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제임스 앨워드 밴 플리트(2)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동지.”
모스크바에서 막 도착한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 주석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전면전을 앞두고 마오안잉을 다시 베이징으로 불러오라는 지시에 더는 마오안잉의 실종 소식을 숨길 수 없었다.
“정말··· 시신조차 찾지 못한 것이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으나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찾지 못하는 건 마오안잉뿐만이 아니었다.
청천강 이북에서 포격으로 인해 가루가 된 중공군만 수만 명.
특정인의 시신을 찾아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
마오안잉은 마오쩌둥에게 있어 조금 특별한 자식이었다.
셋째 마오안룽은 어린 나이에 이질로 사망했으며, 마오안칭은 둔기에 맞은 뇌진탕 후유증으로 뇌 손상을 입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멀쩡하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었던 자식이 마오안잉밖엔 없었다.
“하···”
긴 한숨을 내쉰 마오쩌둥 주석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에게 왜 사실을 알고도 지연보고 했는지.
펑더화이는 대체 뭘 했길래 이런 사단을 만들었는지.
“저우언라이.”
“예. 동지.”
마침내 선 채로 미동도 없이 마오쩌둥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저우언라이의 이름이 불렸다.
슬픔을 애써 삼켜내고 말하는 듯,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마오안잉을 그렇게 만든 놈들을 똑같이. 아니,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 이 책상 위에 장식으로 올려놓을 것이네. 이 전쟁은 이젠 북조선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어.”
“스탈린 동지가 미그 전투기를 지원해주기로 했습니다. 방공부대를 대폭 강화한 만큼, 전과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마오안잉의 숭고한 죽음은 전 인민 가슴속 깊이 영웅으로 새겨질 것입니다. 동지.”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 저우언라이는 모스크바까지 한달음에 달려갔음에도 스탈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대외에는 알릴 수 없는 건강 문제가 있다나 뭐라나.
아무런 소득 없이 헛걸음할 순 없어 무릎 꿇다시피 애걸복걸한 결과, 서면을 통해 중공군 활동 반경에 미그 15 전투기 출격을 허가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최신예 제트 전투기인 미그 15 전투기는 그간 중공 기지에서 출격하지 않았다.
소련이 만든 기체인 미그 15가 한반도에 출현할 경우, 미국과의 마찰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약속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그와 대면조차 못 한 채 이뤄낸 성과치고는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암··· 그래야 하오. 마오안잉은 중공의 영웅으로 길이길이 역사에 남아야만 해. 이 일은 저우언라이 자네가 직접 맡아 처리하게. 난 내 맏아들을 가슴속에 묻을 테니.”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두고 웃지 못할 생쇼가 베이징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청천강 특공여단 진지.
“음식이 입맛엔 좀 맞나?”
“부족해! 더 줘! 더! 더!”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얼굴에 음식을 묻히고 먹는 포로.
마오안잉이었다.
새끼, 더럽게 많이 먹네.
족히 세 사람이 배불리 먹을 음식을 배식해가며 살려두고 있었다.
“여단장님께서는 중공 놈들 말도 하실 줄 아십니까? 영어에 중공 어에···”
안 와도 된다고 수차례 말했음에도 내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따라 하고 싶은지, 기어코 옆에 따라온 2대대장 문기준 중령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잘 하진 못해. 그냥저냥 알아들을 정도야. 그러고 보니 2대대장.”
“예?”
“자네. 내가 말한 방한용품은 하나도 빠짐없이 챙겼나? 무릇··· 훌륭한 지휘관이 되려면 자기 군장은 자기가 챙겨야 하는 법.”
대대장 정도 되면 자기 군장을 직접 챙길 리가 없지. 안 그래?
문기준 중령에게서 잠시 벗어나려 던진 말일 뿐이었다.
“물론입니다. 여단장님을 본받아 군장 밑바닥부터 제가 직접 채웠으며, 방한용품은 혹시 몰라 예비로 더 챙겨두었습니다.”
“··· 잘했네.”
그래 잘했다.
아주 훌륭해.
내 말문이 막히게 만들 다니.
‘2대대장 이 자식. 너무 모범생이 되어버렸어···’
찰거머리처럼 붙어대는 문기준 중령을 떼어내는 작전은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다.
문기준 중령은 어차피 중공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마오안잉.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더 줘! 밥! 배고파···”
치료를 마쳐 육신은 멀쩡했지만, 가출한 마오안잉의 정신은 아직 저 먼 곳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꽃밭에서 뒹구는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듯이.
듣고 싶은 소식을 먼저 듣는 호의를 베풀려 했건만, 나쁜 소식부터 말해줘야겠다.
“나쁜 소식은 내일부터 네 배식 양을 절반 이하로 줄일 계획이다. 소도 여물을 뜯으려면 밭을 갈고, 강아지는 귀엽기라도 하지 넌 뭐야 대체.”
이걸 돼지처럼 식용으로 쓸 수도 없고.
“안돼··· 안돼··· 그것만은 안돼.”
꽃밭에서 뒹굴어도 말은 다 알아듣는 모양이다.
마오안잉이 두 손을 싹싹 빌며 울부짖었다.
“여단장님··· 대체 어떤 말을 하셨기에 이 정신 나간 식충이가 이렇게··· 혹 정신을 고치기라도 하신 겁니까?”
2대대장의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묻는 것이다.
내가 화타냐?
이 금쪽이 정신을 고쳐놓게.
조금 있으면 밴 플리트 중장을 만나러 가야 한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대꾸해줄 시간이 없었다.
“좋은 소식은 네가 몇 가지 일만 도와준다면 배식 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거기에 더해···”
주머니 안에 고이 모셔놓은 필살기.
아주 먹음직스럽게 생긴 달걀 하나를 건빵 주머니에서 꺼내 마오안잉에게 보여줬다.
“매일 특식으로 달걀 하나를 네가 원하는 대로 요리해주지. 어때, 일할 마음이 좀 생기나?”
“···”
마오안잉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내 필살기가 먹히지 않은 건가?’
정신이 나갔음에도 적에게 도움이 되진 않겠다는 기백이 무의식에 숨어있는 모양이다.
일이 조금 복잡해지려는 찰나.
마오안잉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2개? 달걀 2개를 달라고?”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는 마오안잉을 보며 느꼈다.
이 새끼, 승부사다.
“좋아. 2개.”
생각했던 것에 비해 2배나 많은 달걀을 제시한 후에야, 마오안잉과 협상에 성공할 수 있었다.
***
밴 플리트 중장 임시 지휘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밴 플리트 중장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어서 오게. 자네가 직접 여기까지 온다 해서 놀랐네. 무슨 일로 나를 보자 했을까 기대되기도 하고 말일세.”
당연히 밴 플리트 중장에게 얼굴도장이나 찍자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미 장성들 사이에서 내가 기대의 아이콘이라도 된 모양인데,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중장님께 정식으로 인사도 드리고··· 드릴 말씀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찾아왔습니다.”
미 장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다.
동방예의지국 출신에 걸맞은 예의, 그사이에 조미료처럼 섞인 단호함.
가끔 예의 바른 것과 굽신거리는 것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둘은 엄연히 다른 태도다.
거기에 더해 어떠한 전투에서도 승리하는 국군 지휘관이라는 정도의 숨은 배경만 있으면 참 쉽다.
“티라도 한잔하겠나? 아니면 바로 본론으로?”
숨은 배경을 유지하는데 엄청난 노력과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지만, 그로 인해 쓸데없는 인사치레나 잡담을 줄이고 상대방으로 하여 집중하게 만드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탁월했다.
“중장님께서 바쁘실 것 같아 바로 본론으로 가겠습니다.”
“역시 듣던 대로 화끈하군. 말해보게.”
“아드님께서 함께 참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전쟁에 뛰어든 건 밴 플리트 중장만이 아니었다.
그의 아들 밴 플리트 주니어 또한 공군 폭격기 조종사로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한반도 땅을 밟았다.
“맞네. 미 제5공군에서 B-26 폭격기를 조종한다더군. 내 아들이 함께 왔다는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들리던가?”
아들 이야기에 밴 플리트 중장이 어깨를 펴며 말했다.
“그런 자랑스러운 소문은 더 빨리 퍼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드님이 공군에 계시기에, 중장님을 찾아왔습니다.”
“지금부터 자네가 할 말이, 내 아들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원래대로라면 밴 플리트 주니어 대위는 정찰 폭격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격한 뒤, 대공포에 의해 격추당해 기지로 복귀하지 못한다.
수색대를 보냈음에도 그를 찾지 못하자, 수색 중단 명령을 밴 플리트 중장이 직접 내리게 되고.
그보다 가슴 찢어지는 명령은 없었을 것이다.
“여태껏 소련이 미그 15 전투기 출격을 엄격하게 통제해왔습니다만, 중공이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는 지금은 상황이 다를지도 모릅니다.”
B-26 폭격기는 지상에 있는 자들에겐 날아다니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지만, 미그 15 전투기에는 손쉬운 사냥감일 뿐이다.
지금까지는 F-51 머스탱, F-80 전투기만으로도 공중과 지상을 모두 쓸어버렸지만, 미그 15 전투기가 등판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간 북한군과 중공군을 향해 신나게 포격을 퍼부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제공권의 확보.
완벽하게 하늘을 장악하지 못한다면, 그 영향은 지상군에게는 매우 치명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자네 말은 미그 15 전투기가 뜨면 폭격기를 모는 내 아들이 위험···”
거기서 끝이 아니다.
“중장님께서 생각하신 양의 포탄을 다 쏟아부을 상황이 만들어질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미그 15 전투기에 대적할 대항마가 필요합니다.”
“F-86 전투기 말인가?”
“현재로선 유일한 대항마가 되어줄 겁니다.”
“음··· 그전에 궁금한 것이 있네. 이 부탁을 하려 굳이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
밴 플리트 중장이 충분히 의문을 가질만하다.
전부터 친분을 다진 워커 중장이나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부탁하는 게 더 빠르고 편할지도 모른다.
“중장님께 전달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내 아들 때문인가?”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상황에 걸맞게 찾아가야 할 사람이 있다.
무작정 무기 지원을 요청해 달라며 어리광을 부려대는 게 아니니까.
전쟁과 전투에서 이기는 것, 소중한 생명을 잃지 않을 것, 마지막으로 적에게는 무자비할 것.
모든 지휘관 머릿속에 떠돌아야 할 생각이지만, 밴 플리트 중장은 아들의 안위가 더해져 있다.
“요청을 해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F-86 같은 신무기를 그리 쉽게 보내줄지는 나도 장담을 못 하네.”
“그거면 충분합니다. 중장님.”
미국은 새로 개발한 무기를 해외에 지원하기를 극도로 꺼려왔다.
행여 핵심기술이 노출이라도 될까 노심초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방금 만들어 나온 따끈따끈한 새 전투기 성능을 시험해보고 싶은 게 인간의 욕심이지.’
당연히 밴 플리트 중장의 지원 요청만으로 F-86을 받아낼 생각은 아니다.
그의 지원 요청은 이미 거의 완성되어있는 판 위에 확실한 마무리를 위한 것일 뿐.
-밴 플리트 중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밴 플리트 중장이 나를 쳐다봤다.
들여도 괜찮냐는 뜻인 것 같았다.
“들어오게.”
고개를 끄덕이자,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인가?”
“통신대대에서 중공군이 사용하는 통신 주파수를 찾아내 감청했다고 합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잔뜩 궁금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에게 시끄러운 중공군 감청내용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제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