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커져가는 호기심(1)
사방에서 쏟아진 특공여단 보병과 마주한 중공군들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조금의 저항이나 도망가려는 자도 없었다.
의지가 사라져버린 사람처럼.
어쩌면 오히려 잘됐다는 표정을 짓는 중공군이 더 많아 보일 정도였다.
“저기 보이는 저 둘부터 치료해주게. 생명에 지장이 없게 치료를 마친 뒤에는 나에게 직접 데려오고, 반드시 살려야 하네.”
“예!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려놓겠습니다.”
1대대장 김상옥 중령은 아무런 질문 없이 직접 마오안잉과 량싱추를 포박한 뒤 치료할 수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흔한 어종의 물고기더라도 죽은 물고기와 살아있는 물고기의 가격은 차원이 다르다.
하물며 저들은 산 채로 잡기 매우 어려운 물고기다.
반드시 살려야만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
‘몸값을 올려놓고 가장 비쌀 때 팔아야겠어.’
지금 마오안잉을 생포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하면, 기껏해야 두 가지 정도의 이득을 취할 수 있다.
첫째는 중공이 마오쩌둥 주석의 맏아들까지 참전할 정도로 한반도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행위를 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고, 둘째는 마오쩌둥이 청나라 채권 상환과 마오안잉을 맞바꾸는 결정을 내리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자는 별로 맛이 없는데.”
나 개인적으로 미국의 엄청난 신임과 우호를 얻을 수 있을진 몰라도 우리 나라를 위한다면 글쎄.
청나라 채권을 놓고 협상하는 것은 오로지 미국과 중공일 것이고, 전쟁터는 한반도지만 대한민국은 자연스레 뒷전으로 빠지게 된다.
그 과정 중에 미국과 중공 사이에서 슬슬 전쟁을 끝내자는 물밑 대화가 오갈지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 될 테고.
이건 어디까지나 마오안잉이 살아있을 때 이야기고, 그가 죽어버리면 완전 다른 장르로 바뀐다.
마오안잉의 죽음은 조국의 대의를 이루기 위해 희생한 숭고한 선교자의 죽음으로 탈바꿈될 것이고, 마오쩌둥은 맏아들을 잃어 슬프긴 하겠지만 자신의 불안한 정치적 기반을 다질 좋은 원동력을 얻게 된다.
설마 부모 된 도리를 저버리고 자식의 죽음을 이용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사책을 한 권만 던져줘도 정신개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쯤 모스크바에서 잔 대가리를 굴리고 있을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가 독일군에 포로로 붙잡혔을 때 독일군은 야코프를 바우리스 원수와 포로 교환하길 원했지만, 스탈린은 단칼에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절대 원수 한 명과 병사 한 명을 교환하지 않는다는 개같이 멋진 소리를 지껄여 가면서.’
결국, 야코프는 스탈린의 아들로 태어나 전기 철조망에 전기 통구이가 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재자들이 그간 해왔던 행태를 돌아보면 리더로서 모범을 보인다는 보기 좋은 껍데기 아래, 가족과 측근을 살육해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기반과 권력에 대한 욕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마오안잉이라는 카드는 매우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여단장님. 지금 막 치료소에서 오는 길입니다.”
김상옥 중령이 다른 이를 통하지 않고 직접 보고를 해왔다.
굳이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 포로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는 듯했다.
눈치 빠르긴.
“그래. 뭐라던가?”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긴 했지만, 목숨줄에 지장은 없을 거랍니다. 정신이 좀 나간 것 같긴 한데··· 그 점은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절대 자결하지 못하게 조치해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아.
김상옥 중령다운 아주 깔끔한 일 처리다.
“수고 많았네. 지난번 내게 들어온 달걀이 남아 있지 않았나?”
지난번 진지 근처에 살던 노부부가 고맙다며 달걀 10개를 선물로 전해온 적이 있었다.
이 와중에 안 깨지고 멀쩡히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마 지휘 막사에 그대로 있을 겁니다.”
지금의 달걀은 구하기 힘든 귀한 식재료로 통한다.
다행히 귀한 명성 덕에 누군가 잘 챙겨놓은 모양이다.
그럼 어디 선심 좀 써볼까?
“그놈에게 달걀로 죽이라도 해서 먹이고, 남은 건 자네가 알아서 하게. 사진으로 기록 좀 남겨놓고. 달걀을 아주 좋아할 거거든.”
나는 거래처와 물건값 흥정을 좀 해야 하니까.
***
적유령 산맥,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 집무실.
“총관 동지··· 39군과 40군마저 청천강에서 대패했습니다. 그 사실을 더 숨기려다 아군 전체가 위험해질지 모릅니다. 동지!”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부시고, 던져가며 화를 표출하는 시점마저 지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은 부사령관 덩화였다.
펑더화이의 부관 양펑안은 덩화 옆에서 덜덜 떨며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정녕···그 많은 피를 흘렸음에도 마오안잉의 시신 조차 찾지 못한 것인가?”
가망이 없다는 듯, 덩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39 군장 보고에 따르면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포탄이 빗발치듯 떨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부상병은 챙기지도 못한 채 겨우 부대를 추슬러 빠져나왔을 뿐··· 그런 상황에 마오안잉 동지가 있었다 한들, 시신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펑더화이는 전투에서 대패한 39군, 40군을 나무랄 수 없었다.
마오안잉을 찾아오라는 무리한 명령이 없었다면, 압도적 화력을 자랑하는 연합군 방어선에 병력을 꼬라박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총관 동지. 우리가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벗어났습니다. 애초에 마오안잉 동지의 돌발행동은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에 보고한 뒤, 명령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오안잉이 마오쩌둥의 아들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한사코 거절했건만···”
이처럼 큰 악재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악재가 겹치고 겹쳐 큰 덩어리가 되는 법이다.
마오쩌둥이 중공군을 출병시키지 않았다면, 거기에 아들을 데려가라 하지 않았다면, 마오안잉이 멍청하게 나대지 않았다면···
수많은 악재 중 단 하나만 피해냈어도 마오안잉은 무사했을 것이 분명했다.
“양펑안.”
“예. 동지.”
펑더화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양펑안을 불러냈다.
“저우언라이 동지에게 사실대로 보고하고 답을 받아 와.”
“알겠습니다.”
이성을 찾은 펑더화이가 꼬일 대로 꼬여버린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할 말이 남았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덩화.”
“예.”
“김일성 그놈 지금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아봐. 죽이진 말고.”
처음 실타래를 엉키게 만든 장본인을 찾았다.
그의 말에 덩화가 조용히 고개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
워싱턴 D.C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존경하는 미합중국 시민 여러분.]
트루먼 대통령이 담화문을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아직 수많은 남편과 아들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이들의 노고에 미국의 어제는 평온했을 것이고, 내일도 평온할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 전. 저는 반갑지 않은 보고를 전해 받았습니다.]
[중공에서 내려온 수만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우리 남편과 아들이 지키고 있는 방어선을 공격했다는 보고였습니다.
다행히 적의 공격에 우리 미국은 압도적인 승리를 쟁취했습니다만, 미합중국의 대통령인 저로서는 절대 가만히 백악관에 앉아 좌시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의 단단한 목소리엔 냉철하게 자제된 분노가 스며있었다.
언성을 높이거나 흥분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어떤 심정으로 담화문을 읽고 있는지 느껴졌다.
방송이었음에도,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치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표현하는 타고난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는 그 악랄한 행위를 심판하고, 모두를 지키기 위해 추가 파병을 결심했습니다. 이는 절대 그 어떤 선전포고도 아닙니다.
먼 타지에 있는 남편과 아들, 미국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 뿐입니다.]
마이크가 꺼지지 않았음에도 정적이 흘렀다.
3초 정도 지나자 트루먼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트루먼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송 부스 밖에 있던 비서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대통령님.”
“어때. 괜찮았나?”
방송이 끝난 지 불과 몇 초 만에 분노가 스민 목소리는 사라지고, 원래 목소리 그대로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가히 최고였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순 없겠지만, 당분간 지지율을 지켜내는 데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없도록 수시로 확인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공군을 통해 항공지원을 하긴 했다만, 연합군의 육군 병력은 명령대로 방어선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잠자고 있던 호랑이 수염을 뽑은 건, 중공이었다.
청나라 채권을 상환하지 않겠다는 건 둘째 치고, 연합군이 청천강을 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음에도 공격을 당한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밴 플리트 장군이 준비를 모두 마쳤답니다. 지시하시면, 지금이라도 출발시킬 수 있습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트루먼 대통령은 신의 가호를 찾는 일이 부쩍 늘었다.
북한군을 괴멸시키고 이전 한국의 영토를 회복한 이후, 최대한 빨리 발을 빼려 노력했다.
그런데 웬걸.
발을 빼려고 힘을 주면 더욱 깊게 빠지는 늪인 듯, 좀처럼 발이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번에 알아보라 한 건 알아봤나?”
“아, 그 한국군 장교. 이름이 이··· 이강···”
“이강산 대령.”
기다리다 못한 트루먼 대통령이 먼저 이름을 말했다.
비서실장은 제대로 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만 보더라도, 트루먼 대통령이 얼마나 그를 신경 쓰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중요한 일정이 하도 몰려있는지라···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가 뒤를 향해 손짓하자, 뒤에서 대기하던 비서실 직원이 검은색 가죽으로 된 서류가방을 들고 달려왔다.
비서실장이 서류가방을 건네받자마자, 수백 장의 서류 사이에서 한 서류를 찾아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대통령님. 이강산 대령에 대한 20살 이후의 행적만 있을 뿐,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뭐?”
아무런 정보가 없다는 말에 트루먼 대통령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네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어떻게 20살 이전기록이 아무것도 없을 수 있지? 부모, 형제. 하다못해 친척이라도 있을 것 아닌가.”
트루먼 대통령의 질문에 비서실장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좀 제대로 알아봐.”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이강산 대령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