들이 하늘에서 폭격을 퍼부어대고 있었고, 딱 하나 남은 무전기에선 추격을 멈추고 당장 돌아오라는 공허한 외침이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연신 흘러나왔다.
사실 남하하는 위군 꼬리를 잡는다 해도 그들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조차 들지 않았다.
“후··· 이젠 너무 늦어 버렸어.”
“뭐라는 거야. 멍청한 놈이!”
이젠,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마오안잉의 막말에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공습이 끝나면 서둘러 위군을 쫓는다!”
량싱추가 지휘관들을 향해 소리쳐 명령했다.
어차피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목숨을 부지하긴 어렵다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해 나갔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적과 싸우다 죽는 것이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용서할만한 방법이었다.
량싱추가 소리친 방향에 있던 중공군 지휘관 한 명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량싱추에게 달려왔다.
“군장 동지! 더 이상의 추격은 무립니다. 병사들의 피로도는 물론, 제대로 된 음식과 물조차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발! 제발··· 지금이라도 병사들을 살릴 수 있는 판단을 하셔야 합니다.”
호소라기보단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얼마나 절실했는지, 눈에선 눈물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탕!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일렁이던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차례 바람이 주변을 훑고 지나가자, 뜬 눈으로 생을 마감한 중공군 지휘관의 몸이 털썩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추격이 무리인지 아닌지를 왜 동무가 판단하는 거지? 건방지게. 동무들은 뭘 쳐다봐! 똑같은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나 해서 가져와.”
마오안잉이 허리춤에 달린 권총집에 권총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마오쩌둥의 전폭적인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자란 맏아들이기에 어느 정도의 허세나 다른 사람들을 깔보는 경향은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심하지는 않았다.
‘괴물이 되어 버렸군.’
량싱추가 마오안잉에게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켜냈다.
마오안잉은 공적에 눈이 멀어 버린 지 오래였다.
듣기 싫은 소리를 내뱉는 자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죽여버렸다.
마오쩌둥 주석의 맏아들이라는 인생 최대 업적은, 지금 상황에선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은 채 마오안잉을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탕!
공습이 잠시 잠잠해진 찰나, 또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중공이 자신들은 멸망한 청나라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며 채권 상환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연합군이 한국 청천강에서 북진을 멈춘 것을 두고 더 이상의 전쟁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흠···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단 말인가?”
“중공이 당장 5000억 달러라는 거금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의견도 있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안경을 두어 차례 올려 썼다.
중공은 미국이 요구한 청나라 채권 상환을 단칼에 거절했다.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내세워 한반도에 발을 들인 중공이 미국에 채권을 상환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논리를 스스로 깨부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재 한국 전선 상황은 어떤가. 상세히 말해주길 바라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생각할 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은 중공이 청나라 채권을 상환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얌전히 꼬리를 내리고 한반도에서 물러나는 것.
물론 마지막 화룡점정 끝에 중공이 거절이라는 먹물을 그림에 대차게 쏟아버려 싹 다 물거품이 되긴 했지만.
크고 작은 이해관계가 엮인 국제 정세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며 발악하는 것도 같았다.
“대통령님께서 가장 궁금해하실 부분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수차례에 걸친 독대 끝에 애치슨 국무장관은 트루먼 대통령이 궁금해하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된 후였다.
덕분에 입 아프게 말을 길게 할 필요도, 바쁜 시간을 뺏을 필요도 없었다.
“이강산 대령이 지휘하는 한국군 특공여단이 중공 38군을 상대로 구축한 진지를 지켜내는 데 성공한 뒤, 방어선을 향해 후퇴하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작전을 연달아 성공해 내는군.”
“그렇습니다. 심지어 평지에 둥근 모양의 원형 진지를 구축하고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을 격퇴해냈다고 합니다.”
“그렇군. 일단 계속하게.”
매우 흥미롭다는 듯, 트루먼 대통령이 연신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한국군 특공여단 뒤를 중공군 1개 사단이, 그 1개 사단 뒤를 중공군 2개 군이 뒤쫓는 형국인데 왜 이런 모양새가 되었는지는 아직 정보국에서 분석하는 중입니다. 분석이 끝나는 대로, 대통령님 책상에 보고서를 올려두라 해놓겠습니다.”
“수고했네. 그런데 말이야.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강산이라는 한국 장교 말일세.”
트루먼 대통령이 가볍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마치 혼자만 다른 시야로 이 전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성공하기 어려운 작전을 계속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물론, 국제 정세에도 매우 능한 군인이었다.
미국이 받아야 할 채권을 이강산 대령 입을 통해 알게 되었고, 모든 게 사실이었으니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저도 참 그 친구가 궁금합니다만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아서 ···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절대 평범하진 않은 군인이야. 아, 이걸 깜빡할 뻔했군. 청천강에서 중공군과 연합군 사이에 교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가?”
이강산 대령에 대한 궁금증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다 보니,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칠뻔했다.
“현 상황만 놓고 본다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중공군이 미 육군 포격 반경 안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릅니다.”
“곧 한바탕 쏟아지겠군.”
적법한 절차에 따라 빌린 돈을 갚으라는 요청에 배 째라 하고, 청천강에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는 연합군과 미군을 먼저 공격하기까지 한다?
명분은 차고 넘쳤다.
부족하다면, 얼마든지 더 강한 명분을 충분히 찾아낼 수도 있다.
트루먼 대통령이 드디어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밴 플리트 장군 지금 어디에 있나?”
해결사를 한 명 더 찾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