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출현(1)
“후···후··· 여단장님. 큰일···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언제나 그래왔듯, 통신 장교가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연신 호흡을 고르며 말하는 걸 보니, 숨까지 참으며 달려온 모양이다.
“무슨 일이지? 중공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고 있다던가?”
“그렇습니다! 연합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2주는 빨리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것참 큰일이군. 알겠네.”
“예?”
별일 아니라는 듯한 심드렁한 말투에 통신 장교가 당황한 모양이다.
“자네가 말한 대로 큰일이라고.”
물론 큰일에 대한 주어는 연합군이 아니라 중공.
예상치 못한 중공의 빠른 움직임은, 내가 정성스레 준비한 쇼를 관람한 마오쩌둥의 답례가 분명했다.
당연히 마오쩌둥은 사진 속 남자를 마오안잉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간 한순간에 중공 주석에서 배불뚝이 거짓말쟁이로 전락하게 될 테니까.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이슈를 이슈로 덮는 최악의 선택지를 고르도록 종용했겠지.
“알겠으니 계속 수고해주게.”
“예! 여단장님.”
통신 장교가 후다닥 뛰쳐나갔다.
‘요단강을 건너고 싶어 환장했군.’
중공군이 2주 빨리 움직였다는 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자마자 요단강을 건널 시간이 2주 앞당겨졌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그에 따라 아직 연합군 또한 완벽하게 겨울 준비를 끝마치진 못했다.
강을 넘은 중공군이 청천강 인근에 도착하기까지 걸릴 시간과 거리를 계산 해봤을 때, 완벽한 손님맞이를 위해서는 중공군의 진격 속도를 일주일 정도 늦춰줄 지연전이 필요하다.
“우리도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움직여야겠군.”
큰 걱정은 없었지만, 조금 서두를 필요는 분명 있다.
지연 작전은 이미 압록강과 두만강 강변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을 테니까.
***
압록강 강변.
높은 상공에서 보는 강변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작은 점이 모여 공간을 새까맣게 만든 것의 정체는 중공군들의 검은 머리였다.
“저게 다 중공군이라니··· 많기는 더럽게 많군. 확성기 켜고, 전단 투하해.”
F-51 머스탱 전투기 편대의 호위를 받는 C-47이 전단을 뿌려댔다.
기내에 가득 차 있던 전단이 전부 뿌려지자, 통역관이 확성기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아, 아.]
한차례 목을 푼 뒤, 확성기에 목소리를 실어 보냈다.
[우리는 여러분을 죽일 마음이 없습니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십시오. 세계 평화를 수호하는 UN군은 여러분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에게 따듯하게 덥힌 식량을 줄 것이며, 생명을 반드시 존중해줄 것입니다. 어쩌면 달걀을 나눠 줄지도···]
달걀은 전단을 유심히 본 통역관의 입에서 나온 애드립이었다.
당연히 아직 눈앞에 적은 없고 함께 강을 넘는 동료가 70만이라면, 그 자리에서 총을 내려놓고 투항하는 정신 나간 놈은 없을 것이다.
그랬다간 달걀을 손에 쥐어보기도 전에 뒤통수에 총알이 박힐 테니까.
“이게 정말 효과가 있긴 한 겁니까?”
마오안잉이 살아있음을 알린 선전은 중공 핵심 수뇌부를 통째로 흔들어놨다.
심지어 그 대단한 선전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다만, 마오안잉 같은 대어를 계속 잡아댈 순 없기에, 모든 선전이 그와 같은 엄청난 효과를 불러올 순 없다.
그럼에도 확성기를 싣고 압록강까지 날아온 이유는 적의 투항과 작전 포기를 유도하고, 무엇보다 투항하지 않더라도 투항할만한 반동분자를 미리 색출해내야 하는 까다로움을 선사하기 위해서였다.
“제임스 중위. 효과가 있더라도, 그게 이 수만 피트 상공에서 바로 보이겠나? 방송이 끝나는 즉시 기지로 복귀할 테니 긴장 풀지 마. 젠장. 아까 먹은 점심이 체했는지 속이 더부룩하군.”
하퍼 대위가 명치 부근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한 것 같으니 복귀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전단도 제대로 살포했고, 들릴진 모르겠지만 방송도 수차례 반복했으니. 무엇보다 F-51 저 녀석들은 이제 슬슬 연료 게이지만 쳐다보면서 똥줄 태우고 있을 겁니다.”
땅에서 굴러가는 지프야 기름이 떨어지면 내려서 기름을 채우면 그만이지만, 상공에 떠 있는 항공기들은 그 즉시 얼마 못 가 추락이다.
항속거리가 2,660KM에 육박하는 C-47은 이 정도 작전으론 연료에 대한 부담이 없었지만, 보조 연료탱크를 장착하지 않은 F-51 머스탱 편대는 슬슬 부담을 느낄만한 작전 거리와 시간이었다.
“좋아. 좌측으로 선회해 기지로 복귀한다.”
“좋습니다. 좌측으로 선회!”
하퍼 대위와 제임스 중위가 조종간을 좌측으로 꺾자, F-51 편대가 그들을 따라 좌측으로 선회했다.
선회를 마치고 수송기 머리가 완전히 남쪽을 바라볼 즈음.
-두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
수송기 조종사로선 절대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동체 후미에서 들려왔다.
미그 15 전투기가 쏘아낸 23mm 기관포가 동체 주변에 쏟아져 내렸다.
신이 도왔는지, 다행히 수송기 동체는 아직 무사했다.
적기를 발견한 F-51 머스탱 편대가 전투를 위해 양쪽으로 갈라진 뒤 고도를 높여 상승했다.
“적기 출현! 적기 출현!”
“미그··· 미그기가 떴습니다! 이런 제기랄.”
동체 내부에 가득했었던 평화로운 분위기가 한차례 기관포 세례에 오 간데없이 사라졌다.
“이미 빠져나가긴 늦은 것 같습니다. 어쩐지 오늘 운수가 더러울 것 같더니만.”
제임스 중위가 증발하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말했다.
“기지에 구조 요청하고 급속하강 준비해! 최대속도로 하강해 비상착륙한다.”
하퍼 대위가 빠르게 내린 판단은 비상착륙.
C-47 수송기의 최대속도는 대략 360KM/H.
엔진 출력을 터질 듯 높여봐야 400KM/H를 넘지 못한다.
반면 미그 15 전투기 최대속력은 1100KM/H.
말 그대로 무슨 수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그야말로 창공의 악연이었다.
“오! 신이시여.”
아직 압록강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설사 운 좋게 비상착륙에 성공한들, 벌레로 꽉 찬 욕조에 몸을 쑤셔 넣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착륙해도 문제, 착륙을 못 해도 문제.
좆됐음을 감지한 제임스 중위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강!”
“하··· 하강! 윽.”
급속하강을 실시하자 마치 90도로 만들어진 롤러코스터를 타고 수직으로 땅을 향해 내리박는 기분이 들었다.
그 뒤를 미그기 한 대가 여유롭게 뒤따르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퍽! 퍼버버버벅!
하강 도중 동체를 부술 듯이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송기에 따라붙은 미그 15기가 쏜 기관포가 좌측 날개를 훑고 지나는 소리였다.
“이런 제기랄! 제기랄! 젠장! 대위님, 좌측 날개가 박살이 났습니다! 머스탱 저 멍청이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대체!”
제임스 중위가 생각나는 온갖 욕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제임스 중위, 그 입 박살 내 버리기 전에 입 닫고 비상착륙에나 집중해!”
동체와 날개를 연결해 주는 부위에 기관포를 맞아 시꺼먼 연기와 함께 날개가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날개가 떨어져 나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현재고도 7000피트! 6800피트! 6500··· 6000···”
다행인 점은 아직 날개가 붙어있다는 것이고, 불행한 점은 그 날개가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
“엔진에 심각한 손상이 있다! 추락한다. 반복한다! 추락···”
머스탱 편대가 직면한 상황은 하퍼 대위와 제임스 중위가 모는 C-47 수송기보다 훨씬 심각했다.
이미 F-51 머스탱 전투기 편대 4대 중 1대는 미그 15 전투기가 쏴대는 기관포에 엔진이 명중 당해 조종사가 비상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런 개자식들이!”
머스탱 조종사들이 제임스 중위 말대로 멍청이였다면, 이미 하늘에 떠 있는 건 미그 15 전투기뿐이었을 것이다.
F-51 머스탱 전투기와 미그 15 전투기의 성능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공중전에 영향을 주는 최고 속도, 무장, 상승률 무엇하나 미그기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그 15기와 같은 상공에 떠 있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베테랑 조종사들의 기체 운용 능력 덕분이었다.
“아더, 브라이언! 최대 출력으로 상승해!”
“최대 출력 상승!”
“최대 출력 상승!”
아더 대위와 브라이언 대위가 모는 F-51 전투기가 곡예를 하듯 하늘로 솟구쳤다.
그 뒤를 미그 15기 3대가 뒤따랐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버벅거리는 듯 보였다.
“편대장님, 편대장님 꼬리에 붙은 그놈 말고는 학생들인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이깟 애송이들한테 격추당할 순 없지. 반드시 살아서 테일러 몫까지 복수한다!”
편대장 톰 소령이 곡예비행을 하며 따라붙은 미그기 한 대를 떼어내기 위해 고전하고 있었다.
저 훌륭한 전투기를 등신같이 모는 꼴을 보니, 숙련된 조종사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이제 갓 조종사 훈련을 마친 초짜들인 것 같았다.
미 공군 조종사들은 적기의 조종 수준에 따라 교관 또는 학생으로 구분 지어 부르곤 했다.
이번 미그 15 전투기 편대는 한 명의 소련군 교관 뒤를 중공군 학생 세 명이 졸졸 따라온 꼴이었다.
“편대장님! 조금만 더 유인하면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만 버티면···”
이 상황을 버티라고?
“···엿 먹어. 아더.”
시간이 지날수록 압도적으로 불리한 건 당연히 머스탱 편대였다.
처음 미그기를 조우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이 압도적으로 불리했지만.
“꼬리 잡았습니다. 잘 가라. 이 개자식아!”
미그기 시야에서 벗어났던 아더 대위가 조종간에 달린 기관총 발사 버튼을 힘껏 움켜쥐었다.
다다다다다다다.
12.7mm 기관총이 우물쭈물 어찌할 바 몰라 하는 미그기 우측 날개를 향해 날아갔다.
“명중! 명중!”
“격추했나? 격추했으면 빨리 내 뒤에 붙은 거머리 좀 떼어주지. 그래.”
기적.
F-51 머스탱 전투기로 미그 15 전투기의 꼬리를 잡은 건 기적이었다.
조종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평생 술안주로 써먹어도 질리지 않을 그런 기적.
팅팅팅팅.
4~5발 정도가 미그기 우측 날개를 정확히 명중했지만, C-47 수송기 날개에 맞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났다.
“어··· 죄송합니다. 편대장님. 분명 명중시켰는데 음··· 그래도 연기는 조금 피어오릅니다.”
“···엿 먹어. 아더.”
목숨을 걸고 꼬리를 잡아 날개를 명중시켰음에도, 작은 한 줄기 연기만 피어오를 뿐이었다.
순식간에 엿 두 개를 받아먹은 아더 대위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별다른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톰 소령이 탄 머스탱 전투기는 이미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선지 오래였다.
작전 비행시간 4000시간에 육박하는 그의 경험이 없었다면, 한계가 아니라 이미 저승의 경계를 넘었겠지만.
그가 조종하는 머스탱 전투기 엔진이 과열되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더, 브라이언.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니까.”
톰 소령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 시각, 연합군 공군 김포기지에서 출격한 전투기 2개 편대가 압록강을 향해 전속력으로 쏘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