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예상된 일(3)
중공군 포로 몇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며 호언장담하며 떠난 김동석 대위와 정찰 중대가 다시 본대에 합류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단장님. 김동석 대위가 중공군 포로를 잡아 돌아왔습니다.”
벌써?
반나절 조금 넘는 시간 만에 임무를 완수해 돌아오다니, 역시 김동석 대위를 직접 보낸 보람이 있군.
“어서 김동석 대위와 포로들을 이리로 데려오게.”
자, 이제 확인할 시간이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동석 대위가 두 명의 중공군을 내 앞에 산채로 대령시켰다.
어떻게 잡아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신선하고 상처 하나 없는 A급이었다.
“정찰 중대원 중엔 중공 말을 할 수 있는 인원이 없어, 서둘러 중공 말을 할 수 있는 인원을 찾아보겠습니다.”
통역? 에이.
그런 건 굳이 필요 없다.
중공 말이 아니라 아프리카 원주민을 잡아 왔더라도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정찰 중대장 수고 많았네. 다만 통역은 필요 없어. 내가 직접 하지. 欢迎你来这里. (이곳에 온 걸 환영하네.)”
“什么呀?怎么办···(뭐야? 어떻게···)”
이질감 없이 유창한 발음에 포로로 끌려온 중공군 두 명이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들과 말이 통하시는 겁니까?”
“예전에 조금 배운 적이 있네. 자세한 건 심문을 먼저 한 뒤에 말해주겠네.”
한국어, 영어에 이어 중국어까지 3개 국어를 유창하게 내뱉는 나를 보며 김상옥 중령이 혀를 내둘렀다.
뭐, 언어학 박사 뺨치는 박식하신 나노봇이 있는데 이정도야 누워서 껌 먹기지.
[자동 통역 프로세스를 실행합니다.]
“내가 하는 몇 가지 질문에 아는 대로 대답만 잘 해주면 자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지를 뽑아 들개 먹이로 던져주고, 생니를 다 뽑아버리는 끔찍한 고문이나 고초를 겪는 일은 없을 것이네. 알겠나?”
어쩌면 지금 잡혀 온 중공군 포로 둘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공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잡혀 오지 않은 중공군들은 곧 청천강에서 햄버거에 들어가는 고기패티만큼이나 곱게 갈려 나갈 테니까.
말 그대로 내가 묻는 말에만 성실히 답한다면, 전시국제법상 최소한 포로로서의 대우는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성실히 답을 한다는 가정하에.’
사지를 뽑는다는 말이 좀 험악하게 들렸는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중공군 포로를 향해 인자하고 포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를 추격하면서부터 그대들이 있던 부대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점은 없었나?”
현시점 중공은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국가인 탓에 군대 내 계급이라는 개념을 딱히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웬만한 국가 군인들이 전부 사용하는 견장이나 계급장이 따로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이 포로들이 부대 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을 만한 고급 인력이면 더없이 좋겠지만, 행색과 어리숙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럴만한 인물들은 아니다.
당연히 그렇다 해서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자주 가는 음식점 음식 맛이 변하면 주인이나 주방장이 바뀌었는지를 먼저 떠올리는 것처럼, 생활하던 부대가 평소와 뭔가 달라진 것 정도는 정말 눈치가 없지 않은 이상 누구라도 느낄 수 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자네는 느낀 것 있나?”
역시 하나보단 둘이 낫지.
함께 잡혀 온 둘이 머리를 맞대고 집단지성을 통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는 모양이다.
그들이 쉽게 입을 열기까지는, 나의 인자한 인상과 친절한 응대가 한몫했을 것이다.
“저희 같은 하급 병사 나부랭이들은 행여 폭격이 떨어질까 하는 마음에 하늘만 쳐다보며 무작정 달리다 보니··· 아, 최근 삼대 기율과 팔항을 등한시하는 명령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안 그런가?”
삼대 기율과 팔항 주의는 국공 내전 때부터 마오쩌둥이 엄격하게 내세운 군 규율이었다.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이 하도 국민을 괴롭히고 썩을 대로 썩었기에, 그대로 답습하지 말자는 뭐 그런 의미였겠지.
“듣···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량싱추 군장 동지는 규율을 어겨도 된다는 명령을 내린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 며칠 사이 삼대 기율과 팔항은 동네 개나 지키는 것이라며 무시하고 어떻게든 적을 추격하라고 명령받았었습니다.”
[3대 기율 : 1. 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른다. 2. 군중의 바늘 하나, 실오라기 하나도 취하지 않는다. 3. 얻어낸 모든 것은 공동 분배한다.]
3번 기율을 제외하면 실상 너무나도 당연히 행해야 하는 행동을 거창하게 늘어놓은 기율이다.
팔항에 있는 포로 학대금지, 부녀자 희롱 금지, 욕설이나 폭행금지와 같은 조항 또한 마찬가지고.
“음···또 다른 건 없나?”
한 마디로 중공군 부대가 그냥 개판 5분 전이 됐다는 뜻 외에 별다른 소득은 없는 정보였다.
“이런 것도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골똘히 무언가 생각하던 포로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래. 도움이 안 되어도 괜찮으니 편하게 말해.”
느낌이 온다.
앞에 떠든 건 흘려보낼 잡설이고, 이게 진짜 내 궁금증을 해결해줄 열쇠인 것 같은 느낌이.
“어제 항공 폭격을 피해 숨어있던 중, 우연히 근처에서 울리는 두 발의 총성을 들었습니다. 딱 두 번으로 끝난 것으로 보아 교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폭격이 끝난 뒤에 군장 동지가 처음 보는 젊은 동무와 옥신각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계속해 보게.”
“이게 이상하다고 느꼈던 게··· 발걸음도 젊은 동무가 군장 동지보다 앞서 걷는 것이, 마치 군장 동지를 하대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좋아. 가히 훌륭한 대답이었어.”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군장이나 되는 고급 장교를 하대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하나뿐이다.
“정찰 중대장, 이들을 데려가 물과 음식을 주게.”
“예! 여단장님.”
내 생각이 맞았다.
지금 특공여단 꼬리를 잡기 위해 안간힘 쓰고 있는 중공군 1개 사단을 지휘하는 건 군장 량싱추가 아니라 마오안잉일 것이다.
무리하게 추격대를 편성해 추격해 오는 것도, 그 뒤를 중공군 2개 군단이 뒤늦게 쫓는 것도.
마오안잉이 이 모든 것의 발단이라면 그간 찝찝했던 일들의 앞뒤가 전부 맞아떨어진다.
아니? 마오안잉만이 할 수 있는 짓이다.
‘생각보다 더 정신 나간 새끼였네. 이거.’
어디에선가 대가리를 박고 폭격에 덜덜 떨고 있을 김일성을 잡는 것보다, 더 큰 대어가 코앞에 있었다.
“여단장님! 여단장님!”
“그래.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이제 이쯤 되니까 오히려 기대된다.
통신장교가 안 그래도 이 흥미로운 상황에 흥미를 더해줄 어떤 보고를 들고 왔는지.
“도쿄 극동 사령부에서 전달해온 내용입니다. 다른 어떤 내용도 없이, 여단장님께 중공이 미국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을 전달하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풉. 알겠네. 잘 전달받았다고 전하게.”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당나라 군대의 원조답게 자기 맏아들이 내 뒤꽁무니나 쫓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가 보군.’
호구들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으로도 모자라 제발 무덤에 눕게 해달라며 정성껏 떼를 쓴다.
성의를 너무 무시하는 것도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아무래도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조금만.
***
청천강 방어선.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 임시 막사.
워커 중장이 다리를 꼰 편안한 자세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청천강 방어선이 완벽하게 구축된 뒤로는 그 흔한 야생동물 한 마리 다가오는 법이 없었다.
웬만한 국가 하나쯤은 가뿐히 지워버릴 수 있는 화력을 가진 연합군 병력이 청천강에 있음에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굳이 좋게 표현하자면 여유로웠고, 단점은 따분하고, 심심했다.
“사령관님. 워싱턴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래. 이쯤하고 집으로 돌아오라던가? 추워지기 전에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워커 사령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부관이 전해준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사령관을 교체하는 것도 아니고, 밴 플리트 장군을 이곳으로 보내겠다고? 이게 정말 워싱턴에서 내려온 지시가 맞나?”
아무리 그래도 한반도는 휴양지가 아니라 전쟁터다.
사령관급 지휘관을 추가로 보내온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밴 플리트 장군뿐만 아니라 본토에서 지원 병력과 군수물자까지 추가로 보내온다고 합니다.”
지시 사항이 적힌 보고서 맨 뒷장은 워커 중장의 따분함을 단번에 날려버리기에 더없이 충분했다.
[미군을 향해 중공군 총알이 한 발이라도 날아온다면, 즉각 보복할 것.]
청천강 방어선을 향해 오고 있는 한국군 특공여단은 이강산 대령이 어련히 알아서 방어선까지 이끌어 올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사히 청천강을 넘을 수 있도록 엄호하기 위해 공군과 포병대의 일거리가 조금 늘어날 뿐, 별다른 일은 없겠지 싶었다.
보복이라는 단어는 아주 흔한 단어다.
그 흔한 단어가 워싱턴에 있는 트루먼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이상, 다른 보복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이것들 외에 다른 지시 사항은 없나?”
“예. 이게 전부입니다. 조만간 세부 지시 사항이 따로 내려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알겠네. 나가서 할 일 하게.”
부관이 경례한 뒤 서둘러 막사 밖으로 나갔다.
연합군이 청천강 방어선에서 북진을 멈춘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빠른 북진을 했기 때문에 정비가 필요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중공과 소련.
두 나라와의 마찰을 미국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명분이길래 워싱턴에서 이렇게까지···”
미국이 전쟁에서 명분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건 워커 중장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딱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보자면 북한이 한국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그 전쟁이 미국을 포함해 수많은 나라가 참전할 만큼 덩치가 커졌다.
덩치가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청천강 이북의 작전은 한국군만 전담하도록 했던 것 아닌가?
이건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뜻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령관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머리가 아프려고 할 때쯤, 부관이 또 찾아왔다.
통신장교와 부관이 급히 찾을 때마다 가슴이 움찔거리는 건, 만국 공통사항이었다.
“들어오지 말라고 하면 안 들어 올 건가? 이번엔 또 어딘가. 또 워싱턴? 아니면 도쿄?”
셋 다 틀렸다는 듯 부관이 보고서 대신 말을 전했다.
“이번엔 한국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워커 중장은 오늘따라 자신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나같이 쉽지 않은 문제 거리를 들고서.
“설마 이강산 대령인가?”
“예. 이번엔 맞추셨습니다.”
“뭐?”
워커 중장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이고 머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