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애국회, 새로운 대한민국(7)
정반대의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재산뿐 아니라 가족까지 전부 독립에 바친 이시영 부통령과 재산을 위해 가족과 나라까지 팔아먹은 애국회 회장 박흥식.
“자네들이 한곳에 모여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진 않았을테고, 내 조카가 들어있는 관을 빼돌린 이유가 뭔가?”
이시영 부통령이 담담하게 말했다.
겉으론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속에선 분노가 끓어오르고 피눈물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거야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부통령님, 여기 제 아우들 꼴이 보이십니까?”
박흥식 회장이 이종형 의원과 노덕술을 가리켰다.
“이강산 대령이 제 아우들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놨길래, 어떻게 생겼는지 낯짝이라도 보고 싶어 그랬습니다. 형으로서 아우들을 챙긴 게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니지요.”
“인두겁을 쓰고 태어나 어찌···”
저 뻔뻔함을 보고 있자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젊고 강한 육체를 가진 나도 그럴 진데, 노쇠한 이시영 부통령은 오죽할까.
이시영 부통령이 말을 잇지 못하자, 아슬아슬하게 선을 오가던 박흥식 회장이 선을 넘었다.
“시신을 빼돌린 건 헌병대지 제가 아닙니다? 사회 지도계층을 모아 모임 가진 것이 죄라면 달게 받아야겠지요. 이렇게 부통령님께서 직접 오셨으니 아마 저희는 법정에 서게 될 테지만, 법정에서도 저는 지금과 똑같이 말할 겁니다. 아우들을 지키려는 형의 마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형제가 다 돌아가신 부통령님 앞에서 제가 말실수를 했군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장,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들이 이 상황에서 이렇게 비아냥댈 수 있는 것은 법정에 서도 인생에 그 어떠한 지장도 없을 것이며, 구속된다 한들 특사로 풀려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시영 부통령을 앞에 두고 저런 망언을 지껄이는 걸 보면, 법정 판사 중 애국회 회원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통령님. 잠시 바람 좀 쐬시겠습니까?”
생각을 정리하는 듯, 이시영 부통령은 눈을 감고 있었다.
수만 가지 생각이 오가고 있을 이시영 부통령의 머리와 가슴속을 환기하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그래. 그리 하자구나.”
문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제법 거칠게 불었다.
피비린내쯤은 단번에 날려버릴 것처럼.
***
달이 붉었다.
정말로 달이 붉은 건지, 내 눈에 붉게 보이는 건진 모르겠지만.
“괜찮으십니까?”
나는 사실 이 자리에 이시영 부통령을 데려온 걸 후회했다.
저 벌레만도 못한 놈들에게 인간의 탈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공명정대한 법의 잣대를 들이대야 할까? 고민했었다.
이렇게 보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반드시 공명정대해야 할 법이 공명정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런 벌레들이 판치는 것이다.
저 안에 있는 벌레 모두를 법정에 세운들, 몇이나 지은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을까?
‘관에서 나오자마자 전부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이시영 부통령이 이 자리에 동석한 이상, 그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게 되어버렸다.
“평생 저런 놈들이 판치는 걸 보고 살았는데, 괜찮다. 괜찮아.”
“저들을 법정에 서게 하실 겁니까?”
“그리 했으면 하느냐? 이 늙은이가 총 한 자루 손에 쥐고 저놈들을 다 죽일 수나 있을지 모르겠구나.”
걱정은 이만했으면 충분하다.
오늘만큼은 내가 이시영 부통령의 칼이 되어야겠다.
이시영 부통령이 붉은 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도 고달프게 독립운동을 했던 많은 가족과 형제들이 광복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매일, 눈뜨고 있는 모든 순간에 하늘을 원망했었다.”
그의 속은 이미 시꺼멓게 타 있었다.
“나는 오늘 하늘에 처음으로 감사드렸다. 왜 나 혼자만 살아남아 이리도 험한 꼴을 보게 하며 살았는지··· 오늘에서야 이유를 알겠구나.”
“그간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삼촌.”
가족 중 한 명만 잃어도 그 슬픔을 헤아릴 수 없는 법인데, 나를 제외한 모든 가족을 잃은 슬픔은 오죽했을까.
그 슬픔을 이해한다 말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 것이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제게 다 생각이 있으니, 이제 걱정은 그만하시고 먼저 들어가 계시죠. 곧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이시영 부통령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김 중령.”
“예. 여단장님.”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정주 중령을 부르자, 그가 재빨리 달려왔다.
“소총 이리 주게.”
“여단장님···”
“내가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절대 안으로 아무도 들어오게 해선 안 돼. 자네도 마찬가지. 명령이야.”
김정주 중령이 어깨에 힘을 풀자 멜빵끈에 메여있던 M-1 소총이 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단장님께서 까라면, 까겠습니다. 탄은 이것뿐입니다.”
M-1 소총 한 정과 30-06 스프링필드 탄 8발이 끼워진 클립 2개가 내 손에 들어왔다.
“이거면 충분해. 이따 보자고.”
표적 15개.
탄 16발.
그거면 됐지. 뭐.
***
소총을 장전하고 문 안으로 들어서자, 비아냥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아이고, 무섭게 총을 들고 들어오고 그럽니까. 쏘기라도 하시려고?”
응.
쏘려고.
“이유 없이 무거운 장식품을 들고 다닐 성격은 아닌지라.”
날아오던 비아냥을 향해 대꾸를 날렸다.
“여기가 빨갱이 나라도 아니고, 인민재판이라도 하시겠다? 이 대령. 거 부통령님도 계신 곳이니 언행을 바로 하세요!”
-철컥.
좆이나 까 잡수세요.
대답 대신 장전 손잡이를 당기자, 경쾌한 쇠 마찰음이 났다.
“대한민국 부통령이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지막으로 묻겠소. 늦었지만···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죄를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 의사가 있소?”
나는 알고 있다.
이들이 콧방귀도 안 뀔 질문을 왜 또 하는지.
“나무아미타불. 제 죄는 부처님께 성불···”
탕!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날아간 총알은 정확히 입을 연 권상로 미간에 명중했다.
그렇게 첫 번째 표적이 짧은 비명을 내뱉기도 전에 쓰러졌다.
“지금 보니 그 위대한 부처님도 총알은 못 막아주시나 봅니다.”
쏘기 전에 말해줄 걸 그랬나?
“전시에 국군 지휘관을 암살하려 시도한 행위, 애국회가 중공과 내통했다는 명백한 증거와 증언 또한 확보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인정한 육군본부 훈령에 의거, 즉결처형 대상이 되셨음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진작에 왔어야 할 순간이, 너무 늦게 와버렸다.
“이봐 이 대령 당신 미쳤어?! 즉결처형도 상급자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 거야? 부통령님도 정신 차리십시오! 우릴 겁주기 위해 고작 한다는 짓이 만만한 승려 하나 죽이는 겁니까?”
정신 차리라는 말에 이시영 부통령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이시영 부통령이 던진 마지막 질문은 그들에게 내려준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마지막 동아줄을 스스로 잘라버린 이들에게, 더는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열사들과 내 형제들을 대신해 말한다.”
이시영 부통령이 끓어오르는 울분을 참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지만,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했던 반역자들을 처단하라.”
탕! 탕! 탕! 탕!
연달아 4발을 표적에 명중시켰다.
그들이 쓰러져 나가는 동안에도 이시영 부통령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헌병 또는 경찰로서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자들을 처단하라.”
탕! 탕!
“살려··· 살려줘 제발. 내가 다 인정할게. 법정에서 다 인정한···”
탕!
8발을 쏘자 탄 클립이 튀어 올랐다.
무덤덤하게 장전손잡이를 당긴 뒤, 남은 탄 클립을 끼워넣었다.
늦었어.
사람이 공포에 질리면 흔히 비명을 지른다고 알고 있지만, 그건 정신이 온전히 남아있을 때 이야기다.
진짜 공포가 정신을 집어삼키면 숨 쉬는 것조차,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잊어버린다.
살려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실 안에는 총성과 이시영 부통령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을 저해한 자들을 처단하라.”
탕! 탕!
아무나 쏘는 것 같아도, 16발의 총알엔 전부 정해진 쓰임이 있다.
이번 총알이 향한 곳은 이종형 의원과 노덕술이었다.
금고가 넘칠 정도로 쌓아놓은 금괴와 돈도, 국회의원이라는 명함을 포함해 이들이 가진 그 어떤 것도 날아오는 총알을 막아주진 못했다.
“독립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에서 의사결정을 수행하고 주도한 자들을 처단하라.”
4발의 총성이 연이어 울렸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가 섞이며 코를 찔렀다.
남은 탄은 두 발.
남은 표적은 하나였다.
“이··· 이런 미친놈들. 이건 명백한 학살이야. 학살! 당신들이 죽인 사람들이 누군지 알기나 해? 하나같이 나라를 움직이는 위치에 있는···”
“닥쳐.”
박흥식 회장의 입을 발로 걷어찼다.
파절된 치아가 입안 이곳저곳을 찌르며 돌아다녔다.
“이미 애국회 명단은 확보했다. 역사의 심판 아래 일제, 중공의 부역자였다는 모욕이 죽어서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너희 가족과 친인척은 글쎄. 민중들 사이에서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은 못 하겠군.”
이로써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어냈다.
내가 판을 짜는 동안 이시영 부통령은 내가 죽은 것처럼 연기하며 국회, 정부에 있는 불순 세력을 추려냈다.
애국회와 그로 인해 알게 된 큰 가지들을 쳐내면, 나머지 잔가지들을 말려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헙··· 흡···”
이빨이 없는 그의 입에선 바람 빠진 신음만 흘러나왔다.
“남은 두 발은··· 이리 주게.”
이시영 부통령에게 M-1 소총과 남은 탄 두 발을 넘겨주었다.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며 두루마기를 적시고 있었다.
이시영 부통령이 박흥식 이마에 총구를 가져다 대며 읊조렸다.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대한민국 부통령 이시영인 내가 진다.”
탕!
총알 한 발이 총구를 빠져나가 박흥식 회장의 미간에 구멍을 만들었다.
탕!
마지막 한 발.
이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총성이 아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여는 신호탄이었다.
“바람이 시원합니다. 부통령님.”
불어오는 바람이 몸에 묻은 피비린내를 씻어주었다.
***
부대로 돌아가면, 잔소리 대마왕들이 나를 향해 잔소리 폭탄을 집어 던질 것이다.
폭탄의 위력을 줄이려면 한시 빨리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방법뿐.
“나머지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서둘러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거라. 강산아. 이 나라는 네가 꼭 필요하다.”
“건강하셔야 합니다. 상황이 되면 또 들리겠습니다.”
21년 만에 생긴 삼촌과 헤어지며 나눈 대화는 이게 마지막이었다.
몸을 날리듯 지프에 올라탔다.
‘자··· 눈을 비비고 다시 읽으면?’
지프가 출발하자마자 손에 쥔 서면을 다시 읽었다.
눈을 비비고 몇 번을 읽어도 똑같았다.
[만주 지역에 대규모 중공군 집결 중. 예상 규모 70만. 전 지휘관 즉시 부대로 복귀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