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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93화 (93/149)

93화. 마지막 관용

“고작 나 한 명 데려가면서 뭐 이렇게 많이 데리고 왔나. 내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막사 밖으로 나가니 낯선 지프 두 대가 보였다.

내가 나온 걸 확인하고는 누군가 지프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왔다.

“헌병사령부 소속 김정주 중령입니다. 여단장님을 잠시나마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서울로 나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김정주 중령의 상황과 입에서 나오는 영광이라는 단어는 썩 어울리진 않았다.

“왜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지?”

밖에선 나를 찾는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1대대장 김상옥 중령의 호들갑이 아니었다면 지프가 도착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 게 분명했다.

“헌병사령부 내에서도 여단장님의 활약상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 여단장님을 모셔갈 수밖에 없는 점,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팬클럽 회원 수가 꽤 늘어난 모양이다.

양해야 당연하지.

까라면 까는 게 군인이니까.

나도 모르게 김정주 중령과 전생에 기구한 악연으로 엮이지 않았다면, 그가 나를 곤란하게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죄지은 건 아니니 손을 묶어 갈 필요는 없을 테고, 지금 당장 출발하지.”

“아···예.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난처한 표정을 짓는 김정주 중령과 함께 둘 중 가까이에 있는 지프에 올라탔다.

“좀 난처한가?”

김정주 중령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걸 보면,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를 데려가야 하는 상황이 그리 편하진 않은 모양이다.

“간만에 서울 구경이나 한다고 생각하겠네. 자, 출발!”

어서 가보자고.

진짜 난처해야 할 인간들은 따로 있거든.

***

오랜만에 온 서울.

“여단장님. 불편한 건 없으셨습니까?”

김정주 중령은 오는 내내 불편한 것은 없냐며 물어왔다.

헌병대 지프를 탄 건지, 비싼 모범택시를 탄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덕분에 편하게 왔어.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은 못 하겠군. 자네가 헌병대에 있는 동안은 말이야.”

“다음에 또 마주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단장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허.

헌병대에 있는 동안은 안 된다니까.

그에게 마지막 인사로 오른손을 열심히 흔들어 줬다.

다시 온 서울은 여전했다.

‘전보다 많이 활기차졌군.’

정확히 말하려면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폭격으로 인해 무너진 건물이 그 짧은 새 다시 세워졌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기적은 아니지만,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표정이 전과는 달리 평온해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현재 전선이 북쪽으로 꽤 많이 올라가 형성된 탓일 것이다.

시민들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한편으론 뿌듯했지만, 국회가 이 반쪽짜리도 안되는 가짜 평화에 나를 불러들인 건 다시 생각해도 달갑지 않았다.

전쟁은 아직 끝날 기미도, 끝난 적도 없다.

“여기 보세요!”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옆을 돌아보자, 곧바로 카메라 셔터음이 들려왔다.

아직 한국을 떠나지 않고 있는 UP 통신 잭 제임스 기자였다.

잭 제임스 기자 주위에 그가 데려온 기자가 꽤 많이 보였다.

그들의 카메라 역시 잭 제임스 기자 뒤를 이어 열심히 셔터음을 만들어냈다.

‘시간 맞춰 잘 왔군.’

저 안에 계신 분들이 어떻게 이를 갈고 준비하셨을진 모르겠지만, 나 역시 그에 걸맞을 정도의 연출을 준비했다.

잭 제임스 기자와 인사는 나중에.

판이 모두 끝난 다음에 해야 할 것 같다.

***

부민관 회의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섬과 동시에 웅성거림이 몇 배는 커지는 것을 보니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주위를 쓱 둘러 표정을 살피니, 누가 나를 물어뜯을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광복군 출신 국군 총참모장에게도 송곳처럼 날카로운 비난을 던진 자들이다.

분명 눈에 거슬려 왔던 육군 여단장쯤은 쉬운 먹잇감이라 생각하는 친일파 의원도 있을 것이다.

“자자, 이강산 대령이 도착한 관계로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상했듯 신익희 국회의장이 회의의 포문을 열었다.

“이강산 대령. 미 정부에서 이 대령의 신원확인 요청을 받아 열린 회의임을 알립니다. 전방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당사자 말고는 그 누구도 답이 불가능해 이곳까지 출석하게 한 점, 인지하기 바랍니다.”

아예.

그러시겠죠. 암요.

“대체 어떻게 20살 이전의 행적이 전무 할 수 있는지 말해보시오. 말을 못 하진 않겠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의원 중 한 명이 입으로 화살을 날렸다.

나는 이 화살을 피해야 한다.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지 않은 이상, 어찌 행적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부분은 제 개인적인···”

그들이 더욱더 열광할 수 있도록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개인적? 지금 장난하자고 이 많은 의원이 모인 줄 아시오?”

“옳소! 꾸밈대로 사실 없이 말해야 할 것이오!”

“얼른 답변이나 하세요! 이강산 대령!”

도대체 이런 작자들은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는 법이 없을까 궁금할 따름이다.

“대답하기에 앞서 의원님들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대체 저의 20살 이전 신원과 행적이 알려진들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활활 타올라라.

다 타기 전엔 끌 수도 없게.

“오호. 그리 대답을 피하는 걸 보니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모양이오? 혹시 압니까. 이강산 대령은 국군 창설 이래 그 누구보다 빠른 특진을 거듭해 여단장이라는 직책을 얻었습니다. 과연 그게 순전히 본인의 능력일지, 아니면 다른 외부의 개입이 있었을지 모르는 것 아니오?”

고작 생각했다는 게 북한이나 중공, 소련과 관련되었다는 이야길 하고 싶은가 본데.

잘못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수준 낮은 비아냥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오히려 역사에 남을 만큼 재밌는 시트콤을 찍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었다.

“박 의원! 이 대령의 답변을 듣기도 전에 스스로 듣고 싶은 답을 정해놓아선 안 됩니다.”

같은 의원이라는 것이 창피했는지, 말리는 의원도 있었다.

아무리 엉망이더라도,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박 의원 같진 않을 것이다.

비정상을 말리는 정상에게 왜 불똥이 튀어야만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김 의원이야말로 말 똑바로 하세요! 그럴 수도 있다는 가정일 뿐 누가 그렇답니까?”

“조용! 조용! 조용히들 하세요!”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신익희 국회의장이 양쪽 모두를 중재시켰다.

‘준비해.’

[준비 완료.]

나노봇 일부가 눈물샘 부근으로 이동해 눈물샘을 슬쩍 건드렸다.

이내 눈이 물기를 잔뜩 머금었다.

“그만··· 제가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제 행적을 찾을 수가 없는지.”

자, 조용.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가 부민관에서 상영될 차례였다.

“저는 백사 이항복의 후손입니다.”

단 한마디 했을 뿐인데, 그 시끄럽던 회의장에 정적이 흘렀다.

이항복의 후손이라 하면, 임진왜란 공신이자 가문 대대로 정승을 배출한 조선 최고 명문가의 후손이란 뜻이었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통틀어 최고 벼슬 영의정을 9명 배출했으며, 천 년 동안 양반인 가문.

일제 강점 당시 조선의 양반들이 일본에 붙어 ‘조선 귀족’으로 호의호식할 때, 6형제 모두가 합심해 6천 석이 넘는 막대한 토지를 모두 처분하고 오로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독립운동 가문 말이다.

“그···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가 부통령님의 조카란 말인가?”

제일 시끄럽던 한 놈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저는 6형제 중 막내 이호영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나자마자 보모, 누이 한 명과 함께 다시 대한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불효자식이었습니다.”

“이강산 대령. 자네 말이 전부 사실인가? 만약 거짓이라면 매우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네.”

신익희 국회의장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엄포를 놨다.

“제가 어찌 이 신성한 국회에서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워낙 어렸을 때부터 누이에게 들어왔던 말이 있습니다. 제 어머니께선 한 끼도 먹지 못할 때가 많으니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라고 힘들어하시면서도 어린 저와 누이를 살리기 위해 일제 치하에 있는 대한으로 저희를 몰래 보내는 아픔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6형제들은 전 재산으로 신흥무관학교라는 독립의 씨앗을 뿌렸다.

해마다 수백 명의 학비와 숙식을 무료로 지원한 지 10여 년.

6형제는 하루에 한 끼도 먹지 못할 정도로 빈손이 된 채 뿔뿔이 흩어졌다.

그 중 살아서 광복을 맞이한 건 다섯째 초대 부통령 이시영뿐이었다.

이시영 부통령이 아직 살아있지만, 그가 나와 마주하더라도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도록 준비된 시나리오다.

“그뿐 인줄 아십니까!”

눈에 힘을 주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머니가 보낸 보모 한 명이 저와 어여쁜 누이를 키웠습니다. 제대로 된 집도 없는 길거리에서 말입니다. 누이와 저는 오직 서로만을 의지하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울음 섞인 내 목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모두의 피맺힌 노력이 모여 광복이라는 꽃이 피기 직전, 일본 헌병 눈에 띄어 어딘가로 끌려가고는··· 다시는 누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평생을 의지하고 지내던 그 어여쁜 누이를! 다신 볼 수 없었단 말입니다.”

이건 단순히 나에게 닥친 위기를 넘기고자 지어낸 시나리오가 아니다.

그 시절 수많은 부모 자식이, 형제자매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혹은 그 어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생이별해야 했다.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억울한 이들을 대신해 던지는 메시지였다.

미래에 이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사는지 알고 있는 나만이 던질 수 있는 메시지다.

“자. 이제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얻으셨습니까? 의장님. 그럼 감히 제가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처음엔 이들을 도려내기 위한 연기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나노봇을 통해 제어하려 해봐도, 좀처럼 멈춰지지 않았다.

“해보게.”

“어린 시절 내내 가슴속 깊이 칼을 갈았습니다. 조금도 쉴새 없이 자르고! 쓸고! 쪼아가며 저 또한 갈았습니다. 나라는 저와 누이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런 저는 북한군과 싸우고 중공군과 싸워가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대한민국 법전에 제게 물을만한 죄가 있습니까?”

절차탁마(切磋琢磨)

대전차 무기가 없어 북한군 탱크에 끝없이 밀리던 와중 자신의 몸을 갈아 넣어 막아낸 이름 모를 국군들이 떠올랐다.

이런 군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자들에 대한 화가 피어올랐다.

이제 마지막.

“군인은 국가를 지킵니다. 국가는 그 군인을 지켜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마지막 말을 끝으로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에서 저들의 사지를 비틀지 않은 것, 이게 내 마지막 관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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