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애국회(3)
“그야 이 늙은이 숨이 다하기만을 고대하는 자들과 같지 않겠느냐.”
단순한 시기와 질투를 넘어 적이 되려면?
하늘에 사무치도록 한이 맺힌 철천지원수가 아닌 이상, 자신의 앞날에 방해가 되면 적이 되는 거지 뭐.
이시영 부통령 말대로 지금 나를 노리는 적은 이시영 부통령을 노리는 적과 같을 것이다.
“별일 없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누가 감히 국회의 부름을 받고 다시 전선으로 돌아가는 국군 지휘관에게 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안심시키려는 나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사사로운 이익과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나라와 동료, 심지어는 제 혈육까지 주저 없이 팔아넘긴 놈들이다. 강산아. 언제 어디서나 몸조심해야 한다. 이 못난 삼촌은 마땅히 이루어야 할 뜻을 다 이루지 못했으니··· 네게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 한없이 미안하구나.”
이시영 부통령 눈동자에서 미안함과 서글픔,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분노가 보였다.
대대손손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나라의 독립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와 형제들이다.
거의 모든 식솔이 고문사, 병사(病死), 객사(客死), 아사(餓死)했다.
광복이라는 결실을 얻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만 해도 몰랐겠지.
조국과 민족을 팔아넘겼던 매국노들이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사는 모습에, 이시영 부통령 속에선 천인공노할 분노가 단 1초도 쉬지 않고 끓어올랐을 것이다.
“미안이라뇨. 당치 않습니다. 얼른 식사부터 하시죠. 삼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매국의 대가로 축적한 부를 대대손손 물려주며 떵떵거리며 사는 게 아니라,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들이 추앙받고 그 대의를 물려받은 후손들이 대를 잇는 이상적인 나라.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한 대업이지만, 이번에는 다르리라.
‘칼춤 한번 거나하게 춰야겠군.’
자.
이제 청소 좀 해볼까?
***
오찬이 마무리된 뒤, 서로 각자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오늘따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하늘도 아는 걸까?
‘거 참. 칼춤 추기 딱 좋은 날씨네.’
진이 다 빠지도록 칼춤을 추더라도,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곧바로 식혀줄 것만 같은 날씨였다.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보자.”
이시영 부통령이 오른손에 쥔 지팡이를 차에 기대 놓은 채 두 팔을 벌렸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건강하셔야 합니다. 삼촌.”
“강산이 너는 우리 가문에 남은 마지막 희망이다. 몸조심해야 한다.”
가슴 따듯해지는 포옹을 주고받은 뒤, 이시영 부통령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향해 떠났다.
이시영 부통령이 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지프 한 대가 내 앞에 멈춰섰다.
“이강산 대령님. 헌병 사령부 소속 염석진 대위입니다. 목적지까지 모셔다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그래? 콜택시는 부른 적이 없는데.
“그런가? 태워준다면 고맙게 타겠네. 가지.”
알면서도 속아준다는 게 이런 거다.
내가 가야 하는 목적지, 염석진 대위가 나를 데려가야 하는 목적지는 분명 다를 테니까.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지프에 몸을 실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하셔야 할 테니, 지름길로 모시겠습니다. 대령님.”
이게 말로만 듣던 저승행 특급 지프인가?
서서히 온몸의 감각을 끌어올렸다.
염석진 대위가 지름길이라고 칭한 길은 당연히 지름길이 아니었다.
서울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북쪽으로 향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대놓고 방향을 틀기도 했다.
“염 대위. 내가 아는 길과는 좀 다르군. 이리로 가는 게 맞나?”
지프는 비교적 매끈하게 잘 정비된 도로를 피해 구불구불한 산악지형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 지프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음···이강산 대령님을 최대한 빠르게 모시기 위해 미리 생각해 둔 길입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미리 생각해 둔 길? 지랄하네.
구라를 치려면 뜸이라도 들이지 말던가,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 내가 잘 모르는 초행길이라 물어본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
“운전병, 대령님께서 불편하신 모양이니 지프가 너무 흔들리지 않도록 신경 좀 써.”
“아··· 죄송합니다. 최대한 신경 쓰겠습니다.”
어리숙한 연기를 관람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염석진 대위가 입은 군복 상의 등 부분이 점점 땀에 젖어 왔다.
“어어···? 염 대위님, 이상합니다. 아무래도 차가 퍼진 것 같습니다.”
며칠을 기다려도 인적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산길.
운전병이 오른발로 정확히 브레이크를 밟아 지프를 세운 뒤 말했다.
브레이크를 밟아 선 차가 퍼진 차라면, 전 세계 모든 차가 퍼진 차일 것이다.
“그러게 신경 잘 쓰라니까···”
염석진 대위가 운전병을 나무라며 오른손을 슬쩍 허리춤에 넣었다.
허리춤에 숨긴 게 뭔진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퍽!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틈으로 있는 힘껏 발을 차 넣었다.
염석진 대위의 오른팔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가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아아악! 이런 개새끼가···”
당연히 이게 끝일 리가 없다.
탕! 탕! 탕! 탕! 탕!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재빨리 지프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지프에 수십 발의 탄두가 날아와 박혔다.
1차적으로 나를 제거하는 데 실패한 대가인지, 염석진 대위와 운전병은 그 자리에서 동료라고 믿었을 자들이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
‘너무 편하게 죽었군.’
쉴새 없이 총격이 쏟아졌다.
염석진 대위가 죽었다는 걸 확인하자,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채 총격을 가해오던 무리의 총격이 잠시 멈칫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5m 정도 떨어진 커다란 바위로 몸을 던졌다.
여전히 총격이 지프에 쏟아지는 걸 보니, 다행히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10명? 20명?
절대 실패해선 안 된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탄이 쏟아지는 정도를 보고 판단했을 때, 나 하나 죽이겠다고 족히 1대 분대 규모는 되는 무리를 보내왔으니까.
염석진 대위와 운전병의 시체는 이미 조각조각 나 사방으로 튀었고, 지프는 벌집 신세가 되고 있었다.
“사격 중지.”
지프 문짝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총격을 쏟아부은 뒤, 누군가 나무 뒤에서 나와 천천히 지프로 다가왔다.
‘생쇼를 하는군.’
곧바로 수류탄 안전핀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이 지프 하부로 굴러들어온 뒤.
쾅!
폭발음과 함께 지프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지프가 폭발하자 놈들이 몸을 숨겼던 나무 뒤에서 나와 지프를 향해 다가왔다.
총구는 여전히 지프를 향하고 있었다.
악당이 우물쭈물 쓸데없는 잡설을 내뱉으며 주인공에게 반격할 시간을 주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
실전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이런 제기랄··· 없습니다!”
지프 뒤를 확인한 무리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뭐? 없다니.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빨리 주변 수색해! 못 찾아 죽이면 우리가 죽는 거야. 알겠나?”
지프에서 몸을 숨긴 바위까지의 거리는 5M.
성인 남성 기준 다섯 발자국 이내였다.
놈들이 나를 찾아내기까지 걸릴 시간은 불과 10초도 안 남았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위급한 순간에 지각은 별로 달갑지 않은데.’
바위와 가까운 곳에서 발자국 떨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생사를 가를 시간이 10초도 남지 않았다.
당연히 내 생사는 아니고.
사실 여기서 저들을 피해 이탈하는 것도,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까다로운 건, 저들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살리는 일이니까.
터-벅.
또 한걸음.
나노봇을 이용해 전신에 힘을 불어넣었다.
마지막 한 발자국이 남은 순간.
탕!
또 다른 총성이 들려왔다.
총성이 누구를 향했는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바위 코앞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끊김과 동시에, 눈도 감지 못하고 즉사한 시체가 쓰러지며 눈이 마주쳤다.
“왔군.”
탕! 탕! 탕!
이내 총격전이 벌어지자, 곧바로 옆에 떨어진 소총을 집어 들었다.
“오른팔. 너는 왼팔. 어쭈 움직여? 너는 왼쪽 다리 추가다. 이 새끼야.”
아무래도 거긴 안 되겠지?
침착하게 당장 죽지 않으면서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곳만을 골라 총알을 심어줬다.
역시 제일 만만한 건 팔과 다리였다.
총격전은 생각보다 꽤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죽이는 건, 나 혼자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놈들은 오직 팔과 다리에만 총상을 입으며 쓰러졌다.
끝까지 발악하며 방아쇠에 손을 집어넣는 놈들에겐.
탕!
양팔에 총알을 박아 평생 숟가락조차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총성이 잦아들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덤덤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끄아아악!”
“어? 미안하네. 실수야. 실수.”
오른팔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소총을 집어 들기 위해 끙끙대던 놈의 오른손을 담뱃불 끄듯 군화로 밟아 비볐다.
“고트(GOAT) 지대장 최규봉입니다. 이강산 대령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네. 하마터면 벌집이 될 뻔했다는 것만 빼면.”
“죄송합니다. 놈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충분한 거리를 유지하느라···”
죄송하면 군 생활 끝··· 아니, 이게 아니지.
“아닐세. 딱 제때 맞춰왔네. 얼른 이곳을 정리하고 이동하지.”
“예! 알겠습니다.”
켈로(KLO) 부대.
비공식적 특수임무를 수행한 특수부대다.
미군 소속이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공식적으로 병적을 관리하지 않아 군인이 아닌 민간고용인 신분이었다.
아직 고트(Goat), 선(Sun), 위스키(Whisky) 3개 지대가 켈로(KLO)라는 부대명으로 통합되기 전.
친절하게도 놈들이 이곳에 내 무덤을 만들어주려고 했던 것처럼, 나도 비공식적으로 이들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고심 끝에 결정한 이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미군에 소속된 비공식 특수부대를 움직였냐고?
동생에 대한 일이라면 두 팔 걷고 나설 우리 형이 그 유명한 맥아더다. 맥아더.
이들의 계획은 굳이 듣지 않아도 뻔하다.
운전병이 우연히 길을 잘못 들었고, 그곳에서 또 우연히 공산 게릴라를 만나 안타깝게 전사한 이강산 대령의 하늘도 울고 갈 가슴 아픈 이야기.
“자, 이제 시작해볼까?”
여기 바닥에 피 흘리며 끙끙대고 있는 놈들은 기껏해야 잔가지, 꼬리에 불과할 것이다.
볼품없는 잔가지더라도 모두 부러졌다면, 뿌리가 누군지 알아내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총성과 포성이 자장가인 전쟁터에서 구르다 보면, 이런 시정잡배의 우두머리가 누군지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다.
“하··· 여러분. 지금 같이 나라가 위태로운 시기에 북괴와 중공의 지령을 받아 국군 지휘관을 살해하려고 하면 어찌합니까. 말세야. 말세.”
우두머리로 보이는 놈 앞에 쭈그려 앉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얼마나 의리 있는 새끼들인지 알아볼까요?”
궁금했다.
나라도 팔아먹은 새끼들이 동료는 얼마나 빨리 팔아먹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