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NSC 회의(2)
트루먼 대통령이 손에 든 NSC-88 문서 첫 장을 넘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확립이 미국에 미치는 영향]
얼마나 첫 장을 만지작거렸으면, 벌써 첫 장 모서리에 작은 보푸라기가 생기면서 헤지고 있었다.
“대통령님. 걱정이 크시다면 회의가 끝난 뒤에 천천히 읽어보셔도 됩니다.”
물론 지금 당장 문서에 서명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서 앞부분에 써진 그대로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NSC-88이 미국의 이해관계에 타당하다면?
서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확립을 위해 막대한 군사력과 재정을 동북아, 특히 한반도에 쏟아부어야 한다.
“아니, 지금 읽어보겠네. 자네들이 없는 곳에서 본들 뭐가 달라지겠나. 혼자 머리만 더 쥐어뜯겠지.”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문서 첫 장이 넘겨졌다.
NSC-88은 무려 50장이 넘는 서류 뭉치였다.
서명하기 위해선 50장 안에 있는 주제와 세부 항목들 하나하나 일일이 다 분석하고 따져봐야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랬다간 회의실에 몇 주, 아니 몇 달은 갇혀있어야 할 테니까.
다행히도 첫 장을 넘기자, 큰 주제를 담은 목차가 눈에 들어왔다.
“후···”
트루먼 대통령이 심호흡한 뒤, 목차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만주와 요동지역으로의 동북아 전쟁 확대]
본문을 보지 않고 작은 글씨로 써진 세부목차만 보더라도, 어떻게 흘러갈 내용인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소련은 2차대전 상흔으로 인한 전쟁복구에 정신이 없다는 점, 미국도 상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소련보다는 월등히 나은 상황이라는 전제가 있었다.
해당 내용을 밑받침하는 근거로는 비록 미국의 핵 독점은 깨졌지만, 소련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여전히 압도적인 핵전력.
미국은 무상으로 동맹국에 무기와 자원을 무상원조했던 반면, 소련은 북한과 중공에 돈을 받고 원조를 했던 점등이 근거로 명시되어 있었다.
“이강산··· 이 이름을 NSC 보고서에서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한국군의 작전 수행능력과 능력 향상에 대한 보고’ 항목에 이강산 대령이 예시로 적혀있는 것을 본 트루먼 대통령이 말했다.
“정보국과 정책기획실에서 정확한 사실을 확인해 본 결과, 한국군 장교 이강산 대령 전공에 부풀려지거나 과장된 내용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폴 니츠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신이 내놓은 NSC-88의 신뢰도를 높였다.
“NSC-88이 언제부터 연구된 보고서지?”
“사실 NSC-88의 기초는 기존 NSC-68을 수립하기 위해 연구에 들어가던 시점 거의 동시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만, 장제스 정부가 중공에 패배한 후, 서유럽을 중심으로 소련 봉쇄에 집중하였으나 예상했던 큰 성과는 얻지 못했습니다. NSC-88은 한국이 예상외로 공산세력의 공세를 잘 막아낸 시점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연구, 작성이 시작된 보고서입니다.”
만약 한반도의 전황이 지지부진한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갔다면, NSC-88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보고서란 소리였다.
아군의 피해는 생각보다 적었고, 적의 피해는 막대했다.
북한 정부와 군부 수뇌부는 개 박살 난 채 소련이나 만주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고, 생각 없이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파견한 중공은 현시점에서도 막대한 희생을 강제당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념을 인민들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오쩌둥이 느끼기에 인구 절반이 핵무기에 날아가는 건 무섭지 않지만, 지금은 그 신념마저 벼랑 끝에 몰려있는 꼴이다.
“세부적인 내용은 차차 검토해보기로 하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았네.”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미국의 딜레마.
트루먼 대통령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실현 가능성이 있는가? 따위의 질문이 아니다.
창고에 쌓아놓은 수많은 기밀작전은 실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실현하지 않은 거니까.
미국이 실현을 결정짓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우리 미국이 그렇게 해서 뭘 얻을 수 있지?”
전쟁을 확대하면서 드는 막대한 물자와 자원, 그보다 중요한 건 인적 손실과 바꿀 정도의 이득.
중공의 마오쩌둥은 핵폭탄으로 2억 명이 죽으면 다시 3억 명을 다시 낳으면 된다는 인명을 극도로 경시하는 사상을 갖고 있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그와 달랐다.
다른 게 당연한 거지만.
“역시 이 보고서를 만든 정책기획관 자네가 대답해주는 게 가장 속 시원하겠어.”
트루먼 대통령이 일일이 참모들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역시 폴 니츠 정책기획관이었다.
“정책기획실 역시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을 가장 1순위에 두고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여기··· 질문에 대한 답이 적힌 요약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황에 따라 세부적인 갈피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폴 니츠 정책기획관이 서류가방에서 또 다른 서류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은 뒤 말을 이었다.
“지금 드린 서류에는 영토를 넓힌 한반도를 통해 소련과 중공을 봉쇄시켰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에 대한 연구결과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폴 니츠 정책기획관이 입을 오물거렸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표정과 함께.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이 눈치를 보내자 정책기획관이 오물거리던 입을 열었다.
“아직 연구가 완벽히 끝난 건 아닙니다만, 지금 정책기획실이 연구 중인 내용을 말씀드리자면 만주 지역에 있는 막대한 양의 자원과 노동력과 중공을 통해 소련의 핵무기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소스를 받아 연구 중입니다.”
“소스? 소스라니. 정보국이 알아낸 정보란 말인가?”
“서류에 담긴 내용만으로도 NSC-88을 실행으로 옮겨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
뭔가 부담스러운 듯, 정책기획관이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흠··· 대통령님께서 지금 궁금하신 건 소스라고 칭하신 정보의 출처와 정보원인 것 같습니다만.”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눈치 없이 정책기획관이 깔던 밑밥을 날려버렸다.
시원하게.
“···정보의 출처는 한국입니다.”
한국?
한국이란 말에 모두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트루먼 대통령만 빼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됐네. 출처와 정보원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으니. 각자 돌아가서 보고서 한 글자도 놓치지 말고 검토한 뒤에 보고해주게. 한 이틀이면 되겠나?”
“이틀···”
“수고들 했네.”
이틀이면 잠도 자지 말라는 소리였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 목구멍에서 입까지 차올랐으나, 말을 입 밖으로 통과시킨 사람은 없었다.
“아, 정책기획관 자네는 나 좀 보지. 잠깐이면 돼.”
트루먼 대통령의 나긋한 말투에 폴 니츠 정책기획관이 움찔거렸다.
***
진퇴양난(進退兩難)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려운 처지.
한반도에 들어온 70만이 넘는 중공군들의 상황은 이미 어려운 처지를 초월한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지난번 만주에 있는 공군 기지들을 폭격한 결과.
국경 인근에 나타나던 공산군 미그기의 출격 횟수가 확연하게 줄어든 것은 물론, 어렵사리 뜬 미그기 편대는 연합군의 F-86 전투기 편대와 마주치는 순간 전의를 상실하고 기수를 돌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공산군 조종사들에겐 보이지 않는 수호신과 같았던 미그앨리가 사라지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제공권을 뺏기면 답이 있나? 대책 없이 처맞아야지 뭐.’
나름대로 준비를 한 중공군의 보급선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또다시 처참하게 끊어졌다.
먹거리를 얻을 수 있을 만한 북한의 평야 지대는 이미 잿더미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고, 중공이 괄약근을 바짝 쪼아 만들어낸 보급은 번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고폭탄과 함께 숯으로 변했다.
그중에 가장 최악인 점?
아직 마오쩌둥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지 기세 높게 한반도에 들어온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폭격을 피해 참호를 파고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뿐이었다.
연합군과 국군의 상황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여단장님. 이거 진짜로 뜨시다 못해 뜨겁습니다. 진작에 이런 게 있었으면···”
김동석 대위가 핫팩을 두 손으로 감쌌다.
11월.
요 며칠 사이 기온이 부쩍 내려갔다.
입에서 미세한 입김이 나올 정도의 기온이었다.
거의 다 왔다는 듯, 겨울이 자신의 존재감을 뽐냈다.
“수색 정찰을 나가는 대원들에겐 아낌없이 보급할 예정이니 최선을 다해주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단장님.”
중공군의 동향을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김동석 대위 휘하에 정찰대는 서로 교대해가며 북쪽과 남쪽을 오가기를 반복했다.
하루마다 땅을 파거나 동굴 같은 은신처를 찾아야 하는 정찰대원들에게 핫팩은 크나큰 선물이었다.
“뚜껑 한 번 열어보겠나? 시간이 지나도 물을 따듯하게 유지할 수 있는 수통이라고 생각하면 될걸세.”
“오··· 생긴 것만 보면 유리로 만든 포탄 같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리자 김동석 대위가 문제가 있냐는 듯 물어왔다.
‘웃긴 게 떠오른 걸 어째.’
[이게 바로 포탄입니다. 포탄! 작은 건 76mm 같고··· 큰 건 122mm 포탄입니다.]
보온병을 보고 포탄이라 말한 재밌는 아저씨가 한 명 있었거든.
“흠흠. 아무 일도 아니네. 내가 점심 먹고 난 뒤에 뜨거운 물을 넣어놨으니까··· 한 6시간은 지났겠군. 어서 열어보게.”
완벽한 겨울 대비를 위해 핫팩에 이은 발명품.
이름하여 보온병.
보온병은 생각보다 간단한 원리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스테인리스 대신 유리로 만들어 깨질 우려는 있지만,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은밀하게 적지를 정찰하는 정찰대에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정말 이게 6시간 전에 담은 물이 맞습니까? 방금 끓인 물을 담았다 해도 믿을 것 같습니다.”
김동석 대위가 뚜껑을 열자 보온병에서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왔다.
“보온병은 정찰대에게 우선 적으로 한 개씩 보급할 예정이네. 그건 자네 선물.”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얼른 가서 부대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선물을 받았다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기쁨을 정찰대원들과 함께 나누려는 걸 보니, 그가 얼마나 대원들을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가 보게.”
연합군 수뇌부들과 나는 청천강 방어선에서 중공군을 기다리는 전략을 택했다.
굳이 방어선을 뒤로하고 북진해 중공군과 싸워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에 비해 중공군은 많은 옵션을 가지고 있다.
청천강에 수장되거나, 폭격을 맞고 죽거나.
이 옵션들이 너무 아플 것 같으면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옵션도 있다.
이 정도면 풀옵션이지.
그들이 어떤 옵션을 골랐는지에 따라···
“여··· 여단장님!”
드디어 중공군이 옵션을 선택한 모양이다.