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민국 전쟁영웅이 되었다-101화 (101/149)

101화. 동계 준비(1)

애국회 숙청이 한반도에 몰고 온 바람은 엄청났다.

이시영 부통령은 숙청 다음 날 곧바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해 애국회가 행해온 악랄한 행태를 국민에게 알림과 동시에, 그들의 현실을 낱낱이 밝히며 비판했다.

이종형 의원과 노덕술로부터 확보한 리스트를 시작으로 꺼져가던 불씨인 반민특위 심지에 다시 불을 지필 것을 지시했으며, 대다수 국민은 이에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그 아무리 깨끗한 물이었다 한들, 흐르지 않고 고인 물은 반드시 썩기 마련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부정부패를 절대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선열들에 정당한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하나, 그것이 어떠한 특권이나 면책권으로 작용해선 안 될 것입니다.]

[철저한 조사에 예외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번 애국회 사건에 대하여 저 또한, 성실히 조사에 임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함께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갑시다. -대한민국 부통령 이시영.]

사회 지도계층을 갈아내면, 톱니가 빠진 시계처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했던 박흥식 회장의 말은 틀렸다.

이종형 의원이 사망하자 국회는 자세한 진상규명을 위해 가열 차게 북적이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노덕술이 없는 헌병대 또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정계와 맞물려 재계 또한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는데, 자진해서 반민특위 조사에 임하겠다는 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시영 부통령이 담화문을 발표한 당일 하루에만 전국각지에서 1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자수, 자발적 조사에 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바야흐로 새로운 대한민국의 태동이 시작된 것이다.

“지프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찌뿌둥하네.”

쉬지 않고 울퉁불퉁한 길을 내달리자, 멀리 청천강 방어선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새로운 태동을 보인 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해, 내가 돌아왔다.

***

특공여단 지휘 막사 앞.

막사 앞엔 특공여단의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 마음에 환영식이라도 해주려는 모양이다.

“내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나?”

잔소리 폭탄이 날아오기 전, 멋쩍은 마음에 먼저 안부를 건넸다.

1대대장 김상옥 중령이 한 발 앞으로 다가오는 것으로 보아 그가 모두를 대신해 총대를 메기로 한 모양이다.

“여단장님···”

김상옥 중령이 나를 불렀다.

공격이 임박했다는 뜻.

이미 예상했던 터라 피해는 덜하겠지만, 김상옥 중령은 이 분야에 있어선 그 누구보다 명장이다.

만만치 않은 전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간만에 서울에 갔더니 나를 찾는 사람들이 좀 많아야 말이지.”

그의 전투력을 파악하기 위해 가벼운 대응을 던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응?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혹시 함정?

“뭐가 말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저희 곁으로 돌아와 주심에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 순 없었지만, 큰 맥락은 전달받았습니다. 그나저나 어째 가시는 곳마다 그렇게 큰일이 터지는진 모르겠지만··· 뭐, 어차피 당분간은 여단에서 꼼짝 못 하실 테니 다행입니다.”

말 속에 숨은 뼈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충분히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다.

어째 며칠 자리를 비웠더니 더 돈독한 전우애가 쌓인 기분이다.

“할 일이 태산인데 휴가 같지도 않은 휴가를 다녀왔더니, 오히려 일이나 하고 싶더군. 들어가지.”

“여독이 꽤 쌓이셨을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다고 하면, 쉬게 놔둘 건가?”

그럴 수 없다는 듯, 김상옥 중령이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여독을 풀기는 개뿔.

누군가 버린 쓰레기 70만 개가 앞마당에 있다는데, 다 치우기 전까지 쉬기는 글렀다.

***

특공여단 지휘 막사 안.

“상황이 상황인 만큼, 바로 시작하지.”

빠른 상황 판단은 지휘관의 기본 소양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김동석 대위에게 미군으로부터 받은 정찰 정보를 브리핑할 것을 지시했다.

“예. 시작하겠습니다. 미 공군 정찰기가 수집해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만주 지역에 대규모 중공군을 보충하였고, 포병대와 대공포 부대도 대폭 증원했다고 합니다. 현재 중공군이 만주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보급 지원선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생각보다, 아니 생각했던 것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제파 작전, 포위 섬멸 작전이 먹히지 않자 마침내 인해전술이라는 칼을 빼든 모양이다.

“예상 공세 일은?”

“그것까진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으나, 무식하게 서두르고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70만이나 되는 병력의 보급선을 확보하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한차례 보급의 난항을 겪은 중공군이었기에, 보급선을 만들고 지키는 것에 신중을 기울일 게 분명했다.

“중공군이 공세 준비를 마치기까지는 한 달. 길어야 보름 정도 더 걸릴 거네.”

“혹시 따로 받은 보고라도··· 있으신 겁니까?”

서울에서 출발한 지프에 올라타고 내리자마자 지휘 막사로 들어온 마당에, 당연히 다른 보고를 받을 시간은 없었다.

“근래 부쩍 찬바람이 불어오던데··· 혹시 중공 놈들이 겨울이 오기 전 승부를 보리라 생각하고 계신 거라면···”

빙고.

가장 먼저 내 예상에 대한 근거를 맞춘 이는 기마 대장 장철부 중령이었다.

“맞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말해 보겠나?”

“기마대를 지휘하다 보면 병력도 병력이지만 군마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이 사람들 생각보다 온도에 민감한 동물인 터라··· 저희 기마대에선 벌써 군마 사료 공급량을 늘리며 겨울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사료도 더 필요하고, 방한에 필요한 장비들이 늘어나는 탓에 기마병들의 군장이 무거워집니다. 그래서 머릿속에 문뜩 생각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말도 겨울을 보낼 준비가 필요하듯,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도 마찬가지다.

청천강에 도착해 가장 먼저 느낀 건, 아직 10월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진 차가운 강바람.

10월에 이 정도 날씨라면 이번 겨울엔 매서운 동장군이 출현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중공은 70만이 넘는 병력에 방한 물품과 피복을 지급할 여력이 없을 것이네. 아무 이유 없이 만주로 병력을 움직이진 않았을 터,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기 전에 공격이 시작되겠지.”

“하···”

말이 끝나자마자 문기준 중령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2대대장. 이의 있나?”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이의 없습니다. 제가 요즘 여단장님이 해주셨던 말씀대로 보는 시야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기준 중령을 처음 봤을 땐 어떤 부대에서도 볼 수 있는 애국심 넘치는 장교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게 다였다.

그랬던 그가 최근엔 나를 놀라게 할 만큼 시야를 넓혀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느낀 게 있는 모양이다.

“언제쯤 여단장님이 바라보는 시야에서 제가 바라볼 수 있을지를 생각해 봤더니··· 가늠조차 되지 않아 한숨이 나온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른 지휘관들도 이해한다는 듯 살짝씩 고개를 끄덕였고, 문기준 중령은 고개를 숙였다.

“전혀 죄송할 것 없으니 고개 들어. 그런 생각을 스스로 한다는 것부터가 훌륭한 자질을 갖췄다는 증거나 다름없으니.”

문기준 중령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자네들에게 따라잡히기 전에 나도 부단히 노력해야겠군.”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따르는 건 군인에겐 당연한 일이기에 그것만으론 훌륭한 군인이라 말할 순 없다.

자신의 상관을 청사진 삼아 부단히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휘관이라면?

그 노력 자체만으로도 훌륭하다.

막사 안에 있는 모두가 노력만 하는 게 아닌 훌륭한 자질을 토대로 누군가의 청사진이 될 만한 지휘관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여단이 아무 탈 없이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그 뜨겁던 여름을 지나 겨울이 코앞에 다가왔다.

지휘관들이 동계준비를 시작한다면 그들의 멋진 청사진이어야 할 내가 할 일은?

“좋아. 나 또한 올해 겨울이 따듯하게 느껴지도록 노력하겠네.”

마음 따듯한 말 한마디 그런 아름답지만 쓸데없는 거 말고.

진짜 따듯한 걸 준비해야겠다.

“여단장님의 말씀만 들어도 가슴이 따듯해지는 것 같습니다.”

글쎄, 그런 거 아니라니까?

부족했던 화력을 보충한 70만 중공군이 만주에 집결하고 있다는데,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거나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뭐든 이겨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마오쩌둥과 일생일대의 동지이자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가 집무실 탁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평소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그가 집어던져 망가진 집기가 바닥에 가득했다.

“총리 동지. 오늘도 주석께서 마오안잉의 안부를 물으셨다고 합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것입니까?”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는 그저 괜찮다는 말만 하면 된다고. 그게 그리 어렵나?”

“죄송합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그의 비서가 고개를 숙이자, 저우언라이가 또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이게 아니야. 미안하네. 자네에게 화풀이한들 달라지는 게 없는 것을.”

“괜찮습니다. 동지.”

마오안잉이 청천강 전투에서 실종, 사실상 전사했다는 펑더화이의 보고를 받은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마오쩌둥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저우언라이는 마오안잉의 사망 소식을 그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다.

“만주 집결 상황은 어떤가?”

“병력 집결은 거의 완료했고, 지난번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철저히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한 달이면 모든 준비가 끝날 것 같습니다.”

마오쩌둥을 설득해 70만 병력을 만주에 배치하자고 제안한 건 저우언라이 본인이었다.

‘내가 그토록 반대했거늘···’

마오쩌둥이 강경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항미원조라는 칼을 의기양양 빼 들었으나, 호박은커녕 지푸라기 한줄기도 자르지 못했다.

대규모 출병에 아무런 소득 없이 청천강에서 뼈아픈 패배를 맛본 데 이어 장남의 사망 소식까지 알리면, 마오쩌둥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평생을 함께해온 그조차 예측할 수 없었기에 도무지 보고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알겠으니 나가보게.”

“예. 동지.”

머릿속에 떠도는 모든 시나리오를 종합해봐도 언제나 같은 결과가 그려졌다.

파멸.

희망 회로를 최대한으로 돌려 봤지만, 지구상 모든 신이 도와야 공멸이었다.

임기응변으로 부대를 싹싹 긁어모아 만주에 병력을 집결시켜 겁을 줬음에도, 미국과 한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는···”

무언가 결심한 듯 저우언라이가 총리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래. 나일세. 지금 당장 갈 곳이 있으니 준비 부탁하네.”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 남은 믿을 구석을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