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99화 (99/149)

99화. 애국회(6)

애국회 서울지사. 회의실.

애국회 회의실이 이처럼 꽉 찬 건, 반민특위가 설치되고 친일매국노들을 잡아들이겠다 공포한 이래 처음이었다.

“여기서 뵙는 건 꽤 오랜만이지요?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니 반가울 따름입니다.”

그간 회의실에 모일 필요가 없었다.

여기 모인 모두가 반민특위에 끌려간 경험이 있거나, 끌려가야 마땅했지만 채 하루도 구금되지 않고 빠져나왔다.

가지각색의 행색을 한 자들이 모여 입을 열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회장님께선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승려 권상로가 목탁을 두들기며 머리를 조아렸다.

권상로는 2차대전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것이 곧 성불이라 믿었다.

쌀과 고기로 든든히 배를 채웠는지, 얼굴에서 광이 나는 게 때깔이 고왔다.

“물론 잘 지냈지요. 권 승려께선 속세가 체질인지, 낯빛이 아주 좋아 보입니다. 허허.”

서로를 칭찬하고 안부를 물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회장님. 마쓰우라 히로 松浦 鴻(노덕술)가 반병신이 되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間抜けなやつ! (멍청한 녀석!)”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국적마저 팔아먹었는지, 대놓고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 쓰는 자들도 여럿 있었다.

관료, 경찰, 군인, 예술가와 지식인까지.

각기 다양한 계층의 애국회 간부들이 회장의 부름에 하루 만에 달려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사담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애국심을 품고 살아가기도 바쁘신 여러분을 이렇게 모이게 한 이유는 다 알고 계실 겁니다.”

회장이 조곤조곤 입을 열자, 장내의 모든 시선이 상석을 향했다.

“우리 애국회의 자랑스러운 이종형 의원이, 범 무서운지 모르고 날뛰는 하룻강아지 이강산 대령을 직접 처형했다고 합니다.”

여기 모인 모두가 기뻐할 소식이었지만, 손뼉을 치거나 환호를 내뱉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제가 지금 상석에 앉아 여러분을 향해 이리 입을 놀릴 수 있는 건, 시대에 앞서가는 정의의 흐름과 사람을 보는 탁월한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강산 대령을 처형했다는 이종형 의원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중대한 사안인 만큼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애국회 회원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 의사를 밝혔다.

“저 나름의 방식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있으며, 결과가 곧 도착할 겁니다. 그 결과에 따라 이 자리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축배를 드는 자리가 될지, 정의를 위해 썩은 살을 도려내는 자리가 될지 결정될 것입니다. 데려오세요.”

온몸에 피떡이 진 이종형 의원과 노덕술이 회의실 안으로 끌려 들어와 내팽개쳐졌다.

이종형 의원은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몸에서 어떤 미동도 없었다.

“단 한 사람도! 고개를 돌리지 말고 이들을 직시하세요. 이들은 자신의 몸을 헌신해 과정 또한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으니까요.”

끔찍한 몰골에 몇몇이 고개를 돌리자, 애국회 회장이 언짢은 기색을 표했다.

“회장님. 전사자 시신보관소와 부민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회장 뒤에 그림자처럼 숨어있던 누군가 회장에게 소식을 전했다.

“공정하고 공평하게. 모든 회원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해주기 바랍니다. 뭐라던가요?”

이 한마디가 이종형 의원과 노덕술의 생사를 가를 것이다.

한쪽 눈을 간신히 뜨고 있던 노덕술이 못 보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쳇···씨발.”

피딱지 덕에 잘 떼어지지도 않는 입으로 사부작사부작 욕을 읊조리면서.

“보고를 종합해보면··· 이종형 의원 말대로 이강산 대령이 사망한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예상 밖의 말에 일동이 당황했다.

애국회 회장의 선견지명은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회장이 이종형 의원과 노덕술을 저리 피떡으로 만들어 놨다는 건, 저들이 거짓을 고했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어제 전사자 시신보관소에 시신이 들어온 것도 사실이고, 아직 앳된 얼굴에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는 시신이라면 제가 아는 바로는···”

이강산 대령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무엇보다 이시영 부통령이 식음을 전폐하고 자택에 박혀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신, 시신은 언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애국회 회장이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지금 이강산 대령의 시신을 빼돌려 이곳으로 가져오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놔야 하긴 하지만, 확인하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시신을 가져오고 있다는 말에 남아있던 의심의 여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만세! 애국회 만세!”

애국회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쳤다.

“만세! 애국회 만세!”

그의 선창에 간부들이 답했다.

“만세! 대한민국 만만세!”

“만세! 대한민국 만만세!”

만세가 울려 퍼지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인상을 찡그리는 두 사람.

노덕술과 만세 소리에 깨어난 이종형 의원이었다.

“염병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알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맘···세··· 만···”

영문을 모름에도 오로지 살기 위해 바퀴벌레같이 만세를 따라 외치는 이종형 의원을 보며, 노덕술이 한 수 접어주기로 했다.

“이종형 열사 만세!”

히히.

만세 속에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침을 질질 흘리며 좋아했다.

***

좁아터진 관 속.

좁다.

들어와 본 자들만 이 고통을 알 것이다.

진짜 좁다니까?

이쯤 되니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겠다.

좁아터진 관 속엔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멀었나? 이제 좀 힘든 것 같은데.”

팔다리를 움직이지 않은 지 두 시간은 된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큰 관을 부탁할 걸 그랬다.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저도 초행길인지라··· 이 야밤에 여단장님을 관에 넣어 힘들게 모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어허, 힘들게?

“이 속에 있는 나는 뭐 편한 줄···”

“쉿. 누군가 다가옵니다.”

김정주 중령의 눈치에 입을 조용히 닫았다.

입을 닫고 귀를 기울이자, 밖에서 나누는 대화가 관 안으로 들어왔다.

“육군본부 헌병대에서 물건을 전하러 왔습니다.”

“빨리 들어가 보세요. 다들 목 빠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뭐야. 끝?

새끼들 허술하긴.

하기야 팔도를 다 뒤져본들 이 야심한 밤에 관을 들고 다니는 헌병대가 있을 리가 없긴 하지.

조금의 난항도 없이 일이 잘 풀려가고 있었다.

“여단장님.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미리 정해둔 대로만 움직이면 아무 문제 없을 걸세. 절대 한눈팔아선 안 돼. 내가 관 안에 있다고 시신이 아니니까···”

“쉿.”

옴짝달싹 못 하는 건 몸뿐만이 아니었다.

관 밖으로 나가기 전까진 김정주 중령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

“오··· 드디어 도착했군요. 수고 많았어요. 우리끼리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나가서 기다려 줄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간신히 빼돌린 터라··· 조금 서둘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놈들의 소굴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김정주 중령과 대화를 나눈 이 자가 이곳의 대가리일 터.

이런 말투와 목소리로 마음에도 없는 역겨운 존대를 하는 자들의 특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신은 남들과 달리 고상하고 존귀하며, 사람들 위에 군림해야 한다고 정말로 믿는 부류.

“열어보세요.”

관 뚜껑을 고정해둔 못을 빼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질끈 감은 후, 나노봇과 함께 힘을 풀어 최대한 자연스러운 시신 연기에 돌입했다.

“이강산 대령이 맞습니다. 부민관에서 봤던 그놈입니다. 애국회 만세!”

이종형 의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민관에서 나를 봤다는 건 그 역시 국회의원이란 소리나 다름없었다.

“잠깐.”

역겨운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눈앞에 있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합니다. 이종형 열사는 가슴과 옆 통수에 총을 쐈다고 했습니다. 머리를 옆으로 돌려 확인해 보세요.”

열사?

요 며칠 들어 내가 알고 있는 단어의 뜻이 맞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빈번했다.

오줌싸개가 여기선 나를 죽인 업적으로 열사가 되어 있는 모양이다.

그림자 하나가 주변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치밀한 새끼군.

핏기없이 하얗게 질려있는 관 속 시신을 보고도 믿지 못해 머리를 돌려보는 치밀함 하나는 인정해 줄 만하다.

‘쇼타임.’

넙데데한 손이 옆 통수에 가까워지려는 찰나.

빡!

단박에 몸을 일으켜 눈앞에 가장 먼저 보이는 남자 얼굴을 머리통으로 후려쳤다.

“뭐··· 뭐야!”

“이런 미친.”

“どうしてこんなことが!(어떻게 이럴 수가!)”

뭐야, 여기 일본인도 있었어?

“부활. 부활이라 하면 저 땡중께서 노하시려나?”

관 속에서 일어난 시신···

나를 보고 귀신이라도 본 듯 모두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빠-각.

군인에게 총과 같은 목탁을 내던지는 걸 보니, 땡중이 분명했다.

“이 병신들아! 제 발로 죽겠다고 관까지 짜왔는데, 죽여!”

적잖이 당황했는지 역겨운 존대를 내뱉던 우두머리의 가면이 마침내 깨졌다.

같잖은 존대할 때보다 훨씬 위화감이 덜했다.

역시, 못된 새끼들은 이렇게 추악해야 제맛이다.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전부 제압해!”

김정주 중령과 그의 직속 부하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한가지 이상한 건 관 속에서 부활한 나를 보고는 놀라 자빠졌지만, 김정주 중령과 그의 부하들을 보고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웃어?”

몇몇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이놈들이 우리에게 뭔가 깜짝 선물을 준비한 모양인데··· 다들 마음에 드십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저기 세상 물정 모르는 것들이 대업을 방해하기 위해 이리도 판을 치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닙니다. 말이.”

“닥쳐라! 이··· 미친놈들. 전시에 지휘관을 암살하려 시도 한 죄. 나라를 분열시키고 혼란스럽게 뒤흔드는 죄만으로도 충분히 사형···”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 속이 거북해졌는지, 김정주 중령이 목을 타고 올라오는 쓴 침을 뱉으며 말했다.

“뭔가 큰 착각을 한 모양이군요.”

이제야 정신을 조금 차렸는지, 우두머리가 다시 역한 존대를 내뱉기 시작했다.

“나라를 분열시키고 혼란스럽게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여러분처럼 사사로운 복수심에 물들어 있는 멍청하고 아둔한 자들 아닐까요?”

그냥 전부 죽여버릴까?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내 손에 편하게 죽는 건, 이들에겐 성불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우리 애국회와 나는 그 어려웠던 일제 치하에서 이 겨레의 상권을 수호했고, 민족자본 육성의 기수로서 한민족의 긍지와 명예를 떨쳤습니다. 이게 죕니까? 무슨 죄?”

김정주 중령이 손을 부르르 떨며 방아쇠로 향하는 손을 참아냈다.

“뭣 모르고 설치는 것 같아 한 가지 알려드리지요. 나는 반민특위가 체포 대상 1호로 잡은 사람입니다.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반민특위가 첫 번째로 잡고 싶었던 사람이 나란 말입니다.”

신문을 통해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를 아버지라 부를 만큼 일본에 빠져있던 반민특위 체포 대상 1호.

애국회 회장은 일제 강점 시절 조선의 거부로 불렸으며, 지금도 10대 재벌에 꼽히는 친일 기업인 박흥식이었다.

“수십 명의 반민특위가 수년간 공들여 겨우 체포한 내가 얼마 만에 나왔는지 말해줄까요? 3개월. 딱 3개월 걸렸습니다. 이번에도···”

귀가 썩을 것 같아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 들어오시죠.”

친절하게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틀렸네. 자네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틀렸어. 이제야 평생 소원하던 자네들의 실체를 내 눈으로 직접 보는군.”

내 하나뿐인 삼촌.

이시영 부통령이 천천히 지팡이를 짚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박흥식 회장님. 하던 말을 마저 해보시겠습니까?”

여기 있는 모두가 힘을 합해 어떤 발악을 하더라도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치명적인 외통수.

체크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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