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애국회(2)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살가운 이모가 말아주는 국밥 한 그릇 먹으려 했더니 건드려?
“급한 용무는 자네 사정이고, 관등 성명은 부대에 두고 왔나?”
악덕 선임이나 하는 줄 알았던 이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차분히 머릿속에 있는 레퍼토리를 끄집어냈다.
“죄··· 죄송합니다. 헌병 사령부 직할대 소속 염석진 대위입니다.”
“죄송하면 군 생활 끝나?”
내가 착해서 그렇지, 군화로 정강이 까여야 정상인 줄 알아.
“죄송합니다.”
“그럼 죄송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안 그런가? 내가 틀려?”
“···죄송합니다.”
어떤 말을 던져도 염석진 대위 입에서 나올 말은 죄송하다는 말밖에 없다.
밤새도록 죄송하다는 말만 듣고 싶은 생각은 없고, 국밥 먹을 시간을 빼앗은 것에 대한 짜증을 조금 섞었을 뿐이다.
“그래. 무슨 일이지?”
사실 국밥은 핑계에 가까웠다.
같은 헌병 사령부 소속이지만, 염석진 대위가 풍기는 분위기는 김정주 중령이 풍겼던 분위기와 전혀 달랐다.
김정주 중령은 정말 명령이 떨어져 정말 마지못해 나를 데리러 온 느낌이었다면, 염석진 대위는 어딘가에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부통령님께서 대령님과 오찬을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혹 날이 밝자마자 서울을 떠나실까 걱정되신 모양입니다.”
“그래?”
“예. 그렇습니다.”
이시영 부통령이 갑작스레 나타난 조카를 보고파 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항복의 후손이라고 공표한 이상 한번은 거쳐야 하는 순서기도 하고.
그런데 말이다.
“근데 왜 부통령님과 오찬 약속을 잡는데 헌병대에서 사람을 보내지?”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다.
게다가 지금은 전시상황이다.
전방에 있는 지휘관의 신원을 확인하겠다며 서울로 부른 것으로도 모자라, 전 병력을 갈아 넣어 경찰과 치안유지에 힘써도 모자랄 판에, 오찬 약속을 잡는 심부름꾼으로 쓴다?
이시영 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그 공로를 인정해 재산 일부를 환급해주겠다고까지 했지만, 재산 때문에 독립운동한 게 아니라며 단칼에 부를 거절한 인물이다.
지금이면 그는 이미 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노환으로 죽기 전 나타난 조카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교묘히 이용한 짐승 새끼들이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늘 생각은 해왔지만, 나에게 적이 생긴 모양이다.
“잘···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위에서 전하라는 말을 전했을 뿐입니다.”
“일단 삼촌이 뵙길 원하시니 뵙고 가야겠군. 장소와 시간 알려주게.”
“예! 시간은 낮 12시 30분이고 장소는···”
염석진 대위가 다행히 넘어갔다는 듯 신이나 시간과 장소를 말했다.
넘어가 줄 생각이 없는데 말이다.
“자네는 아까 그렇게 당해놓고도 정신을 못 차렸나?”
“예? 그게 무슨···”
적지 않게 당황한 듯, 염석진 대위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죄송하면 군 생활 끝나냐고 했잖아. 잘 모르면 군 생활 끝나?”
그러게.
말을 잘했어야지.
한번 잡은 꼬투리를 쉽게 놔줄 생각이 없었다.
***
애국회 서울지사.
사람 두 명 들어가면 꽉 차 보일 정도로 작은 방에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었다.
“회장님. 이강산 대령을 붙잡아 두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종형 의원이 상석을 향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일 처리는 어떤 방식으로 할 생각이지요?”
“비명 한 번 못 지르도록 깔끔히 죽이겠습니다.”
“죽인다··· 충분히 생각은 해봤습니까?”
애국회 회장이 오른손으로 천천히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물론입니다. 그놈이 지금 죽더라도 나라엔 하등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런 콩고물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전쟁을 끝내려는 건 미국, 중공, 뭐 일본도 다 마찬가지지요. 전쟁을 계속해야 민생만 고달파 질 뿐, 전황이 유리한 지금 적당히 종전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게 애국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리도 태산같이 높으니, 이 의원이야말로 참된 애국자군요. 이 의원께서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친다면 나를 도와 건국 대업의 중책을 맡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종형 의원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단!”
그가 숙인 뒤통수 뒤로, 애국회 회장의 날카로운 안광이 쏟아졌다.
“이번 일은 세간의 많은 이목이 쏠릴 겁니다. 실패란 절대 있어선 안 됩니다. 이 의원이 직접 나선 일이라면 안전장치는··· 확실히 챙겼겠죠?”
애국회는 철저한 점조직으로 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점조직으로 운영한 덕에, 잔가지에 불이 붙더라도 단번에 불붙은 가지를 잘라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가 목숨줄을 쥔 것이나 다름없는 확실한 놈들로만 준비해 뒀습니다. 처자식을 제 노리개로 삼겠다고 해도 수락할 놈들입니다. 급히 연락해뒀으니, 오늘 밤 안에 서울에 도착할 겁니다.”
“거참. 말만 들어도 분내와 활기가 느껴지네요. 활기가.”
회장이 혀를 내밀어 입맛을 다셨다.
“이강산 대령이 서울을 떠나기 직전, 거사를 진행할 겁니다. 제깟 놈이 아무리 전방에서 날아다녔다 한들, 지휘소에 가만히 앉아 명령이나 내렸을 것 아니겠습니까? 거사가 끝나고 난 뒤엔 공산 게릴라의 소행으로 몰고 간다면 적당히 짖어대다 말 것입니다. 늘 그래 왔듯이.”
이종형 의원은 확신에 차 있었다.
공산이라는 단어 하나면 쉽게 여론을 잠재울 수 있다.
이미 수도 없이 해왔던 일.
이 방면에 있어 전문가나 다름없었다.
“그래요. 내일이면 결판이 나겠군요. 나는 애국회 회장으로서, 이 일로 말미암아 이 의원의 애국심이 한층 성숙해지길 바랄 뿐입니다.”
“애국(愛國)!”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이종형 의원이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며 말했다.
책상에 앉아 전투의 승전과 패전, 두 가지로만 보고받았던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이강산 대령이 어떤 전투를 겪고 어떻게 여단장 자리에 올랐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
경무대 인근.
조금 기다리자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시영 부통령이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긴 했지만, 82세라는 고령임에도 올바른 걸음걸이로 걷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부통령님.”
“그래··· 자네가 내 동생 호영이 아들이라고?”
사실 남남이지만, 독립운동에 모든 걸 쏟아버린 그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연스레 나왔다.
“예.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불효를 안고 살아가는 탓에 진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와 나눌 이야기가 많으니··· 다들 나가 봐.”
이시영 부통령이 손짓으로 주변을 물렸다.
조카란 말에 마음이 놓인 듯, 그를 지키던 경호원들이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자네가 내 조카라는 것을 어떻게 내가 믿을 수 있지? 나에게 입증할 수 있겠나?”
이시영 부통령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지극히 당연한 순서였다.
“저는 만주에서 태어나자마자 다시 대한으로 보내져 보모 손에서 누이 한 명과 자랐습니다. 어릴 적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저를 키운 보모가 늘 했던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모든 걸 이야기해 줄 순 없지만 제가 원래는 명동 일대, 남양주에서 동대문까지 우리 집안 땅만 밟고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부를 쌓은 명문가의 자식이라고 말입니다.”
이시영 대통령의 주름 가득하지만 총명한 눈을 보니, 이야기 하나라도 대충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집중하고 있었다.
“처음엔 당연히 그 말이 뭘 뜻하는지도 몰랐고, 조금 더 커서는 거짓말로만 알았습니다. 쌀알을 구경조차 해보지 못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명동 땅이니 동대문이니 하는 말은 터무니없이 들렸으니까요.”
“계속해보게.”
여기까지는 그의 가문에 발을 들인 사람이거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이야기다.
침을 삼켜내고, 조금 더 진정성을 담아 말을 이었다.
“일제의 눈초리를 피하려 호적은 물론 돌림자를 쓰지도 못했고, 누이는 일본군에 끌려가 생사를 확인할 방도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말들은 가슴에 새겨져 잊히지지가 않았습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이다.”
이시영 부통령이 조심스레 안경을 벗었다.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구차히 생명을 도모하진 않겠다. 그리고···”
“네가 정말··· 정말로 호영이의 아들이란 말인가···”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위로 꺾어 하늘로 향했다.
꺾인 고개가 무색하게, 그의 양쪽 뺨으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 아버지는 오른쪽 옆구리에 작은 점 3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그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됐네. 됐어··· 충분하니 굳이 보이지 않아도 되네. 우리 호영이는 옆구리에 점 3개가 있었지···”
자리에서 일어나 군복 상의를 들추려 하자, 이시영 부통령이 만류했다.
6명의 형제 중 유일하게 광복을 눈에 담은 이는 이시영 부통령뿐이다.
아무에게도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는 먼저 떠난 형제와 가족들을 늘 가슴 깊숙한 곳에 묻고 꺼내보기를 반복하며 살고 있었다.
“강산아··· 삼촌이라고 불러 보아라. 어서.”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너무 오래 걸려 죄송합니다. 삼촌···”
삼촌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부둥켜안았다.
내게 대한민국 부통령이라는 삼촌이 한 명 생기는 순간이었다.
***
간단하면서도 완벽한 입증이 끝나고 나서부턴, 여느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별다르지 않은 이야기가 오갔다.
“나도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국군에 미군도 인정하는 훌륭한 장교가 활약하고 있다고. 그게 내 조카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이시영 부통령은 처음 봤을 때와 달리 매우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힘든 전투 이야기나 가족과 관계된 이야기엔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유재흥이 벌인 일을 듣고는 벼락같이 분노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휘하에 둔 사람이 많을수록 주변을 살피고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 짧은 대화 사이사이에 희로애락이 모두 녹아 있었다.
행복한 이야기만 나누고 싶다만, 조심이라는 말이 나온 참에 이야기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이라니?”
“서울에 온 뒤로, 누군가 제 뒤를 밟고 있는 것 같습니다. 티를 내지 않았으니, 아마 상대방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겁니다.”
가족 간 즐거운 오찬에서 부통령과 군 장교의 회의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분위기가 찰나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한참을 고심하던 이시영 부통령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너를 노리고 있는 것 같구나. 다시 청천강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만이라도 너를 보호할 인력을 붙여야겠구나.”
고맙지만 마음만 받아야 할 것 같다.
“제가 착각했을 수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최전방에서도 따로 저를 보호할 병력을 두지 않았었고, 괜히 신원을 밝히고 나서 거드름 피운다는 이야기는 듣기 싫습니다.”
만약 이 자리 이후 내게 경호 인력이 붙는다면, 아무 일 없을지도 모른다.
‘그건 곤란하지.’
내가 바라는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제 뒤를 밟을 만큼 저를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히죽 웃으며 물었다.
쓰레기를 버리는 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온 쓰레기장을 다 뒤지기엔 지금 내가 너무 바쁜 몸이다.
이왕 서울까지 온 김에, 눈에 띄는 큰 쓰레기들을 좀 처리해야겠다.
분리수거가 안 되는 쓰레기면?
둘 중 하나다.
태워버리거나. 갈아버리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