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애국회(1)
한껏 달아오른 부민관을 뒤로 한 채 회의장 밖으로 나왔다.
의원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20살 이전의 행적과 신원이 드러나자, 의원들이 나를 보는 눈은 전과 비할 것이 아니었다.
나와 말이라도 한번 섞어보겠다는 의원들이 뒤를 졸졸 따랐다.
등 뒤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강산 대령. 자네와 이야기 하고 싶은데.”
아직 명령투로 말하는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된 것 같은 의원들과.
“이보게. 우리 당엔 자네 같은 인재가 꼭 필요하네. 이 전쟁이 끝난 뒤에 연락이라도 한 번 줄 순 없겠는가?”
상황파악은 제대로 했지만 나를 선전용으로 이용하려는 의원들.
“나라는 내팽개쳐두고 이리저리 강자 쪽에 붙어 물고 빨던 놈들이 목을 부여잡는 걸 보니 속이 시원하고만! 응원하네. 이 대령.”
제2대 국회는 210석 중 126석을 무소속이 차지했을 만큼 초강세를 보인 선거였다.
무소속에 속한 몇몇 의원들은 나를 향한 찬사와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왔다.
“저도 의원님들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시다시피 전시 상황이라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없는 점.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국군 장교일 뿐, 특출나거나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어찌 보면 겸손도 승자의 미덕이다.
뒤를 돌아 쫓아 오는 의원들을 향해 최대한 예를 갖춰 말했다.
‘그만 좀 따라와. 선전용 간판 될 생각 없으니까.’
맘 같아선 툭 내뱉고 싶다만.
의원들을 뒤로한 채 부민관 밖으로 나왔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은 것 같은데, 이것저것 하다 보니 벌써 2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어···뭐야.”
처음보다 몇 배는 많은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쫓아오던 의원 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중공군이 적을 포위하는 속도보다 기자들이 나를 둘러싸 포위하는 속도가 몇 배는 빨랐다.
모두를 직접 경험해본 내가 볼 땐, 분명 확실하다.
“여러분! 다들 밀지 마시고 질서를 지키세요. 질서! 에잇, 거기 밀지 말라니까!”
부민관 앞을 지키고 있던 헌병들이 달려 나와 인파를 통제했다.
인파 사이에 끼어 낑낑대는 잭 제임스 기자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고작 다섯 명도 안 되는 헌병이 인파를 통제하기란 역부족이었다.
“자!”
짧고 굵은 소리와 함께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순간 인파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섰다.
“이렇게 무질서하면 누군가 넘어져 다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과 인터뷰를 진행할 수 없겠죠? 서로 조금씩만 양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 한마디에 온몸으로 인파를 막아내던 헌병들이 무안할 정도로 주변이 침착하게 변했다.
인파가 잠잠해지자 헌병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두어 발 뒤로 물러났다.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여러분과 그리 오래 있진 못하겠지만, 최대한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기자들 앞에서 자세한 이야기는 못 하겠지만, 내 활약상쯤은 알릴 필요가 있었다.
“UP 통신 잭 제임스 기자입니다!”
이래서 사람을 생김새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잭 제임스 기자는 보기엔 느릿느릿할 것 같지만 기자들과의 눈치싸움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전선 최전방에 있는 지휘관을 국회까지 소환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혹 과거 이강산 대령님의 담화문 발표와도 관련이 있습니까?”
“저에겐 기밀과도 같은 개인사라···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오해는 모두 잘 풀렸습니다.”
“서울 일보 이정욱 기잡니다! 방금 오해라고 하셨는데 어떤 오해였는지, 오해한 주체가 누군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국회까지 출석할 정도라면 작은 오해는 아니었을 텐데요.”
정곡을 찌르는 예리한 질문이 연이어 들어왔다.
“음··· 죄송하지만 아까 말했듯 개인사인지라 어떤 오해였는지는 밝히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해가 잘 풀린 이상,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조금이라도 오해의 소지를 만든 제 잘못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알맹이 없는 답변에 기자들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극적이고 화끈한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던 눈치였다.
“여러분들의 의문을 모두 해소해 드리긴 어려울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 어떤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단번에 기자들을 등졌다.
“잠깐! 잠깐!”
내가 짠 계획은 부민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대중을 열광시키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과거와 현재가 대비될수록, 그 대비가 극적일수록 사람들은 뜨겁게 열광한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막 들어온 익명의 제보에 따르면 한미 양국이 전쟁 전 이강산 대령의 신원 파악을 위해 국회로 불러들였다는데, 사실입니까!”
잭 제임스 기자였다.
그의 외침에 인파가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신원 파악? 무슨 신원 파악?
-설마 친일행적··· 뭐 그런 건가?
-에이. 한국 정부는 몰라도 미국이 친일행적을 왜 궁금해하겠어.
“그리고 또!”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강산 대령이 대대로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백사 이항복 가문의 후손이라는 말이 사실입니까! 대답해 주시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국 기자들은 기암을 금치 못했고, 외국 기자들은 대체 이항복이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번에 술렁이는 건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구경하던 인파와 주변을 지나던 모든 이가 가던 길을 멈추고 제자리에 멈춰섰다.
이항복 가문의 헌신과 비통함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이름만으로도 지나가던 사람을 제자리에 멈춰 세우기 충분했다.
후손이 나타난 것으로도 모자라, 가뜩이나 그 주인공이 미국의 관심과 더불어 전쟁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공적을 쌓고 있는 인물이다?
한반도 한정, 무적의 갑옷을 온몸에 두른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 갑옷을 입은 채 가던 길을 멈춰 섰다.
“비할 수 없이 부족하겠으나, 선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중 사이에선 아무런 꾸밈도 없이 덤덤한 이 한마디에 주저앉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었다.
주저앉은 뒤엔 두 손을 모아 하늘에 빌다가도, 나를 향해 박수와 찬사를 보내기를 반복했다.
아직은 한참 멀었지만, 영웅이 되기 위한 발판 하나하나를 단단히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이봐 잭. 대체 어떻게 구한 정보원이야? 그사이에 접선은 언제 했고. 지난번 알고 싶다던 정보 다 넘겨 줄 테니 나도 좀 알자. 응? 잭?”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달라붙는 동료들 덕에 잭 제임스 기자 어깨가 하늘에 닿을 기세였다.
“알만한 사람이 왜 그래. 정보원에 대한 정보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 못 해주는 거 알잖아.”
잭 제임스 기자가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료들을 떨쳐냈다.
시대가 발전해 말 한마디가 미국까지 전달 되는데 금방이라 해도, 회의를 마친 의원들이 부민관 밖으로 나오기도 전이었다.
전 세계를 다 뒤져도 없을 훌륭한 정보원.
누구긴 누구야.
나지.
멀리서 눈이 마주친 잭 제임스 기자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
대한민국의 그늘 어딘가.
빛이 밝아오면 그 빛으로 인해 어딘가 어두운 그늘이 생기는 건 세상 이치다.
새로운 빛이 탄생함에 따라, 설사 그 빛이 자신들의 그늘을 전부 지워버리진 않을지 노심초사하는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입만 다물고 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오. 다들 정말 이대로 보고만 있을 겁니까?”
이종형 의원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일제 밀정 노릇을 하다 독립운동을 했고, 독립운동을 통해 알게 된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한 악질 중 악질.
지금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신분 세탁을 시도한 결과,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이라는 명판을 얻었으니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늘 저 이강산이라는 놈을 보고도 아무 말이 안 나오는 것이오? 괜히 국회에 불러와 잠자코 있던 호랑이 새끼를 호랑이로 단번에 키운 꼴 아니오!”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없질 않습니까. 누군들 이항복의 후손일 거라는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생각지 못한 건 이 의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애국회.
이름과는 달리 몇몇 친일 의원과 친일 행위로 자산을 축적한 자본가들이 속한 사교모임이었다.
이종형 의원처럼 표면으로 드러난 인물도 있었지만, 조용히 정체를 숨긴 자들도 즐비하게 속해 있었다.
“다들 그만 하세요. 이 의원, 생각한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상석에서 날아온 한마디가 단번에 분위기를 바꿨다.
“다들 잘 생각해 보시길 바라오. 저놈 담화문 덕에 여기 있는 모두가 큰 화를 입을 뻔했소. 일전에 제가 손쓰자고 했을 땐 다들 미국과 우호적이고, 전쟁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는 자를 건드렸다간 뒷감당이 안 된다고 지레 겁먹지 않았소? 이젠 미국이나 군인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저놈을 떠받들게 생겼는데···”
이종형 의원이 열변을 토했다.
“나는 분명 방법이 있냐고 물었습니다만.”
또다시 상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종형 의원이 침을 삼켰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마지막 기회.”
“이강산 대령을 죽이기라도 하잔 말입니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늙고 노쇠한 부통령이야 별문제가 안 되는 걸 알기에 살려두지 않았습니까. 저놈이 전쟁 중에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순 없습니다. 오늘 국회에서 날개를 달아 주었으니 앞으로는 날아다닐 일만 남았을 테니까요.”
반민특위 공소시효가 연장되면서 온 위기를 간신히 넘겨냈다.
시기적절하게 터진 전쟁을 이용한 반공 선동이 잘 먹혀 순탄히 넘어가나 했고.
전쟁이 이강산이라는 위험요소를 더욱더 위험하게 키워 낼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법입니다. 이번에 그가 전선으로 돌아가면 별을 달아준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지기만 할 것이 뻔합니다. 서울을 떠나기 전, 처리해야 합니다.”
“다들 이 의원 말에 동의하십니까?”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치밀하게 설계한 계획 따윈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능성이 희박해지는 건 너무나도 확실한 사실이었으니까.
“아무리 단순하게 설계하고 실행한들 최소한의 시간은 필요할 것 아닙니까. 이강산 대령은 내일 날이 밝자마자 전선으로 돌아갈 기세던데, 무슨 수로 그를 서울에 붙잡아 둘 수 있겠습니까?”
“20년 만에 조카가 삼촌이 있는 곳에 왔는데, 얼굴이라도 비추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이종형 의원 웃음에서 비린내가 진동했다.
***
서울 종로. 오후 7시.
“서울 유람도 오늘로 끝이네.”
다행히 자리를 비우고 서울에 온 보람이 있었다.
아무 문제 없이 생각대로 일이 술술 풀린 덕에, 날이 밝아 올 때 출발해도 밴 플리트 장군을 맞이할 시간이 충분할 것 같았다.
‘아직 계시겠지?’
난데없이 1949년에 떨어졌던 첫날이 떠올랐다.
좌절과 함께 모든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던 그때, 가장 처음으로 위안이 되었던 건 빗자루로 나를 있는 힘껏 팼던 설농탕 이모였다.
아마 지금 내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시며 자랑스러워하실걸?
“후··· 어떤 새끼들이야.”
식당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지프에서 나오는 두 줄기의 헤드라이트가 시야를 가리며 다가왔다.
“뭔데?”
“이강산 대령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급한 용무가 있어 찾아왔습니다.”
누가 자꾸 헌병대를 심부름꾼으로 쓰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헌병도 헌병이지만···아까부터 거지 마냥 내 뒤를 몰래 쫓아다니는 쥐새끼들은 또 뭔데?
내가 모르는 줄 아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